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 피난

2011.02.11. 08:52 ㅡ 친구

eunyongyi 2020. 6. 28. 22:15

[내 노오란 취재수첩] 그곳에 친구가 있었다네

 

그곳 문턱을 넘어서면 늘 귓가에 음악이 맴돌았다. 가끔 클래식이 흐를 때가 있기도 했지만, 영국이나 미국 대중음악(팝송)이 더 많이 들렸다. 나는 2층과 3층으로 난 계단을 연거푸 오르며 그곳 안쪽을 넌지시 둘러보고는 했다. 안쪽은 헤드폰을 쓴 채 새로 나온 음악을 들어보는 이, 구매할 콤팩트디스크(CD) 음반을 고르는 이로 늘 흥청거렸다. 말 그대로 언제나 음악에 흥청댄 그곳은 ‘타워 레코드(TOWER RECORDS) 서울 강남점’이었다.
노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쓴 ‘타워 레코드’ 간판이 서울에 처음 내걸린 것은 1995년 6월. 강남역 네거리에서 한남대교 쪽으로 조금 걷다가 만나는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띄는 데다 3층짜리 매장의 넓이가 자그마치 450평(약 1488㎡)에 달해 곧 젊은이의 방앗간이 됐다.
실제 ‘타워 레코드 서울 강남점’은 당시 십 대 후반에서 이삼십 대 젊은이가 강남역 부근에서 가장 쉽게 선택한 약속 장소였다. 먼저 ‘타워 레코드’ 앞에서 만난 뒤 영화관을 찾거나 커피숍으로 옮겨갔다. 매장이 넓어 주인장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친구를 기다릴 수 있었으니 약속 장소로는 가히 최적이었다.
‘타워 레코드 서울 강남점’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음반 가격이 경쟁 점포보다 평균 10%~20%가 비쌌음에도 매출이 등등했다. 주변 음반 소매점이 출혈에 가깝게 판매가격을 내리는 등 버티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1990년대 한국 음반 소매·유통시장의 약 30%를 지배했던 신나라레코드조차 ‘타워 레코드 서울 강남점’의 아성을 넘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 음반 소매시장은 2~3년에 걸친 불황 끝에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한파까지 뒤집어쓴 상황이었는데 ‘타워 레코드 서울 강남점’은 매출이 줄어들 줄 몰랐다. 월 평균 매출 4억~6억 원을 꾸준히 유지하며 그야말로 ‘따로 놀았다.’
1997년은 EMI, 소니뮤직, BMG, 워너뮤직, 유니버설뮤직 등 다국적 음반회사들이 한국 소비자에게 직접 제품(음반)을 배급한지 8년째였다. 이에 앞서 한국에 이들의 직배 체계가 안정화한 무렵인 1995년 6월, 영국계 다국적 음반 소매점인 ‘타워 레코드’가 시장을 덮치면서 본토박이 음반 유통기업들이 크게 흔들렸다. 이 때문에 1996년 4월 1일부터 음반·비디오·영화를 취재했던 나도 한국 음반시장과는 ‘따로 놀던 타워 레코드’를 방앗간으로 삼았다.
그곳 2층을 지나 3층에 오른 뒤 흡사 다락 같은 곳으로 난 계단을 다시 올랐다. 어두컴컴한 나머지 피시(PC) 화면의 불빛이 먼저 눈을 파고드는 공간. 책상 네댓 개를 올망졸망 잇대어 놓은 곳. ‘타워레코드 서울 강남점’의 심장, 직원 사무실이었다. 어두웠으되 방앗간으로 삼았던 덕에 나는 그 컴컴함을 포근하게 느꼈다.
그 다락처럼 어두컴컴한 곳이 포근했던 이유 하나 더. 그곳에 친구가 있었다!
내 친구, 그는 음악을 사랑했다. 1994년 말 ‘타워 레코드’를 한국에 유인한 중견 물류기업에 입사해 첫 월급을 타더니 성능 좋은 오디오 앰프(amplifier)와 스피커 등속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돈이 없어 라면을 끓여먹거나 프라이팬에 구워먹는 삼겹살 1인분에 만족하면서 앰프와 스피커 등속을 거의 머리에 이고 사는 듯했다. 날이 지날수록 기타(guitar)도 더 좋은 것으로 바뀌었고.
그는 기어이 ‘타워 레코드 서울 강남점’으로 갔다. ‘타워 레코드’를 한국에 끌어들인 중견 기업의 전도유망한 기획실에서 나와 스스로 한직(주변에서 그렇게 여겼다)에 찾아간 것이다. 1995년 6월 ‘타워 레코드’가 한국에 상륙할 무렵이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친구는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기획실은 답답해. 몸이 힘들어도 음악 들으면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내 친구, 그는 ‘타워 레코드 서울 강남점’의 부점장이 됐다. 개점 준비로 며칠 밤을 새며 일했음에도 행복했다.
“매장에 ‘스눕 도기 독(Snoop Doggy Dog)’ 진열한 거 봤어?”
그곳 문턱을 또 넘어선 1997년 1월 어느 날, 그가 내게 물었다.
“음반이 산더미로 쌓였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보냐. 근데 왜?”
나는 관심 없어 시들한 듯 대답했으되 그가 실없이 말하는 법이 없기에 “왜?”를 곧바로 잇댔다.
“아니, 좀 이상해서……. 스눕 도기 독이 갱스터 랩(gangsta rap)을 하는데 제법 유명하거든, 그런데 이 친구 앨범(음반)이 원본 그대로 한국에 나온 거야.”
“그게 뭐 어때서? 원본 그대로 한국에 나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게…,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음반 수입추천 심의를 통과시켜줄 리가 없을 것 같으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한국 가요 가사에 욕 담을 수 없고, 마약을 하라고 할 수 없잖아. 근데 그 내용이 그대로 담겨 발매됐더라.”
기사였다! 부랴부랴 살폈더니 한국에 발매된 스눕 도기 독의 1993년 데뷔 앨범 ‘도기스타일(Doggystyle)’과 1997년 작 ‘더 도그파더(The Doggfather)’ 내 여러 곡의 가사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당시 한국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수입추천 심의기준이 그랬다. 가사에 마약을 복용할 것을 부추기거나 ‘나는 (갱단으로서) 본때를 보이려 총을 쏘고는 했다’는 가사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했을 리가 없었다. 심의를 통과했어도 문제, 통과하지 않은 채 음반이 시장에 나왔어도 문제였다.
유니버설뮤직코리아에 열쇠가 있었다. 다국적 음반사 가운데 하나로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노력 끝에 ‘갱스터 랩’에까지 손이 닿았던 것. 특히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본디 가사와 다른 ‘심의용 가사’를 제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나는 전자신문 1997년 1월 21일자 음반(문화) 관련 지면의 머리기사로 ‘국내서도 갱스터 랩 음반(을) 발매’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스눕 도기 독의 ‘도기스타일’과 ‘더 도그파더’에 초점을 맞췄다. 두 음반이 무엇인지,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를 내세워 독자 시선을 끌려했다. 이어 갱스터 랩의 큰 줄기가 흑인을 멸시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길거리 하층문화의 대변자로 평가받는다는 점, 때로는 핍박 받는 흑인의 단결을 촉구하거나 직접 대항하기도 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마약 복용과 폭력을 부추겨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도 전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갱스터 랩이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는데 두 음반이 발매”돼 화제라고 보도했다. 또 당시 공연윤리위원회가 과도한 심의로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침해한다”는 논란의 중심에 섰던 터라 ‘자유로운 문화 향유 보장 대(對) 문화적 충격으로부터 국민 보호’ 논쟁이 재연할 개연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사에 살이 많이 붙었으되 ‘두 음반이 심의를 통과할 만한 것’인지를 묻는 게 핵심이었다.
기사가 게재된 이튿날(1997년 1월 22일) 공연윤리위원회가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쪽에 ‘도기스타일’과 ‘더 도그파더’의 수입추천증을 회수하고, 판매금지조치를 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유니버설뮤직코리아는 ‘타워 레코드’를 비롯한 전국 주요 음반 소매점에 두 음반의 판매를 보류해달라고 요청한 뒤 자체 수거에 나섰다. 유니버설뮤직코리아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본디 가사와 다른 것을 제출한 게 컸다. 판매금지조치에까지 이른 이유였다. 이후 닥터 드레, 투팍 샤커, 아이스 큐브, 비스터 보이스 등 한국에 들어오려던 유명 갱스터 랩 가수의 음반에도 제동이 걸렸다.
“솔직히 말해 이 기자께서 갱스터 랩 가사를 알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평소 흑인 랩을 즐겨 듣나요?”
유니버설뮤직코리아에서 마케팅을 맡았던 이의 질문이다.
그때 나의 대답은 “아, 그게…, 그러니까…….” 지금 나의 대답은 “그곳에 친구가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