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1 ~ 5권
최명희 지음. 매안 펴냄. 2015년 8월 8일 2판 21쇄.
“그럼 ‘혼불’도 읽었겠네.”
“혼불요?”
“응, 최명희.”
“아니요. 본 적 없어요. 누군지, 어떤 소설인지도 모르겠네요.”
옛 — 그다지 되새기고 싶진 않은 ― 회사에서 함께 땀 흘렸던 한 선배가 얼마 전 술잔에 얹어 건넨 말과 내 대답. “학교 다닐 땐 대하소설을 많이 즐겼다”는 내 지나간 날을 두고 “그럼 ‘혼불’도” 마땅히 읽었을 만하다는데 나는 도무지 모를 작가요, 소설이라니. 음. 첫 쪽 연 까닭이 됐다.
5권. 이제야 반인데… 섣불리 이러쿵저러쿵하기도 어려운데… “어쩌나. 난 이미 ‘토지’에 여러 차례 묻혔다. 모두 두 번, 1부만 네댓 번.”
앞으로 어찌 흐를지 모르겠는데… “어쩌나. 난 이미 ‘혼불’이 지루하다.” 배울 것 많고 읽을거리 많은 건 잘 알겠는데… “어쩌나. 난 이미 ‘혼불’ 안 양반 놈들 하는 짓이 눈꼴시다.”
덧붙여 여럿.
강모는 안서방의 구부린 뒷등에 업혀서 시오리 바깥의 보통학교를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등은 충직하였다(1권 50쪽).
옹구네. “죽고 살고 엎어져서 논 매고 밭 매도 이년의 목구녁에는 보리죽이 닥상이고(마땅하고) 손톱 발톱 다 모지라지게 베를 짜도, 내 평생에 얻어 입는 것은 요 사발만헌 두루치 한 쪼각이여(1권 95, 96쪽).”
춘복. “제엔장헐 놈의 시상. 다 똑같은 사람으로 났는디, 쎄 빠지게 일어는 놈은 죽어라 일만 허고, 할랑할랑 부채 들고 대청마루에 책상다리 앉었는 양반은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눈만 멫 번 깜잭이먼 멫 천 석이니, 먼 놈의 시상이 이렁가아. 생각을 숫제 안해 부러야제, 생각만 쪼게 허먼 기양 속이 뒤집어징게……(1권 105쪽).”
강태. “토지란, 분명히, 하나의 사회적 환경이야. 그것은 사유재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인이 고루고루 같이 누리고 나누는, 만인의 공유여야만 해(1권 140쪽).” “있는 자는 없는 자를 경멸하고, 그러면서도 노동력을 착취한다. 반면에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증오하고, 그러면서도 생존을 위하여 노동력을 바친다. 이게 얼마나 야비하고 비굴한 상태냐. 이런 체제는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 무너뜨려야 한다(1권 141쪽).”
청암부인. “멀지 않은 전주에 완산팔경으로도 유명한 덕진(德津) 연당 삼만삼천이백여 평, 끝간 데 없이 연꽃이 핀, 넓으나 넓은 호수의 둘레 육천여 척, 그 연당 호반을 걸어서 돌게끔 일주 도로를 수축한 이도 있다더라(1권 148쪽).”
“여인네가 공명심이 저리 많아서(1권 151쪽).” “지맥을 건드려 공연한 동티가 나면 어쩔 것인가(1권 151쪽)?”
청암부인이 저수지 완성한 날. “생산의 근원이 여기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1권 156쪽).”
율촌댁. “예로부터 여자란 여필종부라, 남자를 하늘같이 알고, 남편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 도리야. 우선 남편에게 공손해야 한다. 여자가 죽어지내야 집안이 평안한 게야(1권 232쪽).”
춘복. “언지는 머 우리가 농사 지어 갖꼬 우리 입으로 들어왔간디요? 땅바닥에 어푸러져 주딩이서 단내가 풀풀 나고, 손톱 발톱이 모지라지는 놈 따로 있고, 청풍명월에 노래 부름서 손꾸락 한나도 까딱 안허고 받어묵는 놈 따로 있잉게. 우리사 머 왜놈 주딩이로 들으가나 지주 곳간으로 들으가나, 뼈 빠지게 헛고상 허능 거는 펭상 마찬가지라요(1권 249쪽).”
청암부인 신행 때. “사람이란 엄연히 상하가 있는 법이거늘, 너 이년,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로 누구한테 그런 막된 행실을 하는 게냐. 내, 네년을 단단히 가르칠 것이니 그리 알아라(1권 266쪽).”
청암부인이 인월댁에게. “한꺼번에 다 살려고 하지 말게나. 두고두고 살아도 꾸리로 남는 것이 설움인데, 원수 갚듯이, 그렇게 단숨에 갚아 버릴 생각일랑 허지 말어……. 그런다고 갚아지는 것도 아니니(2권 39쪽).”
근자에는 같은 자식일지라도 남녀를 엄히 구분하여 출가하는 여식을 남 된다, 치부해 버리는 것이 시속으로 퍼져 있으나, 거슬러 선대로 올라가 선조 임금 때까지만 하여도, 부모의 재산을 상속하여 문서로 남길 때, 출가한 딸이라 하여 조금도 차별하지 않았으니, 시속이 변했다뿐이지 근본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2권 70쪽).
효원. “아무리 종이라도 신분이 낮아 천한 대접을 받을 뿐, 사지에 오장육부는 똑같이 타고 났고, 그 속에 마음이 잇는 것은 양반이나 무에 다르겠습니까(2권 76쪽).”
오류골댁. “염라대왕이 수쳇구멍에 웅크리고 있다(2권 132쪽).”
강모.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을. 허망이란 이다지도 무거인 거이었던가. 내가 무엇을 얻겠다고 이런 일을 하고 말았을까(2권 151쪽).’
강모. ‘나는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나에게 바라는 바는, 백 가지 천 가지가 넘는다. 이 무슨 고달픈 운명인가(2권 179쪽).’
“노인의 병환은 해동할 때 위험하지 않소? 각별히 유념하시구려(2권 208쪽).”
효원. ‘뜻한 것이 이루어지고 재미있고 좋아서만 사는 것이랴. 고비고비 이렇게 산 넘거 물 건너며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2권 223쪽).’
춘복. “그저 내 몸뗑이 달린 것 갖꼬 헐 수 있는 것은 말배끼 더 있나고요. 내가 속 터져 죽는 꼴을 보시는 것보담 말이라도 퍼내고, 이렇게 사는 거이 안 낫겄소(2권 278쪽)?”
강실이의 부채끝에 물큰 땀냄새가 묻어난다. 뭉근한 오류골댁의 머릿내 같기도 하다. 오래 쓴 대소쿠리나 바가지에서 묵은 나무 냄새가 번지듯 오류골댁한테서는 낯익은 체취가 번져났다(2권 287쪽).
장리(長利).……중략……빌린 돈이나 곡식의 십분지 오의 변리(邊利)를 덧붙여 갚아야 한다(3권 9쪽).
춘복 마음속. ‘나라고 언지끄정 상놈으로만 살겄냐.……중략……이 육시랄 노무 상놈 꺼죽 훨훨 벗어 내부리고, 사램이 사는 것맹이로 살고 자펐다(3권 20쪽).’
강태. “오래오래 비루한 행복에 빌붙어 사느니 피가 우는 대로 살아 볼 생각이다(3권 64쪽).”
강모가 다가정(多佳町)의 골목 어귀까지 왔을 때는 이미 골목이나 지붕이나 동네까지도 소복한 흰 눈을 머리 위에 덮고 있었다(3권 69쪽).
인월댁. “그냥 이생에서 갚을 것 있으면 이 몸으로 다 갚어 버리고, 아무 인연도 짓지 말고, 원망도 남겨 두지 말고, 그저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소원입니다(3권 90쪽).”
“종 아무개가 비부를 얻어 새끼를 낳으면 그 첫배는 너에게 준다(3권 147쪽).” ‘새끼’라니. 사람을 개돼지로 여긴 것들.
청암부인. “절 한 자리 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친정, 외가, 진외가까지 다 보인다(3권 152쪽).”
이병의. 첫아들 기채를 두고 “이 아이는 형님 자식이오(3권 185쪽).” 큰집에 아들 없다고 작은집 아이를 데려다 길러 핏줄 이은 집 많은 한국.
장바닥이란 원래 선비가 나설 곳이 아닌데다가, 반상이 마구 뒤섞이어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는 광경은 더구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3권 239쪽).
넓은 갓 쓰고 두루마기 떨쳐입은 양반이 상것들하고 나란히 앉아 한자리에 가야 하는 철갑차는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았다(3권 239쪽).
“내외간의 정이란 것이 열 살 줄에는 몰라서 살고, 스물 줄에는 좋아서 살고 서른 줄에는 정신없이 살고, 마흔 줄에는 못 버려 살고, 쉰 줄에는 서로 가여워 살고, 예순 줄에는 등 긁어 줄 사람이 필요해 산다(3권 289쪽).”
관기는 비록 그 모습이 해당화같이 아름다워도 한낱 창기(娼妓)로, 해당 주읍(州邑)에 객(客)이 올 때마다 객고를 풀라고 내주어 간(奸)하게 하였다(4권 26쪽).
흥부 아내. “나는 열 끼 곧 굶어도 시앗 꼴은 못 보겄다. 나는 지금 당장 나가니 양귀비랑 물고 뜯고 천년 만년 잘 살어라(4권 97쪽).”
“나 원, 시상이 달러졌다, 달러졌다, 허드라만 그거이 다 말뿐이제 실상 달러징 거이 있능가? 그대로제(4권 107쪽).”
임서방. “별? 우리는 똥이여. 별똥(4권 150쪽).”
기표. 춘복을 두고 “기골 장대헌 놈이 저 날 데 가서 못 나고 울분 많은 데 가서 나 놓으면 반골‧역신 되는 것은 천하에 정한 이치지(4권 178쪽).”
옹구네. “지랄허고 자빠졌제. 호강에 겨우먼 무신 짓을 못히여? 내우법 좋아허네. 쥐도 새도 모르게 넘 못헐 짓은 즈그들이 더 험서나. 그렁게 눈 개리고 아웅이여, 다(4권 181쪽).”
이헌의. “이 정신의 세계는 무형한 가운데 있어 놔서 보이지는 않지만, 물질이 끝난 다음에도 끝도 갓도 없이 끈을 달고 나가는 것 아닌가(4권 256쪽).” 아니, 물질이 끝나면 그냥 끝나는 거야.
옛날 요 임금 “무덤은 구덩이에 흙을 덮기만 했지 봉분조차 없었소. 그렇게 장사를 다 지낸 다음에는 지나가는 소와 말도 그 위를 밟고 다녔다 헙니다(4권 284쪽).” 순 임금이 죽었을 때에도 저잣거리에 “장사를 다 지낸 다음에는 시장에 와글거리는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녔(4권 284쪽)”다.
양식으로 캐는 쑥이야 처참하고 한심한 한숨에 가슴이 미어질 뿐, 어디 그런 정감이 스며들 여지가 있으리오. 그저 잠시라도 손을 놀리지 않고 그것을 캐고 또 캘 따름이었다(5권 118쪽).
춘복. “달 봤다아아(5권 172쪽).”
춘복 생각. ‘사람 사는 시상에 사램이 사람끼리 이렇게 서로 틀리게 살어야니, 이게 무신 옳은 시상이냐. 뒤집어야제(5권 177쪽).’
조씨부인. 새색시에게 “우리가 한 남자에 둘이 의지허고 같이 삼서, 무신 언짢은 일이 있드라도 서로 다 이해를 허고, 애껴 주고, 평생 죽을 때끄장 다정허게 잘 살기로 맹세를 헙시다(5권 209쪽).”
그러니까 그 곡식이 마당 쓴 값이라고나 할까(5권 243쪽).
“낯바닥은 사람마동 다 똑같은디잉, 뻭다구가 머이 달릉가아?” “긍게 말이다. 우리는 잘 몰라도 머이 달라도 달르기는 달릉갑제. 껍데기 활랑 벳게 보든 안했잉게 그 속은 알 수가 없지마는(5권 275쪽).” 속 들여다봐야 별다른 것 없다. 똑같다.
혼서지. ‘대개는 혼인 당사자인 신랑이 직접 글씨를 썼으니(5권 324쪽)’… 기억난다. 그랬다. 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