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현장 기록, 신문 노조 민주화 운동 20년

eunyongyi 2022. 8. 16. 23:12

새언론포럼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2009년 7월 15일 초판 1쇄. 2021년 10월 20일 초판 2쇄.

1988년 8월 3일 결성된 전북일보 노조의 경우에는 노조 결정 보고 대회에서 서정상 사장이 직접 축사를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23쪽).

외환위기의 도래가 임박했던 1997년 9월 23일, 한국일보 노조는 임금 동결 등으로 노조를 몰아붙이던 사측에 공세적인 역제안을 하게 된다. 4차 임금 교섭 전체 회의에서 증자를 통해 우리사주조합을 도입할 것을 공식 요구한 것이다. 한국 언론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이 같은 제의는 사측이 같은 달 10일 확대 실무 교섭에서 공식으로 임금 동결을 요청한 데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51쪽).

김영삼 정권 초기 정부는 노총-경총의 밀실 합의를 통해 낮은 임금 인상률을 강제 적용하는 등 지속적으로 임금과 단체협약상의 근로 조건 개선에 매우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 줬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신문전쟁’으로 불리는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들었다. 방송의 경우도 SBS의 등장에 따른 과도한 시청률 경쟁으로 노동조합의 자사 중심의 살아남기 싸움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여 줬다(76, 77쪽).

1988년 11월 출범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2000년 11월 ‘전국언론노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꾸며 산별 체제로 전환했다(78쪽).

기본급 1%를 내고 있는 조합원이 있고 총액 1%를 납부하는 조합원도 있다. 언론노조 규약대로 통일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의 노조가 된다. 이것은 기본이다(81쪽).

무조건 선배들이 술을 사는 지고한 전통 속에서도 수습기자들이 술을 살 때(머리 올릴 때)가 딱 세 번 있었다. 1단 기사를 처음 지면에 올린 날, 기명 기사(당시에는 박스 기사에만 기자 기명이 올라갔다) 올린 날, 면 톱 기사 올린 날 등 도합 세 번은 영광스럽게도 수습기자가 선배들에게 당당하게 술을 사는 날이었다(87쪽).

이런 와중에 중앙일보는 증면 경쟁의 걸림돌이 되는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 집요한 공작을 펴 나갔다. 1994년 9월 5일 차기 노조 위원장 출마 의사를 밝힌 김상도 조합원(국제경제부)을 해외 연수 발령 내는 한편 차장급의 노조 탈퇴를 종용, 노조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집요하게 차장급 조합원들의 노조 탈퇴를 강요, 1995년 1월 90명 가운데 80여 명의 탈퇴를 받아냄으로써 무한 경쟁을 끌어나가기 위한 사전 포석을 착실히 진행해 나갔다(100쪽).

중앙 일간지 노조와 연합통신노조 등 서울 지역 신문, 통신사 13개 노조는 1995년 10월 9일 ‘서울지역신문통신노조협의회(서신노협)’를 결성······중략······자사 이기주의를 뛰어넘은 서신노협의 출범은 5년 뒤인 2001년 2월 16일 전국신문통신노조협의회(신통노협)로 확대 개편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103, 104쪽).

그러나 신문 자본은 엉뚱한 방향으로 화살을 돌렸다. 1996년 7월 들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일요판 휴간에 들어가는 대신 월요판을 내기로 한 것이다(105쪽).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노동자들의 쟁의 금지령과 임금 동결령을 내리는 한편, 노동조합에 대해선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후 군사정권은 2개월여 만에 9명의 간부를 지명해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노동조합을 재조직하도록 지시했고, 이때 만들어진 조직이 산별노조와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었다. 한마디로 1960 ~ 1970년대 한국의 산별노조는 군사정권이 노동자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자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113쪽).

1994년 5월 방송사노조협의회(방노협)가 창립됐다(114쪽).

서울 지역 신문 통신사 노조는 방송 단일노조 추진에 자극받아 1995년 10월 서울지역신문통신노조협의회(15개 노조, 서신노협)를 발족시켰다(117쪽).

중앙과 지(본)부 조합비 배정 비율 또한 산별노조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중앙 배정 비율이 낮다. 외국 산별노조와 비교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 금속노조의 경우 60%, 보건의료노조의 50%가 중앙 배정이라는 걸 보면 언론노조의 그것이 얼마나 낮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130쪽).

(2006년 7월) 헌재는 오늘날의 기업에 대해 “더 이상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적 조직체”라고 밝혔다.······중략······이는 한국 사회에 횡행하는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식의 단순 논법을 뛰어넘는 것에 해당······중략······“신문사 1인 사주 체제에 대한 헌재의 엄중한 헌법적 경고”에 해당하는 것(147쪽).

(2003년 언론노조) 지역신문 지부들은 서울 변두리라는 ‘지방’을 폐기하고 동등한 ‘지역’으로 자신들의 주체성을 확립하며 ‘신문의 다양성’과 ‘지역신문의 공공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152쪽).

(2007년 11월) 때맞춰 한나라당 김양수 의원이 ‘사무국 설치’,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추천 단체 확대’, ‘(지역신문발전지원특별법의) 일반법 전환’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민노당 천영세 의원도 ‘사무국 설치’, ‘6년 연장’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160, 161쪽).

2008년 12월 26일부터 2009년 1월 7일까지 언론노조는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179쪽).

1987년 6월 18일 서울역 광장에서 부산·경남지역용 발송 차량에 실려 운송되는 경향신문 4만 3000여 부가 성난 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언론이기를 포기한, 권력에 굴종한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발단이 돼 기자협의회가 창립되고 이어 1988년 3월 18일 노조가 창립됐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9년 말 한화그룹의 경향신문 인수 논의 과정에서 초대 노조 간부 5명이 해고되는 사태가 터졌고 2대 노조는 이를 묵인했다. 이 때문에 경향노조는 언론노련으로부터 처음으로 제명당하는 오명을 썼다. 1년 만에 경향노조가 재건의 몸부림을 치면서 언론노련에 재가입하고 해직자들도 사후에 돌아왔지만 당시 일은 경향노조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202쪽).

1989년
3월 10일    민주언론실천특별공연 ‘저 평등의 땅에 평화의 바다에’ 개최(~12일, 문화체육관)
4월 12일    이영희 한겨레 논설 고문 연행
4월 15일    6공 정권 언론 탄압 규탄 및 민주 언론 실천 공동 투쟁대회(한겨레신문 편집국)
4월 18일    민주 언론 쟁취 전국언론노동자 결의대회

1990년
12월 26일    <민주언론 90> 발간

1997년
1월 6일    총파업 보고 감시 관련 서울 지역 단위노조 민실위 담당자 회의
1월 16일    신문·통신 노조 일일 파업 돌입(20개 사). 노동악법 철폐 및 민주 언론 쟁취를 위한 언론 노동자 결의대회(탑골공원)

2002년
2월 1일    언론노련 제18차·언론노조 제1차 정기 대의원대회(방송회관)

2003년
11월 7일    무료 신문 관련 토론회. 민실위·미디어 담당 기자 노동 보도 관련 토론회

2004년
1월 9일    신문통신노협 정기 회의. 올바른 총선 보도를 위한 언론노조 중집위, 민실위, 정치위원 합동 워크숍

2005년
8월 17일    X파일 관련 공대위 출범 및 ‘언론의 감시 역할과 공정 보도’를 위한 긴급 언론노조 민실위 토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