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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나라

eunyongyi 2018. 7. 29. 15:54

토르디스 엘바, 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책세상 펴냄. 2017년 12월 25일 초판 1쇄.

며칠 전 얄궂게도 구원모 전자신문 사장에게 충성하며 호가호위한 자를 동네 식당에서 봤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내게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다가 내가 누군지를 알아보고는 “어!” 하며 놀라는 걸 보니 그곳 주인인 모양. ‘전자신문 그만두고 식당 차렸나 보지. 서울 남동쪽 경기도에 사는 걸로 알았는데 어찌 서쪽 서울까지 왔을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곧바로 돌아서 나왔다. 뒤돌아볼 까닭 없었고.
나는 나를 부당히 해고했던 구원모 사장을 잊을 수 없다. 구 사장 뜻 좇아 나를 괴롭힌 자 몇몇의 몹쓸 짓도 잊히지 않고. 구 사장과 몇몇이 내게 사과한 적? 없지. 하여 나는 구 사장과 몇몇을 꾸짖지 않은 채 잘못 덮어 줄 마음이 없다.
자신을 강간한 톰 스트레인저를 용서한 토르디스 엘바. 훌륭했다. 자기 범죄를 솔직히 드러내고 용서를 구한 톰 스트레인저. 대단했고.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범죄와 아픔 풀어 없앤 흐름 보며 나는 많이 배웠고 깊이 느꼈다. 내 앞날 숨 판판히 다지는 데 도움이 될 듯싶고.
음. 그러나··· 두 사람이 옛 범죄 떨어내려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2013년 삼월 27일부터 사월 4일 사이, 그 무렵 전자신문 안 내 모습 떠올라 한숨. 짓다. 2013년 사월 1일 갑자기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된 내 고등학교 후배가 나를 물어박지르기 시작했다. 전자신문 안 누군가 그리하라 시켰겠지. 능력 없음에도 자리 높여 줘 가며.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잊힐 까닭 없고.

덧붙여 책 속 여러 토막.

수년 전 내 삶을 갈가리 찢어놓았던 그 남자. 그는 낯모르는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내가 의식을 거의 잃은 채 발작적으로 구토하고 있는데도 의료진의 도움을 거절했던 남자. 도움은커녕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두 시간 동안 나를 강간했던 남자.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14, 15쪽).

여자들은 별것 아닌 일로도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는 살해되기까지 하지 않던가(31쪽).

수백만이나 되는 다른 여자들처럼 나도 공격을 당하면 비명을 지르며 상대방의 눈이나 사타구니를 가격하라고 배웠다. 자동차 열쇠를 주먹 밖으로 뾰족하게 세워서 공격자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라고 배웠다. 조명이 어두운 곳은 피하고 비상 전화기가 교내 어디에 있는지 미리 알아두라고 배웠다. 마시고 있는 음료수에서 절대로 눈을 떼지 말라고,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지 말라고, 데이트하러 나갈 때는 누구를 만나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반드시 알리고 나가라고, 공공장소에서 혼자 있을 때는 낯선 남자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라고 배웠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 옷을 너무 야하게 입지 말라,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지 말라, 무엇보다도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쫓아오거든 무서워하는 티를 내지 말라.
간단히 말해서, 내 성별이 여자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다른 수백만의 여자들처럼 나 역시 아주 이른 나이 때부터 잘 배웠다(32, 33쪽).

“금방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 먼저, 사회에 여성 혐오가 얼마나 광범하고 일상적으로 퍼져 있는지 알게 해 주는 사례들을 열거했어. 성폭력, 강간에 관한 농담, 여성의 대상화 따위 말이야(178쪽).”

톰. “주변에서 성추행을 생각나게 하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있어. 파티에서 십 대 소녀를 윤간했다는 뉴스라든가, 남성 잡지에 실린 여성 유명인의 반라 사진이라든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데이트 강간 약에 대한 농담 따위 말이야(177, 178쪽).”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말도 못해······ 처음에는, 말 그대로 네가 날 찢었다고 생각했어. 내 가랑이에서 가슴팍까지 찢어발겨놓은 느낌, 바로 그 느낌이었어. 차츰 시간이 지나서 다리 사이가 무감각해졌어. 하지만 네 잔인한 골반뼈가 내 허벅지를 끝없이 파댔어. 그게 얼마나 아팠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어? 두 시간 연속으로 허벅지에 매질하는 거나 다름없었어. 그 후 2주 동안 무릎까지 시커먼 멍이 들었어, 알아(190, 191쪽)?”

그 남자의 음란한 시선 때문에 나는 마치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옆에서 아무 걱정 없이 걷고 있는 톰을 쳐다봤다. 여자가 길에서 성적인 위협을 가하는 시선으로 그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가 위협을 느낄 가능성 역시 거의 없다(331쪽).

나는 머리 위의 예술 작품을 찬찬히 보면서, 성폭력이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람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 내 말을 다시 생각했다. 성폭력을 극복하려면 공동체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자라야 하고, 잘못된 생각을 다듬어 내야 하고, 노력을 합쳐야 한다(352쪽).

2014년, 톰과 나는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슬럿 워크에 참가해, 강간에 반대한다고 쓴 현수막 아래에서 행진했다(4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