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특별취재팀 지음. 다인아트 펴냄. 2009년 1월 26일 초판 1쇄.
1992년 김(찬삼) 교수는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67세 때였다(68쪽).
<대중일보>는 기사 말미에 (유두희) 선생의 약력을 적고 있는데 ▴동경에서 고학 ▴19세 때부터 소년운동 지도, 한용청년회·제물포청년회 등을 결성해 청년운동에 열성 ▴1925년 이래로 인천 무산청년동맹을 비롯 각 지방 청년회를 결성 지도,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조직, 그리고 인천 최초의 공산당 및 공산 청년동맹원으로 지하운동에 심혈을 경주 ▴중외일보 기자와 무산자신문 지사장 등으로 언론지도 ▴조선 노동동맹, 경기도 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5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피검돼 8년간의 옥중 생활에 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출감 후 계속 활동 등이다(112쪽).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가 트럭 2대를 갖고 초기 사업을 시작할 때 경영에 애로가 있으면 조병화 시인이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부인에게 부탁해 조 회장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것이다. 이게 인연이 돼 조 회장의 부인과 조병화 시인의 부인인 김준 원장이 가까워졌다고 한다(181쪽).
장발은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이어 미술대학 학장에 임명된다.······중략······학장 재임 기간 중 대한미술협회에서 한국미술작가협회를 분리시켜 리더로 활동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가 보수적이고 독선적이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당시 작가로 활동하려면 ‘국전'에서 입상해야 하는데 그의 고교 스승인 윤호중(당시 홍대 미술학부장)이 이끄는 대한미술협회가 이를 주도함으로써 홍익대 출신들과 대립했던 것이다. 이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거론되는 ‘서울대파 대 홍대파'라는 파벌의식을 낳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1956년 대한미협의 국전 보이콧 사건이 터지면서 미술계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됐다(255, 256쪽).
지금도 (제물포고) 학생들은 시험 시작 전에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는 선언을 하고 무감독 시험을 치른다(323쪽).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교원 정년이 65세에서 5년이 단축돼(324쪽).
(창영초교) 어린이 신문은 한국전쟁이 끝난 해인 1953년 10월 창간됐다. 지금의 대학신문과 같은 게 54년 전에 초등학교에서 발간된 것이다. 이 신문은 국내 최초의 교내 어린이 신문으로 기록됐다. 주간으로 4면가량이 발행됐던 이 신문은 어린이 기자들이 학교 안팎을 돌며 직접 취재하고 편집했다. 조판과 인쇄는 교내 인쇄소에서 맡았다. 인쇄소까지 뒀던 것이다. 이 신문은 매주 월요일 아침 일찍 아이들 책상 위에 배달되었다(329쪽).
(이종윤) 선생의 손자이자 이벽 선생의 차남인 훈기 씨도 조부와 선친을 이어 언론계에 투신했다(489쪽).
당시 유신정권의 지역 언론 말살 정책에 따라 1973년 7월 31일 인천 올림포스호텔에서는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을 통폐합한 <경기신문(현 경인일보)>을 9월 1일부터 발행한다는 조인식이 치러졌다(498쪽).
<경기매일신문>이 야성 신문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기자들에게 편집권을 보장해 줬기 때문이다. 김형희 전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은 “내가 사회부장으로 있을 당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힘이 막강한 군 장성의 비리를 캔 적이 있다"며 “회사에서 더 이상 기사를 쓰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회장(송수안)님은 ‘기사 작성은 잘 하고 있느냐'는 격려와 ‘결코 불의를 용납하거나 용서하지 말라'고 조언하셨다. 여느 신문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편집권 독립이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5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