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석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2020년 6월 25일 초판 1쇄.
플랫폼 알고리즘 기계는 이용자 활동을 분석해 그들을 유형화하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예측해 추천하면서, 각자가 좋아하는 것의 경계 밖 이질적이고 낯설고 타자화된 문화들에 대한 관찰 자체를 각자의 시야에서 아예 처음부터 자동 배제할 공산이 커졌다. 다시 말해, 빅데이터 기술 문화는 이미 존재하는 문화적 선호와 편견을 더 단단히 만드는 반면,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대중의 접촉면을 현저히 낮춘다는 점에서 대단히 문화 보수적이다(36쪽).
겉보기에 플랫폼은 자원의 공유와 교환의 분산성과 평등성을 띠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플랫폼 이윤의 집중과 독점화가 진행되면서 모순이 응집된다. 즉 플랫폼 중개인이 수수료 등 이익을 과도하게 취하는 반면, 노동 과정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은 전혀 플랫폼에 대한 경영 접근권이나 노동 결사권(結社權), 수익의 배분과 관련한 최소 수준의 의사결정권조차 없다(67쪽).
문제는 우리 사회의 흔한 기술 신화이기도 한데, 닷컴기업들이 기술혁신을 사회 혁신과 자주 혼동하는 데 있다. 플랫폼 기술이 주는 효율의 논리가 사회발전으로 이어지는 양 오인하면서, 그들 스스로 사회 개혁과 혁신의 기수로 착각하는 경우가 흔하다(72쪽).
자본주의는 늘 신기술 욕망에 굶주려 왔다. 기술혁신은 자본주의 성장을 유지하는 원천이었다. 생산공정에 자동화 기계를 도입하는 일은 단위시간 내 노동 생산력을 끌어올리는 효과만 거두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건의 불안정성도 광범위하게 이끌었다. 전문 기술노동직의 기계 대체 효과······중략······기업가의 조직 통제력 확대······중략······노동 강도 증대와 상대적 잉여 가치 확보 등 기술혁신은 늘 노동의 성격과 형식을 재규정해 왔다(94쪽).
오늘날 플랫폼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인간 일상의 데이터 활동을 자본주의의 노동으로 형질 전환하고 있다(95, 96쪽).
알고리즘 경영은 플랫폼 자동화와 지능화에 기대어 주로 인간의 활동과 노동시간을 파편화하고 노동 과정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추가 비용과 위험도를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자연스레 전가한다(98쪽).
1930년경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인류의 기술혁신으로 인해 그로부터 꼭 100년 후인 2030년이 되면 큰 체제 전환 없이도 주당 15시간만 일하면서 세계 노동자들이 나름 품위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예언했다(108쪽).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가미사마’, 즉 신이라 불리는 자동차 조립 공정에서 오래전 해고한 장인 숙련공들을 다시 회사로 불러들이고 있다.
도요타는 애초 전 공정 로봇 자동화로 반복적 조립을 통한 비용 효율과 절감 효과를 냈지만, 이것이 장기적으로 자동화 기계들이 작업장 내 새로운 창의적 시도나 도전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조직에 타성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파악했다.······중략······이 사례는 자동화의 미래도 기업이 지향하는 목표에 따라 인간-기계 앙상블의 밀도나 완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11쪽).
미국 언론정보학자 메리 그레이의 말처럼, 안정적 고용이 해체되면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동화 장치가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는 일의 틈새에서 기계 보조나 비서 역할자인 ‘고스트 워크(유령 노동)’를 주로 하는 노동인구로 대거 재편될 운명에 처해 있다(113쪽).
지구 생태 위기를 또 다른 첨단 신기술과 과학의 세례로 덮으려는 오만한 인간들의 구상을 보자. 이들은 기후 위기와 온실가스 문제를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병폐로 보고, 또 다른 동시대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해 이를 돌려막는 것이 가능하다는 발상을 갖고 있다. 과학기술의 자연 지배 욕망이 지구 생태 파괴의 현실로 드러난 상황에서도, 더 거대한 과학과 더 뛰어난 첨단의 기술을 매개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어긋난 믿음이 끈끈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고도 과학에 의해 생태 위기를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낙관론은 실상 주류 지구촌 사회의 국제기구들이나 일부 환경단체들의 의식에도 팽배해 있다(132쪽).
미래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불안하고 불투명한 안개 속 같은 지구에서 우리는 과연 지금의 과학기술을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계속해 미친 듯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다시 처음부터 던질 필요가 있다. 인류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의 위상을 다시 뜯어보고 근본적인 궤도 수정을 도모해야 한다(134쪽).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의 야만에 대항해서 탈성장 운동, 부엔 비비르(Buen Vivir; ‘좋은 삶’이라는 뜻으로 개발과 성장을 지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려는 남미 생태운동을 뜻한다), 탈정상과학(시민과학), 기술민주주의, 환경 자원의 커먼즈론 등 지구 생태 회복력을 찾으려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꾸준히 시도됐다.······중략······지구 생태 위기에 대한 행동주의적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좀 더 주류 자본주의 체제 아래 깊이 각인된 과학기술의 성장과 발전 신화를 뒤흔드는 일도 중요하다(135쪽).
미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케임브리지 비트코인 전기 소비 지수’에 따르면 한 해 비트코인 채굴에 들어가는 전력량은 70.27테라와트시로 추정된다. 현재 이 전력량은 칠레나 콜롬비아 등 남미 국가의 한 해 평균 전력 소모량을 능가하는 수치다(140쪽).
최근 정부는 포스트 코로나19 구상으로 ‘비대면·디지털 SOC’에 기댄 ‘한국형 뉴딜’ 사업을 발표했다(191쪽).······중략······이는 캐나다 작가이자 언론인 나오미 클라인이 <쇼크 독트린>에서 사회적으로 중대한 위기나 재난 상황이 닥치면 이를 명분으로 국가 엘리트들이 처음부터 그들이 원하던 것을 밀어붙인다는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의 작동 방식처럼 보인다(192쪽).
초현실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데는 기술적으로 ‘필터 버블(filter bubble)’ 효과가 그 배경에 있다. 필터 버블은 맞춤형 데이터에 익숙해져 그것의 과잉 정보 수취가 이뤄지면서 각자가 편향된 정보 거품에 갇히게 되는 효과를 말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특히 필터 버블 현상이 강화된다. 내 주위의 ‘소셜’ 네트워크에 연결된 이들이 비슷한 성향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무오류성의 착시 감옥에 갇히고, 다른 판단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이 흔해진다. 자동화 알고리즘이 본격화된 사회 현실은 더욱더 이 필터 버블 효과를 극대화한다(199쪽).
일상의 삶 거의 대부분이 데이터로 표현되고 기록되는 그런 세상을 이제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개인정보는 성장과 발전을 위해 매번 양보하거나 거래될 시장 품목이나 대상이 아님이 분명하다(223쪽).
지금 당장에는 첨단 테크놀로지의 반생명적 파탄과 전횡을 막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의 신체를 플랫폼 시장의 유통 자원으로, 인공지능 로봇 기계를 인간 노동을 단순 대체할 종이나 심부름꾼으로, 우리를 둘러싼 지구환경을 개발과 수탈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기술 효율 만능의 논리를 걷어내는 일이 시급하다(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