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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eunyongyi 2020. 7. 4. 23:46

최윤아 지음. 마음의숲 펴냄. 2018년 3월 7일 1판 1쇄.

 

패배자로 남기 싫었다. 인생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지만, 각자의 방향과 속도가 있을 뿐이라지만, 퇴사가 패배자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진해서 멈췄지만, 어쨌든 다 같이 달리다 혼자만 멈춘 건 사실이니까. 그런 나를 혹여나 동정할까 봐 행복과 여유를 과장했다(43쪽).

 

완벽한 살림을 담은 SNS 사진, 잡지, TV프로그램을 미국에서는 ‘도메스틱 포르노(Domestic Pornography)’라고 한다는 사실(45쪽).

 

회사를 그만둘 땐 플랜B가 있다는 게 다행처럼 느껴졌다. 일 외엔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겉으론 양성평등을 그렇게 외쳐 놓곤, 속으론 ‘여자라서, 결혼해서 다행’이라고 안심했다. 참 일관성 없지만 솔직히 그랬다(103쪽).

 

전업주부가 되고부터 남편은 집안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청소와 빨래, 요리까지 도맡던 살림꾼이 밥숟가락 놓자마자 서재로 들어가 버리고, 자기가 마신 맥주 캔 하나도 치우지 않는 전형적인 가부장이 되기까지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그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른 전환이 때로 얄밉게 느껴졌다(141쪽).

 

나 같은 여자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있었다. 아니 단순한 존재를 넘어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국에선 ‘신종 아내’로, 일본에선 ‘새로운 형태의 전업주부’로 불렸다. 이름은 다르지만 신종 아내나 새로운 전업주부나 기를 쓰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경쟁에 질려 자발적으로 집으로 유턴한 여성을 말한다(147쪽). 

 

시대가 바뀌었다며 누군가는 전업주부란 단어에서 ‘여유’를 떠올리겠지만 내가 살아 본 시간은 여전히 ‘희생’에 더 가까웠다. 하루 이틀 사이로 영원히 초기화되는 가사 노동은 자꾸만 ‘의미’를 묻게 했다(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