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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의 기록

eunyongyi 2019. 8. 17. 12:50


정연주 지음. 유리창 펴냄. 2011년 8월 10일 초판 1쇄.


김상만 사장은 연판장을 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고 한다. 연판장 내용은 읽어 보지도 않고, 연판장을 냈다는 자체에 분기탱천했다는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들이 대학에서 데모하던 만용을 신문사에까지 와서 부리다니, 당장 주동자를 찾아 엄벌에 처하라며 크게 화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21쪽).


“도대체 너희는 기본이 안 된 놈들이다. 징계를 받으러 사장 앞에 불려온 놈들이 복장이 그게 뭐냐.” 김상만 사장은 우리가 남방셔츠를 입고 들어온 데 정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한동안 그 문제로 고함을 질러 대더니 대학에서 데모하던 기분으로 회사에 다니느냐고, 그래서 사장한테 연판장을 써 대는 버르장머리 없는 짓을 하느냐고 야단쳤다. 그는 우리의 옷차림과 연판장을 제출한 행위에 화내고 고함쳤을 뿐, 정작 이 모든 일의 핵심인 동료 기자의 부당 해고 문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23쪽).


김상만 사장은 연판장 사건 이후 수습기자를 뽑지 않았다. 젊은 녀석들이 철없이 연판장이나 돌리고 사장에게 대든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서 1970년 12월에 입사한 우리 13기 동기생은 1975년 봄 대량 해고 사태가 있을 때까지 후배를 맞지 못하고 만년 막내로 남았다(24쪽).


‘1단 벽’은 여전히 높았다. 기사 자체를 죽이거나 핵심 사항을 누락하는 중간 간부들의 교묘한 방해도 계속됐다(32쪽).


1978년 10월 24일,······중략······<보도되지 않은 민주 인권 사건 일지>······중략······이 일지 사건으로 동아투위 열 명(안종필, 장윤환, 안성열, 이기중, 박종만, 성유보, 김종철, 홍종민, 정연주)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63, 64쪽). 


동아투위 열 명은 인생극장 같던 서울구치소에서 1979년 6월 초까지 있다가 1심 판결이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졌다. 네 명은 성동구치소로, 세 명은 영등포구치소로, 나머지 세 명은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9월에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됐다. 성동구치소에는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1980년 작고), 홍종민 총무(1986년 작고), 김종철 선배(전 연합뉴스 사장)와 내가 이감됐다(96쪽).


“정연주, 빨리 일어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침 7시가 조금 지난 시각, 박종만 선배(전 파이낸셜뉴스 편집국장)였다. “다들 잡혀가고 세상이 뒤집혔어. 빨리 튀어(128쪽)!”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신군부는 각 언론사 사회부장을 군 헬기에 태워 광주시 외곽의 계엄군 초소를 돌아보게 했다. 이들은 서울로 돌아와 ‘광주사태’를 전했다. 이 가운데 김대중 조선일보 사회부장(현 편집인)과 김진규 서울신문 사회부장은 본인들의 이름으로 ‘과격파 난동자들’과 ‘무법지대’에 대한 르포를 내보냈다(167쪽).


<씨알의 소리>는 문화공보부 신문과에서 원고를 사전에 모두 검열했으며, 거기서 허락이 나야 제작이 가능했다(204쪽).


당시 한겨레신문은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있었다. 영등포 공장 지대 한가운데 있는 허름한 2층 임대 사옥이었으나, 그곳에는 새 신문을 향한 동료들의 열정과 사명감이 용암처럼 솟구쳤다(227쪽).


1989년은 세계사가 큰 전환을 보였다. 그해 일어난 여러 가지 일에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른 시대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들이 곳곳에 있었다. 1월 7일에는 일본 제국주의 상징이던 히로히토 왕이 87세를 일기로 숨졌다. 3월 24일에는 중국 대학생 수만 명이 톈안먼에서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5월 중순에 이르자 시위대 숫자는 100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6월 4일 중국군의 발포로 시위 대학생 수천 명이 사망한 ‘톈안먼사태’가 발생했다(237쪽).


나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받고 넉 달 남짓 지난 1989년 10월에 진 라로크 해군 제독과 회견했다. 그는······중략······주한 미군의 존재는 분단을 영구화하는 통일의 장애물일 뿐이며, 더는 남한에 주둔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313쪽).


‘이명박’이라는 이름과 존재를 두드러지게 알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조금 가까이에서 접한 것은 1999년 워싱턴에서다. 1998년 말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1년 동안 조지워싱턴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머물렀으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왔다(318쪽).


나는 한국의 언론, 특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 언론의 반 언론적 작태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겪었다. 나는 지금과 같은 언론 구조와 토양이 바뀌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366쪽).


언론 망국론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군부독재 정권에 빌붙어 온갖 굴종과 왜곡으로 그 정권의 수명을 떠받쳐 온 수구 언론, 조폭의 왕초처럼 제왕적 권력을 누리면서 조폭적 행태를 일삼는 세습 수구 언론의 사주들, 이들 사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중간 보스들의 노예근성과 이들이 휘두르는 붓의 폭력성······중략······젊은 언론인들이여, 일어나 조폭적 사주들에게 저항하라(369쪽). 한겨레 2000년 10월 11일 자.


김병관 회장은 고려대 앞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사’했다는 CD에 담긴 ‘심장에 남는 사람’의 가사를 읊조리기도 하고, 그가 주사파라고 욕하던 농성 학생들과 함께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반 아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중략······그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동아일보 지면을 비판한 사내 공정보도위원회 간사인 여기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으며, 지난해 9월에는 낮술에 취해 동아일보 편집국을 방문한 드라마 <왕과 나>의 여주인공 채시라에게 “대왕대비 마마!”를 외쳤다고 한다(370쪽). 한겨레 2000년 10월 25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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