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 피난

2014.07.03. 09:00 ㅡ 투명사회

eunyongyi 2020. 6. 26. 16:25

[책]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년 3월.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으로 전락하고 만다(20쪽).
오직 긍정적인 것 사이에서 뛰어다니는 자는 정신이 없다. 정신은 느리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며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21쪽).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양식은 ‘좋아요’이다.……중략……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26쪽).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27쪽).
숨겨져 있는 것, 접근 불가능한 것, 비밀스러운 것과 같은 부정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과도한 가시성은 외설적이다. 다름의 부정성이 전혀 없는 과다 커뮤니케이션의 매끄러운 흐름 역시 외설적이다. 모든 것을 커뮤니케이션과 가시성의 영역에 내던지는 강압적 힘은 외설적이다. 포르노적 구경거리로 내놓은 육체와 영혼은 외설적이다(34쪽).
자신의 본래 얼굴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중략……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게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35쪽).
오늘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 호감을 자아내는 미디어의 이미지들에는 어떤 푼크툼도, 어떤 기호적 강렬함도 없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못한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좋아요’라는 코멘트의 대상일 뿐이다(59쪽).
길은 볼거리가 아니다. 관광객은 길의 풍부한 의미와 서사성을 알지 못한다. 길은 서사적 서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텅 빈 통로로 전락한다. 이 같은 의미론적 궁핍화, 공간적-시간적 서사성의 결핍은 외설적이다(68쪽).
투명한 공간은 의미의 빈곤에 빠진다. 의미는 문턱과 다리를 통해서, 즉 저항을 통해서 비로소 생겨난다(68쪽).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음 방증한다. (이야기가 사라졌다.) 기억 또한 그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 구별된다. 기억의 자취는 그 역사성 때문에 늘 재정리되고 수정되는 과정 속에 놓인다. 이와 반대로 저장된 데이터는 늘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기억은 긍정화되어 쓰레기와 데이터의 더미로, ‘고물가게’로, 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다량의 온갖 이미지와 닳아빠진 상징들이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꽉 차 있는 창고’로 전락한다. 고물가게의 사물들은 차곡차곡 정돈되지 않고, 그저 나란히 널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가 없다. 고물가게는 기억도 망각도 하지 못한다(69쪽).
친밀성의 문화는 내밀한 감정과 체험의 대상이 아닌 객관적, 공적 세계의 붕괴와 함께 나타난다. 친밀성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는 개개인의 내적, 심리적 욕구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참되고 신뢰할 만하며 진정한 것이 된다. 친밀성은 심리학적으로 표현된 투명성의 공식이다.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즉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73쪽).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74쪽).
공론의 상실 뒤에 남은 빈자리 속으로 내밀한 것, 사적인 것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공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사적 개인의 공개다. 이로써 공론의 장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동의 행위를 위한 공간이라는 본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간다(74쪽).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76쪽).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주지 못한다(86쪽).
디지털 투명성은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든다. 그것의 목표는 마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게 아니라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주목도룰 최고로 높이는 것이다. 완전한 조명은 최대한의 착취를 약속한다(92쪽).
투명사회는 정확히 성과사회의 논리를 따른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제하고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 구조에서 해방됐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경영자다. 하지만 지배 기구의 소멸이 진정한 자유, 실제로 강제가 없는 상태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인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에 타자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만들어 낸 자유로운 강제에 예속된다. 이러한 자유의 변증법은 통제사회의 바탕이기도 하다. 자기 조명은 자유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타자 조명보다 더 효울적이다(99쪽).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만든다. 눈 자체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미지에 대한 포르노적 강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사적 영역은 완전히 철폐되고 만다(117쪽).
(카를 슈미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말했고, 2차 세계대전 뒤엔 “주권자란 공간의 파동에 대한 처분 권한을 가진 자(122쪽)”라고 말했다.
(한병철은 이를 바탕으로 삼아) “디지털 혁명 이후 우리는 슈미트의 주권 명제를 다시 한번 고쳐 쓰게 될 것”이라며 “주권자란 인터넷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라고 풀었다(123쪽).
전반적인 산만함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사회는 분노의 서사적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한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분노는 미래를 만들어 낸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126쪽).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 정신이 없다는 점에서 이미 군중과 다르다. 영혼은 모여들고 통합되는 성질이 있다. 반면 디지털 무리는 고립된 여러 개인으로 이루어진다.……중략……디지털 무리에서는 군중의 영혼, 군중의 정신 같은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리 속에 모여든 여러 개인은 우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중략……디지털 무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악플도 하나의 목소리를 아니다. 그 때문에 악플은 소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129쪽).
라디오와 같은 전자 매체가 사람들을 집결시킨다면, 디지털 매체는 사람들을 따로 떼어 놓는다(131쪽).
제국에서는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다. 제국은 모두를 뒤덮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 것이다(134쪽).
사회 전 영역에서 함께하는 태도, 공동체적인 정신이 무너져 간다. 연대 의식은 희귀해진다. 사유화 과정은 영혼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공동체적 정신의 침식으로 인해 공동의 행위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진다(134쪽).
커뮤니케이션의 탈매개화로 인해 한때 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 “여론 형성자”, 심지어 여론의 사제로까지 여겨져 온 기자는 이제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취급될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매체는 모든 종류의 사제 계급을 몰락시킨다(138쪽).
점증하는 탈매개의 압력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몰리고 있다. 정치적 대표자들은 중간 전달자가 아니라 장벽으로 간주된다(138쪽).
(벨라 안드레) “난 독자가 원하는 책을 바로 쓸 수 있습니다. 나는 곧 나의 독자인 셈이죠(139쪽).”
“정치적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져 간다(140쪽).”
피터 한트게에게 글쓰기는 고독한 탐험이며, 미지의 것,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141쪽). 이런 면에서 글쓰기는 행동과 같고,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사유와도 같은 것이다(142쪽).
(미쉘 뷔토르는)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 냅니다(143쪽).”
디지털의 긍정성은 동일한 것을 이어갈 뿐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아니 모든 디지털적인 것으로 인해 부정성을 대하는 능력이 약화되어 간다(146, 147쪽).
스카이프에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게 불가능하다.……중략……스카이프 덕택에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148쪽).
디지털 매체는 아날로그 매체보다 실재에서 더 멀어진다. 디지털과 실재 사이에는 유사성이 줄어든다(155쪽).
“손 없이 손가락질만 하는 미래의 인간”, 즉 호모 디기탈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손의 위축증”으로 인해 인간은 행동 능력을 상실한다.……중략……오늘의 긍정 사회는 모든 저항적 형식을 회피하며, 이로써 행동을 소멸시킨다. 이 사회 속에는 그저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만 있다(161쪽).
오늘날 우리에겐 일의 시간 외에 다른 시간은 없다. 우리는 휴가 때뿐만 아니라 잠 속에까지 일의 시간을 들고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도무지 편히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성과주체들은 마치 피가 안 통해서 꼼짝 못하게 된 다리처럼 그렇게 잠이 든다. 긴장 이완 또한 노동력의 재충전을 위한 것이기에 노동의 한 양태일 뿐이다. 휴양은 노동의 타자가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다(162쪽).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추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됐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163쪽).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중략……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164쪽).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중략……애착과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게 셀 수 있게 가공된다. 그래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165쪽).
진리는 정보와는 반대로 더미를 이루지 않는다. 진리는 자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더기 진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무더기 정보는 있다. 부정성이 없는 경우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 현상이 일어난다. 정보는 이러한 긍정성으로 인해 지식과도 구별된다. 지식 역시 그냥 바깥에 보이도록 놓여 있지 않다. 지식은 정보처럼 밖에서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오랜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적 측면에서 지식은 매우 짧고 단기적인 정보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또한 정보가 명시적이라면, 지식은 종종 함축적 형태를 취한다(171쪽).
정보사냥꾼은 조급하며 삼갈 줄 모른다. 그는 “기다리기”보다 노리고 있다(174쪽).
(구글 글래스는) 존재를 정보와 완전히 합일시킴으로써 정보사회를 완성한다. 정보가 아닌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중략……인간은 이제 클릭할(Klick) 때뿐만 아니라 눈길을 던질(Blick) 때에도 매번 먹이를 획득한다(175쪽).
사물을 착취하지 않고 그에 머물러 있는 오랜 시선에서 깊은 행복이 나오는 것이다(175쪽).
디지털은 가까움과 멂을 제거하고 무거리의 상태를 만든다. 거리의 단순한 제거를 의미하는 무거리성은 긍정적 특성이다. 무거리성에는 가까움을 두드러지게 하는 부정성이 없다. 가까움 속에는 멂이 새겨져 있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멂의 가까움의 고통’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186쪽).
금융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고속 거래는 결국 유령과의 거래, 또는 유령 사이의 거래다. 서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알고리듬과 기계들이다. 이처럼 유령 같은 거래와 커뮤니케이션 형식은, 카프카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인간의 힘을 벗어나’버린다(193쪽).
정보피로증후군(IFS: Information Fatigue Syndrome)은 정보의 과다에서 오는 심리 질환이다. 환자들은 분석적 능력의 저하, 주의산만증, 전반적인 불안감,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1996년에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 개념을 만들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IFS는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질병이었다. 오늘날은 모두가 IFS의 희생자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늘어나는 정보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196~197쪽).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해체되어 버렸다. 공중이 사라져 가고, 자기중심주의와 나르시시즘의 경향만 더 강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어떤 정치, 어떤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선거, 선거운동, 의회, 이념, 조합원 집회,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스마트 정치, 선거용지를 ‘좋아요’ 버튼으로 대체할 디지털 민주주의가 필요할 것인가(203쪽)?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잇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서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211쪽).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열심히 소통한다. 공간적 고립과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 아니라 네트워크화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이 전면적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211~212쪽).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모두가 모두를 관찰하고 감시한다. 국가의 첩보 기관만 우리를 엿보는 게 아니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도 마치 첩보 기관처럼 작동한다. 이들 기업은 우리의 삶을 훤히 비춰 거기서 캐낸 정보로 수익을 올린다. 회사는 직원들을 염탐한다. 은행은 잠재적인 대출 고객들을 들여다본다(213쪽).
RFID 칩은 사물 자체를 스스로 정보를 보내고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능동적인 행위자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사물 인터넷을 통해 통제사회는 궁극적 완성에 이른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우리를 관찰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물들에게도 감시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것들은 쉬지 않고 우리의 행동에 대한 정보를 발송한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을 작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215쪽).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쓸모없어진다. 빅데이터에서 대중의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디지털 심리정치는 출발한다(220쪽).
디지털 심리정치는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담긴 무의식적 논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대중의 행동을 지배한다. 집단적 무의식을 파악해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예측까지 가능하게 된 디지털 감시사회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발전시킨다(221쪽).
(역자 해제.)
정보가 전부인 시대에 사람들은 정보를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둘 중의 한 가지 가능성만을 알 뿐이다. 삶의 의미가 어떤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한병철이 지적하듯이 다시 불투명성을 전제한다. 빅데이터는 이론과 함께 믿음도, 의미도 파괴한다(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