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 피난

2014.01.03. 08:42 ㅡ 1975

eunyongyi 2020. 6. 26. 17:13

“그리운 참언론인. 응답하라 1975.”

2013년 11월 22일. 오후 5시 50분쯤 됐을까. 세종로 네거리 횡단보도에서 서울 시청 쪽을 향해 곧게 선 한 남자. 초록 신호등에 성큼성큼 걷는 그의 어깨를 타고 땅거미가 흘렀다.
그의 선 품. 걷는 품을 뒤에서 처음 봤음에도 나는 그가 딱 그 사람인 줄 알았다. 어딜 가실까.
“참담합니다. 언론노조가 탄생한 지 25년이 지났는데도 언론이 민주화하지 못했고, 사회도 민주화하지 못했습니다.……중략……참여와 연대 외엔 다른 길 없을 겁니다.”
권영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초대 위원장. 서울신문 기자였고 민주노동당 대표였으며 대통령 선거에도 나섰던 그.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창립 25주년 기념식. 창밖 땅거미가 어둠에 완전히 눌렸다.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맞잡으려, 나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신문 ○○○입니다’라는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채 나는… 웃음마저 엉거주춤. 당황한 건 아니었는데 왜였을까. 부끄러웠다. 민주화하지 못한 언론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편안히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죄송했다.
“폭력배한테 쫓겨난 게 38년 전인데 아직도 저 건물(동아일보)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장. 동아일보 기자였고 동아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온몸을 보탠 이.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창밖의 동아일보 건물에 얽힌 상념이 클 기자(記者). “(동아일보 기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게 1974년 3월 8일. 벌써 39년이나 됐네요. 그땐 언론사에서 노조 만들면 잡혀가서 무기징역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용감한 동기들 덕에 조합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용기. 그 기개. 이제 후배가 이을 때인데, 나는… 부끄러웠다. 기자로 복직하지 못한 채 38년이나 들판 찬바람 맞은 여러 선배를 외면했기 때문이었을까. 죄송했다.
“언론노조! 목…숨을 걸고 말하지 않으면 (엄지로 검지 끝 짚어 내보이며) 요만한 틈도 열리지 않는 겁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그. “목…숨을 걸고”라고 그가 말했을 때, 쇠를 두들기는 듯 쨍쨍 울리는 그 크고 높은 목소리가 내 가슴을 후볐다.
“언론, 지금 참 어려운 때요.”
자본의 탐욕이 사회의 공기(公器)인 언론을 마음껏 유린하는 현실을 개탄하되 그 안에 일하는 언론 노동자를 측은히 여긴 거로 보였다. 허나 “목…숨을 걸” 만큼 결연해야 함을 잊지 말라고 꽝! 그가 탁자를 내리쳤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상식 밖에 선 채 귀를 닫은 이에게 제대로 말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다짐하는 화들짝 개안(開眼)! 언론 노동자로서 당당히 어깨 펼 때이고. 한 덩어리로 더 단단히 서로 연결할 때며. 미력하나마 힘 보태야 할 때다.
딱소리는… “‘딱’하고 자기 소리에 자기가 깨우치는 거요.” 딱마디는… “이제 한마디가 아니라 딱마디요 딱마디.”
딱소리. “아무리 얘기해도 깨우치지 않으면 목에다 칼을 들이대고 하는 소리요.” 운동. “딱마디 운동은 이제 말이나 글로 하는 게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하는 거요.”
힘주어 어금니 사리물라는 말씀일 터. 예스럽지만 늘 가슴을 저미는 문구. “단결, 자유 언론 그날까지. 투쟁, 노동 해방 그날까지.”


■1975: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윤활식 등 지음. 인카운터 펴냄. 2013년 5월.


201쪽을 펼쳤다. 교보문고 강남점 인문사회 코너 도서 전시대에 선 채로.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무렵이었기에 쉬 손이 닿는 자리에… 그의 신산한 삶이 고스란했다.
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총무를 지낸 기자. 박정희 군부 독재가 표현의 자유를 속박한 기자. 동아일보가 억지로 내몬 기자. 즉! 박정희와 동아일보에 두려움을 안겨 준 기자.
나는 그를 1995년에 만났다. 정확히는 같은 신문사였으되 출판국과 자매 주간 신문에서 일한 그를 보았다고, 기억한다고 해야겠다.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럴 시간과 공간이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허락됐더라도 나는 색깔 여린 스물일곱 청년에 불과했다. 맵고 신 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안타깝게도 그랬다.
가슴 아프고 답답했기에 기억을 더 깊이 심었을까. 마흔다섯(2013년)이 된 나는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죄송하다.
1971년 대선 뒤… 그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고려대학교에 난입하던 현장에서, 군인들이 또래 학생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친 뒤 트럭에 가마니때기 싣듯 쌓아 올리는가 하면, 최루가스를 발사하며 4층 강의실까지 학생들을 쫓아 올라가는 바람에 달아나던 학생이 결국 4층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최루탄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격정 때문에 진짜 눈물을 흘리며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그런데 그 기사가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을 때는 정말로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싶어졌다(204쪽).”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 1972년 3월. 그는 “아주 사소한 기사 하나 때문에 육군 제3 범죄수사대에 연행돼 치욕스러운 욕설과 협박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했다. 기사 내용은 ‘한 방위병이 변심한 약혼녀의 집에 방화했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가 보도되자 육군 범죄수사대는 나를 포함한 언론인 11명을 연행해 조사했다. 그들은 내가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야, 이 빨갱이 새끼야. 너 군·민을 이간질하는 간첩새끼지?’ 하는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했다. 몇 시간 만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른바 ‘민주국가’라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보니 황당하기도 하고 가슴 속에서 울분이 치솟기도 했다(204쪽).”
1972년 10월 유신… 그와 동료 “기자들은 일상적인 취재활동마저 엄격히 제한을 받았으며, 정부 일부 부처와 경찰 기자실 등은 또다시 폐쇄됐다. 모든 언론이 ‘보도할 자유’는 물론 ‘보도하지 않을 자유’마저 완전히 박탈됐다. 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기사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반면 정부 당국이 배급하는 기사나 해설은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보도해야 했다(205쪽).”
1974년 3월. 그와 “기자들은 언론자유운동을 효율적으로 벌여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신분 보장 방안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했다(205쪽).”
박종만과 동료 기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건―그 현장에 없었기에 쉬 말하기 어렵지만―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당연한 선택이었을 터. 이때로부터 한국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 운동의 소중한 싹인<말>이 움텄다. 그와 동료 기자들이<말>과 한국 민주주의 성장의 자양분이었고.
그해(1974년) 10월 24일. 그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의 시작이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그리고… 1975년. 기어이. 그는 ‘해직 기자’가 됐다.
“내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것은 제작 거부 농성 첫날인 1975년 3월 12일이었다. 내 나이 33세, 동아일보에 입사한 지 7년 반, 결혼한 지 만 4년 되던 때의 일이었다(206쪽).”
해직. 기자로서 늘 현장에 있고자 했던 이에 대한 폭력. 노동자로서 언제나 소중한 땀 흘린 이에 대한 탄압. 몹쓸 ‘그자’는 박종만의 목줄을 그리 틀어쥐려 했다.
허나 박종만은, 그와 동료들은 쉬 굽힐 기자가 아니었다. “우리(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게 1975년 여름은 참으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중략……우리가 국민과 역사 앞에 신명을 바쳐 지키기로 약속한 자유 언론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208쪽).” 깃발. 결코 내릴 수 없었던 그 용기. 서슬. 책임감.
‘그자’는 치졸했다. “어느 날 저녁, 동아투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던 여관방에 제작 거부 농성에 동참하다가 회사로 되돌아간 한 기자가 술에 취해 찾아와 주정을 부렸다. 그때 방안에는 동료 기자 여섯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기자와 방문객 사이에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져 다른 동료가 이를 말리느라 밀고 당긴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종로경찰서는 기자 여섯 명을 연행했다. 그 가운데 세 명을 폭력범으로 구속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건이 단순한 형사고발이 아니라, 이른바 ‘윗선’의 지시에 따라 처리된 일종의 정치적 사건이었다(208쪽).”
유치하고 졸렬한 ‘그자’의 이런 행위는 시작에 불과했다. 박종만과 아내는 “집을 팔아 마침 남대문시장 근처에 새로 생긴 ‘새로나백화점’에서 두 평짜리 스낵 가게를 시작했다(209쪽).” 그가 판 집은 어머니, 아내,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살던 서울 화곡동 13평짜리 아파트였다.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털어 살아 나갈 방도를 찾으려 했다.
‘그자’는 호구지책을 찾아 나선 박종만과 그의 가족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1978년 10월 26일 그를 구속했다. ‘동아투위소식’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언론 자유 억압 사례를 게재한 게 ‘그자’ 심사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는 1년쯤 감옥에 갇혔다.
1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음에도 박종만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자’가 유체이탈이라도 하듯 박정희로부터 빠져나와 그를 뫼(모)시던 새 군부에 안착했다.
새 군부가 광주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1980년 ‘5·17’ 이후엔 동아투위 사무실마저 폐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중략……나도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5·17 이후 한동안 이리저리 숨어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7월 중순쯤 오랜만에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다 집 앞에서 대기하던 형사들에게 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일주일 동안 고초를 겪었다(214쪽).”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지 6년 만에 어렵게 잡은 첫 일자리는 친구가 간부로 있는 아동서적 출판사 편집부였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오랜 세월 이른바 주간지, 전문지 등을 전전했다.……중략……많은 (동아투위) 사람들이 나와 같이 ‘뒤죽박죽’ 인생의 험난한 길을 걸어 왔다(215쪽).”
나는 박종만의 뒤죽박죽 인생 가운데 주간지, 전문지 등을 전전하던 시절에 그를 조우했다. 그와 소주로 깊어지고 막걸리로 즐겁지 못했으되 그가 치켜든 ‘자유 언론’ 깃발을 가슴에 품었다. “그래야 후일 우리의 후손들이 역사에서 배울 게 있지 않겠는가(216쪽).”
한 사람 더. 이기중. 전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으로 살다가 역시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속박당한 기자. 감옥에서 허리 통증을 얻고 이앓이로 고생한 기자.
나는 그도 1995년에 만났다. 같은 신문사였고 그는 편집국장이었다. 그가 출제한 입사 시험의 국어 문제 1~5번을 모두 맞힌 소회가 새삼스럽다. 그가 편집국장으로서 했던 여러 말과 행동이 뇌리에 또렷하다. 허나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럴 시간과 공간이 없었다. 시간과 공간이 허락됐더라도 나는 색깔 여린 스물일곱 청년에 불과했다. 맵고 신 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안타깝게도 그랬다.
이기중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 이후의 삶을 ‘아! 엄혹한 시절’로 기억했다. 매우 엄하고 모질었던 그때를 되새기며 ‘어찌 살아왔는지(249쪽)’ 긴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그의 긴 한숨이 마흔다섯 된 내 가슴에 탄식으로 닿는다.
동아투위원의 탄식은 2013년으로 삼십팔 년째였다. 애초 있던 자리(동아일보 편집국)로 누구 하나 돌아가지 못한 채로다.
“나는 한국에 진정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 땅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수구 보수 세력이 ‘박정희 왕조’를 실질적으로 부활시킨 현실에서 내가 돌아가 설 자리는 전혀 없어 보인다(166쪽).……중략……조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져 동아일보사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일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167쪽).”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다가 동아투위 물결을 탔고, 결국 미국에 이민한 서권석의 바람이다. 그의 눈엔 2013년에도 ‘박정희 왕조’가 여전했다. 1975년보다 삼십팔 년 뒤인 2013년이 더 비참하지 않았을까.
타국에서 비참히 탄식하는 전직 기자. 그를 이역만리로 내몬 ‘그자’의 비정상적 삶, 비정상적 행태는 시민의 오랜 고통을 잉태했다.
1971년 2월.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고, 동아투위원장으로 활동한 문영희는 “‘박근혜 양’이 서강대 입시를 치르던 날, 자동차를 타고 대학교 정문을 들어갔느냐 아니냐의 진실 게임에 말려들어 무기 정직을 당했다가 한 달 만에 풀렸던 사건(169~170쪽)”을 겪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고위직 공무원의 관용차 이용을 단속하겠다는 발표를 했던 무렵이라 우리는 근혜 양이 차를 타고 고사장에 나타난 것은 문제라고 인식(169쪽)”했다.
당연한 인식이고 문영희 기자는 마땅히 관련 기사를 썼다. 헌데 그는 “얼마 후 청와대 출입 기자가 육영수 여사의 말이라며 ‘근혜는 차를 타고 들어가지 않았다’는 정정 보도를 요청했다(169~170쪽)”고 전해 들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 안에서 차마 웃지 못 할 반응이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심의실장이 “왜 시끄럽게 했느냐. 지금이 어떤 시대냐? 설사 차량을 타고 고사장 가는 것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청와대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170쪽)”라 했단다.
부끄럽고 안타깝다. “느낌 아니까.” 기자답지 않은 말과 생각. 그따위 기자답지 않은 ‘그자’의 횡포에 굴욕 느껴 봤으니까.
문영희가 보기에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을 박정희보다 더 끔찍하게 모시는 ‘서생원적’ 언론인(171쪽)”도 있었다니 그 시절 횡행했을 그따위 기자(언론인)의 그따위 줄타기의 역겨움에 어제 먹은 음식을 모두 게우고도 남겠다. 물론 똥만 올라오겠지.
“유신 체제가 선포되고 두 차례 언론자유선언이 있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언론의 숨통을 죄고 있었다. 언론자유운동에 열심이고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를 하루아침에 편집부서가 아닌 광고국으로 전보하기도 했다(226쪽).”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이었던 민주당 고문 이부영. 그에게도 ‘그자’의 독재가 더께로 내려앉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폭압이 거리낌 없이.
“제대로 특종 기사를 쓰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논설을 쓰는 일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당하고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시국을 맞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비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 대응방안이 언론노동조합 결성이었다(227쪽).”
한 덩어리가 되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겠으되 서슬 퍼런 박정희 군부 독재 아래였기에 더욱 큰 용기가 필요했을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노동조합 운동. 그 씩씩하고 굳센 기운에 나는 절로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얍삽한 이, 기자답지 않은 자는 빼고다. 이부영이 고민했듯 그들을 어찌 봐야 할지는 내게도 오랜 숙제다. 이부영은 “서울지법에서 재판받는 동안 취재하러 나온 지난날의 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자유언론수호 투쟁에 합류하지 않은) 동아일보 기자들은 차마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가와 따뜻한 위로의 한두 마디 말을 건네고 갔다. 시세 흐름에 빠르기로 소문났던 몇몇 기자들은 ‘꼴좋다. 그렇게 날뛰더니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모욕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전두환·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김대중 정권에서도 언론계에서 승승장구했다. 어떤 정치 상황에서도 더 빨리, 오히려 앞서 순응해 나가는 저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뒤로도 계속 고민한 주제였다(233쪽)”고 말했다.
미래 어느 때든 침을 제대로 뱉어 줘야 할 터다. 그들과 ‘그자’에게.
아프고 괴롭다. 뱉고 싶은 침이 입안에 자꾸 고여서다. 양이 늘어 꿀꺽꿀꺽 삼키는 일이 잦다. 제대로 뱉어 줘야 할 걸 삼키니 역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 어찌 풀어야할까.
성유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은 박래부 새언론포럼 회장에게 “(거리로 나선 동아일보 기자들이) 다 미련해서, 우직해서 그렇지”라고 말했단다. 그는 곧 “‘나에게 ‘그냥 회사에 붙어 있었으면 잘 살았지 않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어. 그러나 내 생각에 내가 ‘동투’에 있지 않고 눌러앉아 근무를 했다면 박정희, 전두환 때를 거치면서 틀림없이 정신병에 걸렸을 거야”라고 덧붙였다(395쪽).
요즈음의 언론도 힘들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렵다. 역사는 되풀이한다는 둥 그래서 또 어떻다는 둥 따로 무게 잡을 필요 없겠다.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에게 ‘그자’의 그늘이 드리웠다면 지금은 ‘자본의 탐욕’이 더 거센 게 조금 다를까. 아니, 예나 지금이나 ‘그자’의 횡포는 마찬가지다. ‘그자’도 늘 ‘자본의 탐욕’ 범주 안에 들었다. ‘그자’가 ‘그자’였고 지금도 ‘그자’인 거다.
‘그자’에 맞선 “동아투위 동지들, 내게는 매우 소중한 분들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나면 늘 반갑고 즐거운 벗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적인 이해관계로만 얽혀 사는 삭막한 세상에서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아름답고 즐겁게 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40년 가까이 동아투위 동지들과 같은 뜻을 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나의 삶에 있어서 큰 보람이요 축복이다(381쪽).”
38년 동안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곁에 서 준 목사. 이해동. 이런 분이 계셔서 마음이 흐뭇하다. 이런 분께 배운다. 즐겁다. 마음을 단단히 다진다.
“취재 현장은 목숨을 건 투쟁의 마당이다. 현장은 일회적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현장을 미래에 복원할 수는 없다. 인생도 그렇다. 오늘 우리의 현재는 영원히 지금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크게 보면 역사도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역사의 현장을 언론계 밖에서 놓친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대학에서) 취재보도론을 강의하면서 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언론은 시시각각 현장에서 승부한다. 권력은 그 현장과 나를 힘으로 분리시켰다. 새롭게 싱싱한 취재 경험담을 들려줄 수 없었던 시간 강사는 강단에 설 때마다 외로웠다(334쪽).”
전 동아방송 사회문화부 기자 이태호. 현장을 빼앗긴 기자의 이 절절한 아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도 어설피 ‘그자’ 때문에 현장을 빼앗겼다. 펜을 빼앗겼다. 잊지 않으리라.
덧붙여 하나. 신산(辛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위원들은 저마다 10권 내지 20권씩 책을 들고 외판원으로 나섰다. 신출내기 외판원들이 무거운 책을 한 아름씩 안고 부산하게 쏘다니는 세종로 거리에 한여름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196쪽). 나는 10권을 보자기에 싸서 가까운 서울신문사로 향했다. 내가 잘 아는 권기진 기자가 거기서 일했다. 편집국으로 그를 찾아가자 그는……(197쪽).”
권기진 서울신문 기자는 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이종대에게 마음을 전했다. 보따리에서 책 다섯 권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마음이, 굶지 않으려 거리로 나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의 애환이 고스란했다. 오죽 신산했으면 이종대의 동아일보 “입사 동기이자 해직 동기인 윤석봉, 이종욱, 박순철, 권근술 등 6명은 돈벌이 방법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참기름 방앗간을 차리자는 데 뜻을 모았(197쪽)”으랴.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 ‘느낌 아니까.’ 외판은 아니었으되 책 여러 권 들고 처음 보는 사람 앞에 나서 본 적 있으니까.
그렇다고 기자의 혜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유신 정권의 행태는 자신감과 여유가 없는 자들의 일반적인 행동 양식과 닮아 있었다. 누르는 자들이 눌리는 자들보다 더 깊은 불안감과 위기감에 떨고 있다니. 끝이 멀지 않았음을 저쪽이 먼저 감지하기 시작한 것인가(200쪽)”라고 이종대는 꿰뚫어 보았다.
덧붙여 둘. 김세은 강원대 교수(신문방송학과)가 들여다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괄호 안 이니셜은 동아투위원들을 가리킨다.
실감조차 나지 않았던 실직 상태가 점차 장기화하면서 이들의 ‘손엔 돈이 말라갔’고(L) 당장 살아갈 일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신문사에서 쫓겨난 직후부터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는 가운데 “먹고사는 일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으며, “걸핏하면 중앙정보부로, 경찰서로 연행해 조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O). “돌반지를 팔아 쌀을 사는(M,K)” 생활도 한계가 있었다. ‘극빈의 생활(P)’이 이어졌다(422쪽).
작은 주간지나 출판사를 전전하는 이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아파트를 팔아 작은 스낵가게를 열기도 하고(O) 여럿이 어울려 복덕방을 차려도 보고(M), 파이프 장사에서 알로에, 꽃가게를 전전하거나(D), 시장에서 과일도 팔고 양말도 팔아 보았지만(X), 그 작은 가게에도 정보원이 수시로 들락거렸고 또 장사 수완도 없어 대부분 금세 접고 말았다(422쪽).
그러나 이렇게 다른 직종에서 ‘문간방 나그네’로 떠돌면서도 “연젠가는 본래 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K).” “쫓겨 나오면서……중략……이 나라에 언론이 좌우간 제대로 바로 서고 가야 된다는 것이 머릿속에 박혔기 때문에(U)” 이들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열심히 동아투위나 민언련 활동에 관여하게 된다(424쪽).
“이상하게 YS든 DJ든……중략……말로만 뭘 주겠다고 해 놓고 던져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동아투위가 사실은 그 민주화 정권,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에서도, 말하자면 잊어버린 망각의 장소에 있었든가, 아니면 나쁘게 얘기하면 버림받은… 그런 거죠(U).”
431쪽에 기록된 아픔이다. 다음은 434쪽에 새겨진 절절함.
“나는 아직도 그 동아일보에 돌아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편집국 한 편 내가 있었던 자리에 가서 앉아보고 싶다.……중략……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3등 신문, 찌라시 신문으로 불리는 그 신문 제작 현장에 서서 왜 그 신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지금의 동아일보 사람들과 얘기해 보고 싶다(E).”
김세은 교수는 이들을 ‘영원한 해직 기자’로 규정했다. 영원한 해직 기자는 ‘지금도 언론 현장에 돌아가고 싶다’고 전했다.
“…….”
죄송하다. 여러 선배께. 여러모로. 더 노력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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