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사이언스: 1부
최근 출판사에 절판을 요구했다. 지난 2005년 7월 25일 ‘옐로 사이언스’가 세상에 나왔으되 그 뒤로는 출판사 <이후>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옛 <이후>를 인수한 출판사 전화번호를 알게 돼 연락했더니, 옛 출판사 대표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컸다. 쩝…, 짜증났고, 절판해달라고 말했다.
원고를 다시 쓰지는 않았고, 웹 하드에 묻어놓았던 것을 꺼냈다. 오타가 많을 것이고, 내용이 깊지 못해 부끄럽되<황우석 거짓논문 사태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옐로카드’를 던졌다>는 자신감(?)에…, 기록으로 남길 요량으로 이 자리에 옮겨놓는다.
[머리말]
나의 빙장(聘丈)은 2004년 5월 예순세 번 째 생일을 맞았다. 빙장은 당신의 생일에 아들, 딸들과 사위를 불러 저녁자리를 마련했다.
차창을 넘어오는 바람이 상큼했다.
“민성이(막내 딸)는 약속장소를 알고 있나?”
“전화로 알려줬습니다.”
“아니, 민성이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됐다던데...... 어떻게 통화했어?”
“편의점에서 충전했다더군요.”
“편의점에서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했다고?”
“네. 20분 정도면 충전할 수 있습니다.”
“허, 세상이 날로 좋아지네!”
20세기 후반부터 탄력이 붙기 시작한 정보기술(IT)의 발전은 문명(文明)을 가히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다. 특히 초고속 인터넷 대중화, 유무선 통신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이면서 바야흐로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online)’하는 세상이다.
나의 빙장은 오래 전, 전화기가 선(Wire)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지켜봤다. 이미 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전화기에 익숙해졌다. 사실 ‘편의점의 휴대폰 배터리 충전서비스’가 상전벽해(桑田碧海)일 정도는 아니지만 무척 흥미로운 변화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빙장의 말씀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한 달 쯤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배터리를 만들지는 못하나? 휴대폰을 하루 이틀 쯤 쓰고 나서 배터리 충전하는 거 너무 불편해. 거 뭐야, 오래 전부터 태양열을 이용해 발전한다는 얘기들이 있었는데 요즈음엔 어찌 됐나 몰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 속도가 사람들의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언제나 그랬다. 과학기술은 꿈으로 여겨지던 세상을 10년, 20년, 30년 후 실현해내곤 했다. 그 세월 동안 축적되고 수정되며 놀라운 모습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21세기, 이제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기대는 생명의 새질서(생명공학기술), 극한의 물질세계(나노기술), 생활 깊숙이 침투하는 컴퓨터 세상(정보기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특히 삶 주변 여기저기에 편재하는(ubiquitous) 컴퓨터가 그물망(네트워크)처럼 짜여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그 ‘편재하는 정도’가 더욱 넓게, 더욱 깊숙이 생활 가까이로 침투할 전망이다. 손자를 둔, 나이 지긋한 어른들로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레 정보기술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수요가 공급을 낳는다’는 것과 같은 이런저런 류의 경제법칙들을 떠올릴 필요도 없겠다. 생활 속에서 기술이 발전할 방향들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빙장이 아쉬워하는 한 달 쯤, 아니 거의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차세대 전지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들도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원시시대, 연약한 인간이 동물에 우월할 수 있었던 것은 ‘문명을 창조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문명은 ‘언어’, 즉 대화하는 능력에 힘입은 바다. 21세기의 ‘대화’는 인터넷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통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무엇보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는 ‘0’과 ‘1’로 표현되는 디지털(Digital) 대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새로운 밑거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정보기술이 21세기 문명의 거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새로운 기준(토대)으로 등장한 셈이다.
정보기술(IT)에 이어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다시 재단(裁斷)할 태세다. BT가 인간의 숙원인 질병극복과 생명연장의 꿈을 앞당기겠다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NT는 인간을 극한(極限)의 공간으로 나아가게 해 물질에 대한 기존의 과학적 상식들을 바꾸어간다. 아예 가치관을 바꿀 기세다.
그러나 생명공학자들은 생명복제의 윤리적 문제들로 이어진 외줄 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불치(不齒) 세계에 던진 도전장이 의연하지만 한두 꺼풀씩 생명의 신비들을 벗겨낼수록 더욱 두려워진다.
나노기술자와 정보기술자들에게도 기술적 한계를 넘어갈수록 책임도 무거워진다. 나노기술은 그동안 알려진 물질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특성 자체를 바꾸고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정보기술도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간의 사생활을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과학기술력이 시장과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입니다. 저는 최근 우리가 함께 일궈낸 놀랍고 자랑스런 성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창의적 기술에 선진국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우리 국민의 높은 창의성을 바탕으로 과학기술 혁신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국가기술혁신체제(NIS)를 구축하는데 전력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우리 과학자들이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집중 지원하고, 과학자들과 전문 기술인력이 사회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2008년 세계 8위의 과학기술 강국을 목표로 미래 전략기술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고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에 집중 투자할 것입니다. IT, 생명공학, 나노기술분야 등을 중심으로 해외의 우수 연구기관과 기업 R&D 센터 유치를 확대하겠습니다. 특히, IT인프라를 바탕으로 지능기반사회(U-Korea)를 다른 나라보다 앞서 이룩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기업이 핵심기술을 확보하고 실용화할 수 있도록 집중 지원하면서, 정부는 초기시장창출과 제도적 개선을 추진할 것입니다.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주력산업을 고도화하고, 부품 소재산업이 수입의존구조에서 탈피하도록 그 기반을 조성하겠습니다.”
정부의 정책기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 중요한 만큼이나 차분하게 준비하고, 먼저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겠다. 차분한 준비와 사회적 합의는 과학기술자들에게 윤리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과학을 위한 물음표’ 몇 개를 던지기로 했다. 필자가 과학기술 세계에 관심을 기울일수록, 그 놀라운 미래상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일어났다. 더욱 안전하고 윤리적인 과학기술 성과들이 인간의 삶을 기름지게 만들 수 있도록 ‘과학을 위한, 과학의 발전을 위한’ 물음표를 마구 쏟아내기로 마음먹었다.
2005년 5월 정부과천청사 기자실에서.
[옐로 카드 Ⅰ-황우석 신드롬]
1장 강원래와 황우석
2005년 2월 11일 황우석 서울대학교 석좌교수(수의학과)의 ‘인간복제배아 줄기세포 배양 성공’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됐다. 황우석·문신용 서울대 교수가 2004년 2월 13일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 처음으로 체세포 복제 인간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추출·배양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지 1년여 만이었다. 우표에는 줄기세포 배양과정, 휠체어에 앉아 있던 환자가 일어나 걷고 뛰어가 애인에게 안기는 형상이 담겼다.
21세기 과학 강국으로 부상하려는 우리 정부와 과학계의 의지가 생명공학기술(BT : Bio-Technology)에 모아지고 있다. 특히 황 교수의 세계적인 연구 성과에 대한 기대치가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정부는 황우석 교수가 추진하는 연구과제들을 21세기 차세대 경제 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한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기 마련. 우표를 만들어 ‘곧 될 것처럼 성급하게 포장’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연구를 지원하고 될 만큼만 기대’할 필요가 있겠다. 무엇보다 안전과 윤리문제를 포괄하는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합의가 요원하고, 과학적 판단기준이 확실하지 않다면, 가장 위험하지 않은 선택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다. 신드롬은 곤란하다.
1장 강원래와 황우석
2000년 11월 9일 오후 2시 30분 서울 서포구 반포동. 서른 두 살의 건장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수교차로에서 제일생명 네거리 쪽으로 달려갔다.
어깨에 살짝 내려앉을 것 같은 그의 긴 머리카락은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맙소사, 갑자기 그의 앞에 불법 유턴하던 승용차가 나타났다. 그의 오토바이가 승용차의 오른쪽을 들이받았다.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리와 어깨에 골절상을 입었고, 뇌출혈이 있었다. 중태였다.
그가 깨어났다. 하지만 척추신경을 다친 까닭에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강원래. 구준엽과 함께 대중가요그룹 ‘클론’의 멤버로 활동하며 ‘쿵따리 샤바라’라는 노래로 널리 친숙해진 젊은이, 바로 그였다.
강원래는 휠체어에 앉았다. 가장 뜨거운 삶을 살아야 할 나이에 가장 비참한 현실과 맞닥뜨린 것. 하지만 그는 용감하게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다. 장애우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가 됐다.
2004년 4월 20일 오후 6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서른여섯 살이 된 강원래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비롯한 유명 정치인, 저명한 학자, 기업인, 정부 고위 관료 등이 성황을 이뤘고 모두 한 사람에 주목했다. 수많은 시선의 끝에 황우석 교수가 있었다.
이날 ‘황우석 교수 후원회’가 열렸다. 강원래 씨의 휠체어가 행사장 앞쪽을 향했고, 모든 이의 눈과 귀가 그에게로 옮겨갔다.
“지금까지 치료 가능성은 0%였습니다. 하지만 황 교수님 덕분에 0.0001%의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저에게 0.0001%는 곧 희망입니다.”
강원래 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2000년 11월, 그의 주치의가 제시한 ‘다시 걸을 수 있는 확률’은 0%였다. 그런데 3년여가 지난 2004년 1월, 주치의는 “0.1%는 될 것 같다”며 확률을 아주 조금 높였다. 황우석 교수가 난자를 제공한 사람의 유전자를 복제한 배아(胚芽)를 만들고, 그 배아로부터 여러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줄기세포를 세계 처음으로 배양하는 데 성공해서다. 난치, 불치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새 가능성이 열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강원래 씨는 주치의가 자신에게 새로 제시한 0.1%의 확률을 0.0001%로 크게 낮춰 받아들였다. 하지만 가슴 속 불씨는 절망(0%)에서 희망(0.0001%)으로 되살아났고,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황우석 교수는 공석과 사석에서 “강원래 씨가 일어나 춤을 출 수 있게 될 겁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황 교수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 복제연구를 통해 손상된 척수 신경세포, 심장근육 등을 되살리는 치료법이 실현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인간 배아 줄기세포 배양기술’을 통한 치료법인데, 줄기세포를 신경 및 척추세포로 분화하도록 촉진한 후 주사기 등을 통해 손상부위(척수)에 넣어줘 건강한 삶을 찾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꿈의 21세기 의학’이라며 흥분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황 교수가 강원래 씨에게 새 삶을 주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연구 자체가 성공할 지도 알 수 없다. 황 교수의 연구 성과는 분명, 꿈의 의료기술을 열매로 맺을 것 같은 씨앗이다. 앞으로 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치고, 나뭇잎도 내야 한다. 거름을 줄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씨앗을 뿌렸는데, 열매를 바라는 조급(早急)을 경계해야 한다. 지나친 거름이 일을 그르칠 수 있어서다.
냄비 끓듯 달아오른 흥분과 성급한 기대는 그 만큼 빨리 식는다. 장애우의 탄식(歎息)을 더욱 무겁고 무겁게, 한숨을 더욱 길고 길게 만들어 놓을 수 있다.
#1. 줄기세포, 21세기 만병통치?
“줄기세포는 크게 인간의 배아(胚芽) 및 성체(成體) 줄기세포로 구분되며,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로 분화가 가능해 ‘난치병 치료의 열쇠’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략) 아직은 세포치료가 언제부터 인류의 희망이 될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지만, 줄기세포 연구는 난치병 치료를 가능하게 해 인류에게 광범위한 혜택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황우석 교수와 함께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주도한 문신용 서울대 교수의 말이다. 난치병 치료의 열쇠, 참으로 매력적인 이야기다.
세포는 생물체 형태를 구성하는 기본단위. 기능적으로도 최소 단위의 생명현상을 나타낸다. 1938년 식물학자 엠(M.) 제이(J.) 슐라이덴, 1939년 동물학자 티(T.) 에이(A.) 에이치(H.) 슈반이 세포설을 확립했다. 그 내용인즉, 생물체는 모두 세포나 세포의 생산물로 구성되어 있고, 개별 세포마다 일정한 수명(생명)을 가졌으며, 개별 세포의 생명은 생물체의 생명에 지배된다는 것.
생명 근원의 비밀이 세포 안에 담겨있는 셈이다. 하지만 세포는 핵, 세포질, 세포막 등 보다 근원적인 형태의 구조로 나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없겠다. 또 생명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은 철학적, 사회적, 과학적으로 다른 의미의 작업이다.
과학자들은 후생(後生)동물의 조직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세포, 즉 줄기세포가 몸의 모든 신체기관과 조직으로 바뀌는 출발점이라는 데 주목해왔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줄기세포가 뼈, 뇌, 근육, 피부 등 모든 신체기관으로 성장하는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줄기세포는 이런 성질 때문에 ‘만능(萬能)세포’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를 활용해 고장 난 신체 조직이나 기관을 다시 생산해보자는 게 황우석, 문신용 교수의 생각이다.
줄기세포는 구체적인 장기(臟器)로 바뀌기 전에 분화를 멈춘 배아(胚芽) 단계의 세포다. 사람의 경우에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우선 수정란이 처음 분열할 때 ‘만능 줄기세포(totipotent cell)’가 만들어진다. 이 세포에는 하나의 생명, 즉 아기(태아)로 자라날 수 있는 모든 기능과 성질이 담겨 있다. 때문에 아직까지 연구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사회적 합의로 통하고, 과학자들도 넘지 말아야 할 선(윤리)으로 여기고 있다.
만능 줄기세포가 계속 분열하면 ‘배아 줄기세포’가 형성된다. 전분화능세포(pluripotent cell)이라고도 부르는데, 다양한 세포와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성징을 가졌다. 이 세포는 수정 뒤 4~5일이 지나 나타나는 배반포 안쪽의 내부 세포덩어리(iner cell mass)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부터 특별한 인체 신호체계에 의해 줄기세포가 사람의 몸에 필요한 장기나 조직으로 분화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난치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이 배아 줄기세포 안에 숨어있다고 보고,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채취해 배양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배아 자체도 하나의 생명으로 발달해간다는 점에서 생명윤리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이 생명의 싹(배아)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 일부 과학자들은 ‘수정 뒤 14일’을 기준점으로 제시한다. 인간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수정이 이루어진 후 14일 동안, 즉 엄마의 몸에 착상되기 전의 수정란을 그저 ‘세포 덩어리’로 보자는 얘기. 이 때까지를 세포가 자신의 개체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이 시작됐다고 보지 말자는 얘기다. 이 같은 주장은 학문적으로 원시선(primitive streak)이 형성되기 전의 단계로 정리되고 있다. 따라서 수정 뒤 14일 이내에서는 자유로운(?) 연구를 진행하자는 것.
그런데 그 누가 수정 뒤 14일이 지나지 않은 인간의 세포(수정란)에게 다가가 “너, 니가 누군지 아니?”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다. 그 누가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폐기’되어야 하는 수많은 인간배아들에게 다가가 “너, 괜찮지?”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역시 없다. 과학기술이 더욱 발달한 미래에도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고, 계속 논란을 부를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인간 배아 줄기세포 복제연구도 아슬아슬한 생명윤리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황 교수는 과거 ‘10~20년쯤 후’라고 어림잡아 얘기했던 인간복제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한 난치병 치료가능시점을 2005년 1월에 들어서면서 ‘5~10년 쯤 후’로 앞당겼다. 3월에 들어서자 그 시점은 ‘4~9년’으로 조금 더 앞당겨졌다.
실제로 중앙일보가 2005년 1월 일반인, 난치병 환자, 줄기세포 연구자 등 10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줄기세포 치료에 관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게재했다. 황우석 교수도 설문에 응했다. 황 교수는 ‘줄기세포의 환자 치료 적용시기’를 ‘4~9년’으로 답했다. 3년 이내에 자신의 연구결과가 치료에 사용될 확률을 10% 정도로 예상했다.
분열이 상당히 진행돼 노화단계로 들어선 세포를 ‘성체(成體) 줄기세포’라고 부른다. 이른바 다능성세포(multipotent cell)로서 거의 분열이 완료되어 그 기능이나 조직적 특성이 정해진다. 배아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윤리논쟁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능과 특성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 만큼 추출이 어렵고, 세포 치료기술의 전제조건인 ‘배양하기’가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배아 줄기세포보다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체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불치병 정복의지를 꺾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삐를 바싹 틀어쥐고 있다. 배아 줄기세포의 잠재적 가치가 뛰어난 탓에 세상의 관심이 몰리고 있지만, 성체 줄기세포 연구가 가져올 결실이 더욱 현실적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넘지 못할 생물학적 한계로 여겨지는 ‘면역거부반응 문제’를 뛰어넘을 가능성에 배아 줄기세포보다 한결 가깝게 접근해 있기 때문. 이미 연구 결과들을 사람에게 적용해보는 임상실험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탯줄혈액에서 성체 줄기세포를 추출해 간경화 환자에게 주입했더니 간 효소수치가 좋아지면서 병세가 호전된 사례가 있다. 골수와 탯줄혈액에서 뽑아낸 성체 줄기세포로 급성기 척수손상환자의 신경이 재생되는 효과도 보고 됐다. 이밖에 루게릭병, 당뇨병, 무혈성 대퇴골두괴사증, 울혈성 심부전증, 유전성 망막질환, 뇌졸중, 류머티스 관절염 등에서 일부 효과가 나타났다는 실험결과들이 속출하고 있다.
2005년 2월 23일, 이 같은 기대를 더욱 부풀리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한국생명공학원의 최인표, 유대열 박사팀이 암세포를 파괴하는 자연살해(NK : Natural Killer)세포의 분화와 활성 메커니즘을 밝혀낸 것.
연구팀은 항암작용을 하는 ‘비타민 디(D)3’에 의해 발현이 증가하는 유전자 ‘브이디피유원(VDPU1)’를 이용해 동물(생쥐)모델실험을 했다. 그 결과, 브이디피유1을 가지지 않은 생쥐의 엔케이(NK : Natural Killer)세포 수와 기능이 크게 떨어졌다. 이로 인해 암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한 것을 확인했다. 이로써 브이디피유1이 성체 줄기세포를 엔케이세포로 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최인표 박사는 “2003년 기준으로 600만명이 암으로 사망했으며 수술, 항암제, 방사선 요법 등 기존 치료법이 한계(사망률 50%)에 이르렀다”며 “엔케이(NK)세포 관련기술을 제4의 항암치료법으로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사람의 면역기능을 유지하는데 관여하는 세포로는 균을 잡아먹는 ‘탐식구’, 항체(抗體)를 분비하는 ‘림프구’가 있다. 림프구는 다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와 암세포를 공격하는 ‘엔케이(NK)세포’, 탐식구의 탐식능력을 높여주는 ‘비(B)세포’, 면역조절물질의 일종인 사이토카인을 분비해 탐식구와 림프구의 증식을 촉진하는 ‘티(T)세포’가 있다.
연구진은 비(B), 티(T)세포와 달리 암세포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직접 공격해 파괴하는 엔케이(NK)세포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인체의 적극적인 면역력을 유도하겠다는 게 연구 목표다. 무엇보다 수술, 항암제, 방사선요법 등 기존 방법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1밀리미터의 초기 암, 전이된 암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최 박사는 “엔케이(NK)세포를 이용한 면역력 증강요법이 궁극적인 암 치료의 대안이 될 것”이라며 “무엇보다 환자 자신의 골수로부터 성체 줄기세포를 추출한 후 면역세포로 분화시키고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거부반응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2005년 3월 10일, 성체줄기세포의 부족한 양(量), 즉 배양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도 마련됐다. 서울대병원 김효수 박사팀이 성체줄기세포에 유전자 조작법을 가미, 성체줄기세포의 생존과 증식기능을 향상시킨 것. 연구팀은 세포가 생존하고 증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지에스케이(GSK)-3’ 유전자의 활성을 억제한 인간의 성체줄기세포를 쥐 40마리의 혈관에 투입했다. 실험결과, 기존에 필요한 성체줄기세포의 20분의 1만으로 3~4배의 혈관 재생효과가 나타났다. 줄기세포의 치료기능을 3~4배 끌어올림으로서 양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나게 하는 연구 성과였다.
이에 앞선 2004년 10월 조선대학병원 물리치료센터. 한 아주머니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는 20년여 동안 하반신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다시 걷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20년 이상 느낄 수 없었던 다리로부터 ‘느낌’이 생겨나서다.
조선대 연구진은 탯줄혈액으로부터 뽑아 낸 성체 줄기세포치료를 그의 척수에 이식, 운동신경과 감각을 되살려냈다. 이 치료법을 실용화하기까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임상(대중화하기 전의 적용)실험단계에 진입할 정도로 연구 발전 속도가 눈부시다. 물론 조선대 연구진의 성과가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으로 인해 감각이 되살아났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 남아 있다.
어찌됐든 성체 줄기세포의 가치와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배아 줄기세포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씨앗(배아)을 잘 다뤄 만병통치수단으로 만들어보자’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연구목표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황우석 교수가 인간 배아 줄기세포 복제․배양에 성공하면서 당뇨병, 심장병, 알츠하이머병, 암, 파킨슨병 등 인류를 위협하는 난치병 극복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추세다. 황 교수가 스타과학자로 떠오르면서 더욱 각광받는 측면도 있다.
과학자들은 최대한 생명복제 윤리문제의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배아 줄기세포주(株)’에 주목한다. 일반 세포는 보통 10번 정도 분열하면 분열이 정지된다. 반면 줄기세포 주는 무한정 분열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세포다. 때문에 특정 장기나 조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는 배아 줄기세포주, 암과 같은 질병세포의 세포 주 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자체가 특허대상이다. 또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2001년 8월 이전까지 미국에서 배아 줄기세포주 60개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추출 및 배양)에서 배아가 파괴됐다. 미 연방정부는 2001년 8월부터 기존에 생산한 60개 배아 줄기세포에 대해서만 연구를 허용했다.
특히 2004년 11월,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부정적인 정책을 유지해온 부시가 연임에 성공하면서 미국 내에서 새로운 배아와 줄기세포주를 만들기 어려울 전망이다.
2004년 기준으로 세계 각국이 확보한 인간 배아 줄기세포주는 약 200종. 국내에서도 약 35종이 확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즈메디병원 의과학연구소 줄기세포연구팀(책임자 윤현수 박사)도 인간 배아 줄기세포 주 17종을 확보했다. 연구팀은 배아 줄기세포주의 대량 생산, 저장, 유통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윤현수 박사팀은 △무한대로 증식할 수 있고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종류의 기능성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효율적으로 증식하기 위한 기반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2004년 개발을 완료해 브랜드화한 인간 배아 줄기세포주인 ‘Miz-hES1’를 국내 37개 연구팀과 해외 7개 연구팀에 분양했으며, 앞으로 대량 생산·보존·유통 기술을 확보해 세계 생명공학 연구팀들에게 공급할 계획이다.
미즈메디 의과학연구소는 외국으로 분양하는 인간 배아 줄기세포 주 1개 앰플당 6000달러 선에 공급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1년에 200개 이상의 앰플을 분양할 수 있는 준비(냉동보관)를 마쳤으며 피츠버그대학, 하버드대학, 록펠러연구소, 존스홉킨스대학 등과의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정부(과학기술부)도 2004년 9월까지 국내에서 37개 줄기세포주를 확립했으며 86개 기관에 5만5676건이 분양됐다고 발표했다. 2004년 한 해(9월까지)에만도 28개 기관에 7090건의 분양이 이루어졌다.
#2. 슈퍼맨의 죽음
“줄기세포는 이미 동물의 마비증세를 치유했습니다. 줄기세포는 의학의 미래입니다. (美 유권자들에게)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해주세요.”
80년대 미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영화 ‘슈퍼맨’의 히어로인 크리스토퍼 리브가 사망하기 1주일 전인 2004년 10월 초, TV 공익광고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해 11월 美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줄기세포 연구에 긍정적인 정책을 견지하는 민주당을 지지, 줄기세포 연구 허용 여부를 이슈로 만들었다.
리브는 말을 타다가 떨어져 척추를 다쳤고 무려 9년 6개월간 목 아래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줄기차게 미 연방정부의 줄기세포 연구 허용 및 지원을 촉구했다. 그러나 리브는 미 정부의 정책방향이 바뀌는 것을 보지 못한 채 2004년 10월 10일 쉰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리브의 죽음으로 같은 해 11월 치러진 존 케리와 조지 부시의 미 대통령 선거전에서 줄기세포 연구 허용문제가 논쟁거리의 하나로 떠올랐다.
특히 리브의 미망인(대너 리브)이 존 케리와 함께 유세장에 등장,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조지 부시 대신 케리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부시는 2001년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연방세금을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주의 유권자들을 묶어두려 했다.
크리스토퍼 리브의 공익광고를 통해 언급된 ‘동물에서의 마비증세 치유’는 황우석 교수가 해낸 성과다. 황 교수는 건강한 개에게 척추마비증상을 일으킨 후 그 개에게서 추출한 배아 줄기세포를 이용해 ‘개가 다시 걷는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났다고 밝힌 바 있다. 황 교수는 이를 통해 “인간 배아 줄기세포 복제에 의한 치료술 개발이 가능하다”는 일관된 주장을 펴왔다.
황 교수는 크리스토퍼 리브가 사망하기 전에 “곧 슈퍼맨(황 교수는 리브의 상징성에 주목한 탓인지 실명보다 캐릭터 명을 주로 사용했다)을 만나기로 했고,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리브의 죽음으로 황 교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황 교수의 연구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황 교수는 연구 파트너인 문신용 교수, 미즈메디병원 관계자 등과 함께 2004년 10월 20일 미국에서 열린 ‘인간복제금지협약을 위한 유엔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연구팀은 기자회견을 열고 “(생명윤리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마련될 깨까지 연구를 잠정 중단한다”고 했던 2004년 2월의 발표를 접고, “세계 불치병 환자들의 희망을 위해 연구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유엔회의에서는 배아복제를 포함한 인간복제 금지를 주장하는 코스타리카 안과 치료 목적의 배아복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벨기에 안이 첨예하게 맞닥뜨렸다. 이 같은 국제사회의 격론은 3년 째 이어졌던 것으로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였다. 국가마다 생명공학기술(BT) 발전속도, 사회문화적 배경 등이 서로 달라 복제연구를 둘러싼 태도가 천차만별이었던 것. 때문에 유엔회의를 통한 복제금지 관련 국제협약이 만들어지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과학자들의 예측이다. 결국 국가마다의 기준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적극 장려하고 있다.
2005년 1월 12일, 보건복지부가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2005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따라 황우석 연구팀의 줄기세포 연구를 공식 승인했다. 이상했다. 생명 윤리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이 오히려 생명 윤리와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연구를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목소리는 힘을 얻지 못했다. 연구가 성공할 경우 수백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이는 세포치료시장을 선점해 국가 성장 동력으로 만들 수 있다는 논리와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생명윤리와 안전에 대한 걱정이 힘을 쓰지 못하고 휩쓸린 꼴이었다.
그러나...... 2005년 3월 8일, 유엔(UN) 총회에서 ‘치료 목적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금지’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줄기세포 연구 전면 금지안’에 대한 투표결과가 찬성 84개국, 반대 34개국, 기권 37개국으로 압도적이었다. 난치·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줄기세포 연구의 소중한 가치보다는 인간 개체의 복제가 실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선 결과로 풀이된다.
이날 치료 목적의 줄기세포 연구를 장려해온 영국의 유엔 주재 대사인 존스 페리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고 결의안을 폄훼했다. “영국은 치료 목적의 인간 복제연구를 계속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유엔의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종교계, 환경시민단체, 학자들의 줄기세포 연구 비판에 힘을 실어줄 재료로 활용될 뿐이다.
유엔 주재 한국대표부의 하찬호 공사도 이날 “인간 복제를 위한 연구는 당연히 배척한다. 하지만 치료 목적의 줄기세포 연구는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라며 “한국은 관련 연구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05년 3월 31일, 주목할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진교훈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를 비롯한 11명이 정부가 만든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 조항 중 일부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낸 것.
소장에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이 인간배아를 생명공학 연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주장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불임 치료를 목적으로 인공 수정해 냉동보관상태인 남, 김 씨 성을 가진 배아 2명 혹은 2개(?)가 원고에 포함돼 더욱 눈길을 끌었다. 배아가 소중한 생명체라는 웅변이었다. 2005년 1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이 본격 시행되고, 황우석 박사의 인간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법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기 시작한 뒤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사건(헌법소원)이었다.
그러나 황우석 신드롬 때문이었을까. 대부분의 언론은 헌법소원 사실을 외면하거나 크게 다루지 않았다.
며칠 뒤(2005년 4월 6일), 세계 첫 포유류 복제동물인 ‘돌리’를 만들어낸 영국 로슬린연구소의 이언 윌머트(Ian Wilmut) 박사가 서울대학교 강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우석 박사가 윌머트 박사를 초청, 공동 연구 등에 관한 비전을 논의했다. 윌머트 교수 연구진이 루게릭병 환자 체세포와 임상연구기법을 제공하면, 황 교수팀이 줄기세포 추출기술로 화답해 배아줄기세포를 함께 배양하는 형태의 공동 연구법이 예고되기도 했다.
생명 복제 및 세포치료 연구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두 명의 과학자가 만났기에 거의 모든 언론이 관심을 표명했다. 이튿날 거의 모든 언론에 기사가 게재된 것은 당연한(?) 수순.
언론은 ‘독자의 관심이 무엇이냐’에 집착한다. 그 관심이 너무 한 쪽으로 기울었다. 날이 갈수록 더욱 기울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3. 인간복제 블루프린트
2014년‘께’ 어느 날 황우석 교수가 강원래 씨의 귀에서 체세포를 떼어낸다. 황 교수는 기증받아 놓았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후 강 씨의 체세포 핵을 이식한다. 이후 체세포 핵을 난자세포질과 융합해 수정란처럼 만든다. 인간 유전 정보가 핵에 집중된다고 봤을 때, 만들어진 수정란은 강 씨의 일부, 즉 복제물(?)이다. 황 교수는 수정란으로부터 배아가 발달하자 줄기세포를 추출해 배양한다. 배양된 줄기세포에 특별한 신호(아직 확립되지 못한 기술)를 줘 신경세포로 분화·발달시킨다. 강 씨의 손상된 척추 부위에 투입한다. 며칠 혹은 몇 달 뒤, 강원래 씨는 다시 걷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황우석 교수의 연구목표다. 정보통신부가 2005년 2월 발행한 우표에 담긴 형상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은 ‘치료 목적’이라는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 자체에 대한 복제 가능성에까지 훌쩍 앞서간다. 특히 종교계의 시각은 단호하다. 치료 목적의 인간 배아 복제까지도 ‘신에 대한 도발’로 여기고, 이를 원천봉쇄할 의지를 불태운다.
그런데 황 교수의 인간복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단호하다.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복제를 위해 필요한 수많은 대리모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으며 복제된 개체는 정상일 가능성보다는 기형일 가능성이 더 높은 부작용이 있다. 인간복제가 과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앞선 2002년 4월에는 “인간복제는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학문도, 기술도 아니다. (중략) 인간복제 시도를 과학적 소영웅주의로만 취급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자로서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범죄행위라고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과연 황 교수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영웅’인가. 그의 말처럼 ‘다만 불치·난치 환자들을 위해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과학자일 뿐’인가.
2004년 10월 29일 철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페터 슬로터다이크(독일 칼스루에 조형대학 총장)가 한국철학회의 다산기념철학강좌 연사로 초청받아 서울에 왔다.
슬로터다이크 총장은 “유전공학을 통한 인간 선별이 요즘 나타난 특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자연은 천재지변과 돌연변이 등으로 인간의 왜곡, 변형에 관여해왔으며 인간도 유전자를 섞는 결혼제도 등을 통해 이 같은 조작에 참여해온 만큼 생명공학에서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배아복제와 관련해 종교계에선 수정 이전의 줄기세포 단계에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해야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치한 생각이다. 심지어 인간의 유전병까지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은 고통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서양의 형이상학 체계에서 비롯된 존재론적으로 자학적인 발상”이라고 덧붙였다.
슬로터다이크 총장의 발언은 황우석 교수와 황 교수를 믿는(?) 한국 정부에 큰 힘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생명윤리 논쟁과 인간 복제 걱정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무엇보다 황 교수의 연구가 체세포를 복제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의 신체에서 떼어낸 세포를 핵을 제거한 난자에 삽입해 배양하는 행위가 인간 복제의 전형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황 교수는 “체세포를 복제한다고 하더라도 태반이 될 영양막과 개체로 자라날 세포 덩어리를 분리해 실험하기 때문에 배아가 태아로 발달하고 복제인간이 탄생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계 곳곳의 생명공학 연구자들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고, 과학자의 개인적 호기심이나 잘못된 욕심까지 다독거려가며 ‘개체로 자라날 세포 덩어리에 손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궁극적으로 핵치환기술을 통해 생식세포만을 만들어내는 행위와 체세포만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복제해내는 행위 사이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특히 과학자의 지적 호기심과 의욕 앞에서는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경계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예 2000년 8월 연구발표회에 나온 황우석 교수의 바로 옆자리로 시간과 공간을 되돌려보자. 당시 황 교수는 “서른여섯 살의 한국인 남성에게서 채취한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실험을 통해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하는데 성공했고, 이 기술을 (2000년) 6월 30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15개 국가에 특허를 출원했다”고 발표했다.
인간복제에 대한 뚜렷한 윤리적 기준을 가진 황우석 교수는 배반포 이후의 ‘복제 인간 만들기’에까지 연구를 진척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방법을 활용해 세계의 눈과 귀를 끌고 싶어 할 과학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황우석 교수는 체세포 복제실험에 사용한 난자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바 없으나 사람의 난자가 아닌 동물의 난자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년쯤 뒤,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는 소의 난자에 인간의 체세포를 넣어 체세포 배아복제를 시도했다고 발표했다. 이종(異種)간 핵치환, 말하자면 소와 인간을 섞어본 것. 당시 박세필 박사는 “치료용 배아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인간배아복제가 허용될 경우 기초기술이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 수많은 난자들이 ‘실험용을 허비될 수’ 있으며 이러한 낭비를 막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소 난자를 이용한 실험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실험실 안에서는 다양한 방법과 수많은 횟수로 인간복제배아 만들어 보기가 이루어진다. 1996년 7월 영국 로슬린연구소와 피피엘(PPL) 세러퓨틱스社가 세계 첫 복제 포유류 동물(양)인 ‘돌리’를 만들어낸 뒤, 인간복제 매뉴얼이 만들어진 셈이다. 일정한 시설만 갖춘다면 복제하려는 개체(인간)로부터 체세포를 떼어내 핵을 뽑아낸 다음, 미리 핵을 없애놓은 난자에 넣어 전기·화학적 충격을 줘 수정란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 이후로는 대리모를 찾아 자궁에 이식한 후 9개월 정도를 기다리면 유전자가 똑같은 인간이 태어날 것이다.
인간 생명의 씨앗(배아)를 이렇게도 만들어 보고, 저렇게도 만들어 보는 것 자체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명확하게 세울 필요가 있겠다.
1998년 사를로테 케르너가 출간한 소설 ‘블루프린트’는 섬뜩하다. 그저 한 이야기꾼(소설가)의 흥미롭고 기발한 상상력이 빚어낸 소설로만 평가 절하할 수 없다. 진지한 고민이 농축되어 있어서다.
작가는 ‘블루프린트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책이다’라고 했다. 그는 ‘인간 개체 복제로부터 발생하는 개인적 사회적 윤리문제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기했다. 또 ‘윤리에 대한 용기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경우마다 논의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케르너가 1998년 9월 독일 뤼벡에서 소설을 완성했을 때만해도 인간복제에 대한 염려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 자체가 공상과학영화에나 등장할 먼 이야기 거리로 치부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년 여 만에 상황은 달라졌다. 배아복제를 포함하는 인간복제 금지 여부가 국제사회(유엔)의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케르너는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지식과 다년간의 취재를 바탕으로 ‘블루프린트’를 독자 앞에 내놓았다. 독자들은 전율했을 것이다. 인간복제를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로 받아들이는 일반인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어서다. 물론 인간을 복제하려면 세포를 복제한 후 자궁에 착상시키는 작업의 성공률이 희박해 수많은 배아를 파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 대한 윤리적 책임도 져야 한다.
케르너는 인간 복제의 현실화를 전제로 해 소설을 썼다. 더구나 ‘자기를 복제하는 것’부터 가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뜻밖에도 ‘충격’에서 ‘조화’로 나아간다. ‘탄생’, ‘조화’, ‘이중주’로 이어지는 이야기 흐름 안에 살아 숨쉬는 인간인 ‘이리스(Iris)’와 그를 복제해 탄생한 생명인 ‘시리(Siri)’의 조화로운 삶이 흥미롭다. 그들의 이름도 서로를 뒤집어 놓아 쉽게 이중주를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함을 심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따뜻하지는 않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차갑다. 무엇보다 이리스와 시리의 조화로운 ‘나는 너, 너는 나’ 게임에 소름마저 돋운다.
소설 속 이리스는 불치의 병 앞에서 복제를 선택한다. 그것도 자신을 복제한 시리를 자신의 자궁에 착상하고, 낳고 키우며, 자신과 똑같은 생각과 능력을 복사하듯 주입하려 한다.
과연 이리스와 시리는 같은 사람인과 서로 다른 사람인가. 이것이 케르너가 대중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엄마는 나무의 줄기였고, 나는 봄날 피어나는 엄마의 작은 가지, 혹은 초록빛 새싹이었어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클론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였지요. 클론은 식물의 가지치기나 단세포 생물의 분열처럼 무성생식을 통해 생성된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모든 후손들을 일컫는 말이었어요. (중략) 결국엔 엄마와 나 같은 존재, 즉 동일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인간들도 클론이라는 말로 불리게 된 것이에요.
소설 속 시리의 독백이다. 인간의 무성생식이 가능한 시대. 동성애 부부의 자녀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도 쌍둥이든 세쌍둥이든 선택하기 나름으로......
케르너는 청소년기로 접어든 시리의 자아(自我)찾기를 통해 시리를 새로운 인격체로 만들고 이리스로부터 독립시킨다. 복제인간 시리를 사회, 문명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여 ‘공존하는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작업이 옳은지 그른지는 사회의 ‘논쟁거리’로 돌려놓았다.
이제 왜 소설의 제목이 ‘블루프린트’여야 했는지 느낌이 온다. 인간과 복제인간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블루프린트)를 펼쳐놓은 것이다.
시리의 홀로서기는 과격하게 전개된다. 한 사람을 둘로 나눠 새 삶을 불어넣고 공존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니 오죽 과격할까.
케르너는 이리스를 상징하는 그랜드피아노 앞에서 시리를 끌어낸다. 그리고는 ‘쌍둥이의 섬(이리스의 집)’에서 탈출시키고 미술대학에 보냈다. 이리스와 시리 사이에 형성된 복제의 고리, 즉 ‘하나 아닌 하나’를 ‘둘’로 깨뜨렸다. 그것도 성공한 성악가 이리스, 미술가로 도전하는 시리라는 식으로 치열한 분리작업을 시도했다.
이후 소설은 10년 후다. 소설의 대단원인 ‘홀로 남은 폴록스-10년 후’에 인간 복제가 가져올 청사진이 오롯이 담겼다.
나는 이제 서른 한 살이 되었다. 이리스가 나를 가졌을 때와 똑같은 나이다. (중략) 나는 당시의 이리스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청사진으로서가 아니라 마침내 ‘나’가 될 수 있었다.
소설의 대단원인 ‘홀로 남은 폴록스-10년 후’의 세상은 시리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인간 복제가 지극히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시리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 이상의 복제자녀 234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복제로 태어난 아이들의 자살 수치가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단지 1%에 불과한 차이를 보였다는 식이다. 이어 복제된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공격빈도가 아주 높게 나타났고 234명 중 30명이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살해했거나 시도한 사실을 유죄로 판결 받았다고 엮어냈다. 특히 복제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복제인간의 근친살해행위에 대한 형량을 줄이는 특수한 상황으로 참작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다. 너무 지나친 상상이어서 그저 웃어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 없게 발목이 잡히는 느낌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모든 유전자에 대한 지도가 그려지고, 그 비밀(메커니즘)이 해독될 것이다. 가늠키 어려울 속도로 발전하는 정보기술(IT)이 생명공학기술(BT)의 발전에도 속도를 붙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완전하게 정복해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게 되는 날부터, 인간 복제는 현실의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나(시리)는 열두 살에 초경을 경험했다. 그날 이리스와 나는 샴페인을 터뜨리면서 내가 이제 진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축하했다. “그래도 넌 나의 삶이야.” 이리스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리스의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물었다. 하지만 나의 삶은, 도대체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 거지?
만일 인간복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온다면...... 가치관, 철학, 윤리 기준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복제한 새 생명체를 별개의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와 함께 잘 살아갈 수 있겠는가.
2장 돼지, 꿈의 돼지
“이야~ 돼지 몸에서 심장, 위, 췌장, 폐, 간 같은 걸 꺼내 쓸 날이 오긴 오려나 보네! 그야말로 복 돼지, 아니 꿈의 돼지다.”
“......그러게.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
“뭐야, 생각보다 반응이 신통치 않네.”
“응, 뭐, 원래 꿈이란 게 이루어지기 힘든 거잖아. 나중에 보면 기대했던 것보다 못한 경우가 많기도 하고......”
“하긴...... 그런데 3년쯤 후 사람 몸에 돼지에서 꺼낸 췌도를 이식하는 수술이 가능할 거라잖아. 그러면 당장 당뇨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네. 여기, 기사에 났어. 10년 뒤에는 인간에 대한 장기이식이 가능할 걸로 예상된다고 하네. 3년, 10년, 그다지 멀지 않잖아?”
“정확하게는 3년쯤 후부터 돼지에게서 ‘균(菌)이 없는 돼지’ 몸에서 인슐린 분비 세포(췌도)를 꺼내 이식해보겠다는 거지. 너무 성급하게 심장, 위, 췌장, 폐, 간 같은 장기를 옮겨다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진 말아야 할거다.”
“.......?”
“왜 3년, 10년 후에 된다는 얘기에만 눈길을 주냐? 그 앞에 ‘면역거부반응만 막는다면’이라고 전제조건이 달려 있잖아. 면역거부반응이라는 게 험난하고 끝 모를 첩첩산중 난제중의 난제다.”
“에이~ 너무 비관적이다. 과학자들이 바보냐. 그 전에 (면역거부반응을) 해결하겠지.”
“....... 그러게.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 하지만 10년쯤 후라고 해서 ‘어, 내 심장이 좋지 않은 것 같네’라며 병원을 찾아가 돼지 심장을 달고 돌아올 수는 없을 거다.”
#1. 인간의 조건을 갖춘 돼지.
돼지가 인간을 위해 몸 안에서 균(菌)을 없앴다. 정확하게는 과학자들이 무균(無菌) 돼지를 만들었다.
왜? 돼지 몸 안에서 장기를 생산(이렇게 표현하는 과학자가 많다)해 사람에게 이식하기 위해서다. 돼지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려면 완전 무균 상태로 10년 이상 세대를 이어온 돼지가 필요하다. 보통 돼지에게 존재하는 미생물, 세균 등이 인간에게 옮겨져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내는 불행을 막아야 하기 때문.
황우석 교수팀은 가존 무균 돼지의 세포에 사람의 면역유전자를 주입한 후 대리모(돼지)의 자궁 나팔관에 착상시킨 후 무균 복제돼지를 만들었다. 무균 복제돼지의 몸 안 환경을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 인간이 쓸 장기를 생산할 공장으로 삼겠다는 것.
‘인간의 조건’을 갖춘 돼지...... 말하기는 쉽지만, 그 과정은 험난하고, 험난하다. 우선 세계적으로 무균 돼지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듯 힘들다. 무균 돼지를 구했다손 치더라도 무균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바깥 공기에 아주 조금, 아주 잠깐이라도 노출되면 공든 탑이 무너진다.
“무균 미니화한 돼지를 처음부터 개발하려면 최소 40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 시카고 대학 김윤범 교수께서 무균 미니돼지를 제공받았습니다.”
2002년 12월 26일 김윤범 교수는 서울에서 열린 학술대회 참석차 내한, 황우석 교수에게 “무균 미니돼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1960년대부터 40년여 간 면역체계 연구를 위해 무균 미니돼지를 개발한 인물. 황 교수팀에게는 40년간의 연구성과를 거저 얻는 셈이었다.
이듬해 3월 황 교수팀은 무균 미니돼지를 얻기 위해 시카고로 갔다. 하지만 돼지를 한국에 들여오려면, 한 마리당 약 5000만원의 운반비용이 필요했다. 이는 무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 비용이었다. 당시 김윤범 교수로부터 세 마리를 기증받기로 했기 때문에 총 1억5000만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황 교수팀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또 돼지를 통째로 들여오기 위한 한국과 미국의 통관절차가 복잡했다. 할 수 없이 무균 미니돼지 체세포 9개를 냉동용기에 담아 국내로 들여왔다. 황 교수팀은 그간의 세포복제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무균 미니돼지를 복제했다.
2003년 말, 마침내 복제한 무균 미니돼지가 탄생했다. 연구팀은 무균 미니돼지 체세포를 복제하면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항체와 맞닥뜨리더라도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인간 유전자를 무균 돼지 체세포에 미리 주입한 것이다. 복제 및 유전자 조작을 거친체세포를 대리모(돼지) 자궁에 착상, 돼지가 인간 장기 생산도구로 거듭나기 위한 첫 걸음을 뗐다.
이후 마리 수를 늘리기 위한 노력이 전개됐다. 그러나 세포 9개로 시작했기 때문에 근친교배로 인한 다양성 한계에 봉착했다. 다양성 한계가 연구 자체를 중단케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어찌됐든 돼지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각종 거부반응, 돼지 병원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돼지의 장기가 개에게로, 다른 돼지에게로 옮겨지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2004년 11월, 황 교수팀은 정부 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무균 미니돼지 23마리를 들여왔다. 연구에 탄력이 붙었다.
꼭 돼지여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크기(몸집)가 사람과 비슷하고,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아 사람에게 해가 되는 감염원이 적기 때문. 몸집이 비슷하니 장기 크기도 비슷할 것이고, 감염원이 적으니 상대적으로 걱정해야 할 변수들이 적을 것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돼지 심장은 크기와 위치, 주변 혈관 모양이 사람과 비슷하다. 또 잘 자라고 새끼를 많이 낳으며 사육비도 적게 드니 투자대비 생산성(?)도 좋다. 그런데 돼지는 대략 6개월 15일 정도 자라면 성돈(成豚)이 된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성돈은 200킬로그램 이상, 무려 350킬로그램까지 체중이 불어난다. 이렇게 체중이 늘어나면 장기도 커지기 마련. 예를 들어 돼지의 간의 2년간 5배로 커진다. 결국 성돈의 장기 그대로를 사람에게 이식할 수 없다는 얘기. 그래서 사람 평균 체중에 가까운 80~100킬로그램짜리 ‘미니’돼지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돼지의 성장 유전자를 조절했다.
2004년 12월 황 교수는 “돼지 한 마리에서 꺼내 쓸 수 있는 장기로는 췌장, 신장, 심장, 폐장, 위, 간장 등 6개 정도가 될 것”라며 “최근 네 마리의 건강한 무균돼지가 새로 태어났으니 4 곱하기 6, 즉 24명의 환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돼지로부터 장기를 얻으려는 이유는 뭘까.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고통 때문. 미국에서는 연간 평균 4337명이 심장 이식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둔다. 이 중 2340명 정도가 심장을 이식받고, 약 767명이 이식을 기다리는 도중에 사망한다. 신장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매년 4만2415명이 이식을 기다리는데 1만1990명 정도만 자신에게 맞는 신장을 이식받을 수 있다. 간은 1만3559명, 폐는 3352명이 기다리고 각각 4450명, 849명만이 혜택(?)을 누린다.
우리나라에서도 2001년 한 해 동안 134명이 심장이식을 기다렸지만 단 21명만이 웃을 수 있었다. 3262명이 신장 이식을, 944명이 간 이식을 기다리다가 각각 848명, 391명이 새로운 장기를 얻었다. 폐의 경우에는 51명의 환자가 고통스러웠지만 아예 한 건의 이식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환자들의 기다림은 기약이 없다. 박애주의자(장기 기증자)들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증자가 나타났다손 치더라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면역체계가 비슷할 확률이 낮기 때문. 그래서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 부모 등으로부터 장기를 이식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장, 간과 같은 장기는 그나마 수월(?)하다. 신장은 두 개여서 하나를 떼어낼 수 있고, 간은 재생력을 가져 일부를 떼어내더라도 복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장의 경우에는 일부를 떼어낼 수 없어 그야말로 학수고대(鶴首苦待)다. 환자들의 갈망은 무균 돼지에게로 성큼, 성큼, 옮겨가고 있다.
2004년 12월 28일 오후 서울대학교 의대 임상의학연구소 수술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매와 몸가짐에 팽팽한 긴장이 서렸다. 그들은 몸무게 5킬로그램짜리 아기 돼지로부터 심장을 꺼내 10킬로그램짜리 돼지의 배 안 혈관에 연결하는 수술을 감행했다.
3시간째 팽팽히 서린 긴장의 끈이 유지됐다. 열 명 정도의 수술진을 이끈 이는 서울의대 흉부외과 이정렬 교수. 그는 황우석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나라 제1 칼잡이’다. 한 치의 오차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전문가다.
이날 심장을 이식받은 10킬로그램짜리 돼지는 짧은 순간이지만 몸 안에 심장 두 개를 달고 있었다. 수술은 이식한 작은 심장이 원래의 심장을 보조하는 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식한 심장이 뛰었다! 물론 잠시였다.
연구팀은 사람에게 이식할 돼지 장기도 처음에는 원래의 장기를 보조하는 기능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서울대 연구팀은 돼지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개에게로 장기를 이식하는 수술을 반복하고 있다. 돼지 장기를 다른 종(種), 특히 인간에게 이식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점검하기 위한 실험(수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연구팀은 2005년 중에 몸무게 13~20킬로그램 정도인 3~4세 바분(Baboon) 원숭이에게 돼지 장기를 옮겨볼 계획이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에 대한 장기 이식 수술은 처음 시도되는 것. 이를 통해 이종(異種), 특히 인간에 유용한 장기 이식시대가 한층 가까워질 전망이다. 연구팀은 바분 원숭이 실험을 발판으로 삼아 2007년~2008년쯤 무균 돼지의 췌도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수술을 시도할 예정이다.
#3. 면역거부반응 억제, 자연(自然)에 도전하기.
면역거부반응만 없앤다면......
면역거부반응은 사람을 비롯한 생물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기본 질서다. ‘살아가는 것’ 그 자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학자들이 그 기본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우리 몸에는 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면역체계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항체입니다. 항체란 인체에 들어온 해로운 물질이 우리 몸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덮어씌워서 무력화시키는 물질을 말합니다. 체내에 들어온 병원균은 무엇이든 체내의 물질과 결합해야만 살아남아 병을 일으킵니다. 항체는 이 병원균의 겉을 촘촘히 감싸게 되는데, 이렇게 잘 싸인 병원균은 먹기 좋은 당의정과 같아져 킬러세포가 이들을 쉽게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원래 항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질 중 몸에 해롭다고 판단된 것들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없애버리는 임무를 띠고 진화해왔습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는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질을 ‘적(敵)’으로 여긴다. 가만 놔두지 않고 공격해 죽인다. 이 같은 거부반응은 생명까지 위협한다. 그래서 장기를 이식하기 전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유전적 형질을 세심히 검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면역거부반응이라는 게 생각보다 더 무섭다. 엄마가 아기(태아) 사이에도 면역 전쟁(?)이 일어난다. 아기는 아빠와 엄마의 유전적 형질이 절반씩 섞여 새로운 유전자로 만들어진다. 아기(수정란)가 엄마 뱃속 자궁벽에 착상할 때, 엄마의 면역체계는 아빠가 아기에게 준 절반의 유전 형질을 ‘생소한 물질’로 인식한다. 이 때부터 아기는 엄마의 면역거부반응에 대항해가며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듯 냉혹한(?) 면역거부반응을 피하기 위해 엄마와 아기 사이에는 ‘태반’이라는 완충지대가 만들어진다. 태반은 엄마의 혈액이 직접 아기와 만나지 않도록 막아주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만일 태반이 없다면, 엄마와 아기는 끝없는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하물며 이종(異種) 간 장기 이식과정에서 발생할 몸 속 전쟁은......
장기 이식 수술은 크게 네 가지. 우선 자기 장기를 자기에게 이식하는 경우로 면역거부반응을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신장 동맥이 막혀 ‘신(腎)혈관성 고혈압’에 고통 받는 환자의 신장 동맥을 잘라낸 후 하복부 장골와(腸骨窩)에 연결(이식)하는 경우다.(신장은 본래 늑골과 골반 사이 허리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일란성 쌍둥이, 형제자매처럼 장기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가족 관계여서 유전자형이 같은 경우가 있다. 역시 거부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면역 문제가 골칫거리로 등장하는 것은 가족 관계를 맺지 않은 타인으로부터 장기를 받는 사례부터. 현재 가장 일반화된 장기 이식법이다. 같은 종(種-사람과 사람)이지만 사람마다 유전자형이 달라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면역억제시술이 필수적이다. 무엇보다 장기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유전자형 차이를 가능한 한 작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 이를 ‘조직 적합성 검사’라고 부른다. 장기를 받는 사람의 몸을 ‘면역학적 무반응상태’로 만드는 것도 조건의 하나다. 예를 들어 골수성 백혈병 환자가 타인의 골수를 이식받으려면 수차례에 걸친 항암치료를 통해 몸 안의 면역체계를 백지상태에 가깝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시클로시포린 에이(Cyclosporine A), 케이에프(KF)506, 엠엠에프(MMF) 등 장기 이식 거부반응 억제제가 사용되고 있다.
1993년 미국에서 세계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수술이 이루어졌다. 원숭이로부터 골수와 간을 꺼내 예순두 살의 남성에게 이식했던 것. 과학자들은 당시 존재하는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환자의 면역거부반응을 막아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한 달을 버텨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이후로 최근까지 이종장기 이식은 ‘아직은 할 수 없는 일’로, ‘더 많은 시간과 연구가 필요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세상에는 ‘이식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는 환자들이 많다. 그래서 이종(異種)이식이 미래 치료법으로 각광받는 추세다. 그러나 이종이식을 대중화하기까지는 여전히 면역거부반응의 벽이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바로 과학자들이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장벽이다.
2005년 2월 16일 서울 정동 배재빌딩, 주목할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과학자들은 ‘바이오 장기의 현황과 윤리․사회적 함의’를 주제로 머리를 맞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식용 장기가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기 때문에 이종장기가 대안이 될 수 있으나 면역거부반응, 새로운 병원체의 감염 등 안전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욱 한양대 교수(과학철학)는 세미나 주제발표를 통해 “그동안 이룬 이종장기 연구결과들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 사람 몸에 이식된 동물장기가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변형 병원체의 감염문제가 가장 크게 우려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장기이식용 돼지를 무균상태에서 기른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알지 못하는 병원체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특히 1997년 (현존하는 과학기술과 의료기술로는) 제거할 수 없는 내인성 레트로 바이러스가 무균돼지에게서 발견돼 사람의 세포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서울대 연구진과 의료진도 “(돼지의 심장을 사람에게 이식하려면) 면역반응이 복잡해 10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늘 ‘면역거부반응 극복에 대한 조심스럽고 겸허한 연구진의 자세’보다는 ‘10년쯤 후 이종장기이식에 성공하면 연간 약 600억달러에 달하는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데로 기운다는 점이다. 더욱 조심스런 예상과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10년이나 20년쯤 후 돼지 장기를 사람 몸에 안전하게 이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치자. 돼지 장기를 갖게 된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가늠키 어려운 문제다. 사람과 돼지는 엄연히 다른 존재(種)다. 과학자들이 면역거부반응을 막아냈다손 치더라도 영겁(永劫)의 세월 동안 서로 다른 형태로 진화해온 사람과 돼지를 완벽하게 섞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는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생리현상이 서로 다르다. 그 영겁의 차이와 자연적인 생리현상을 극복하는 것, 과학자들이 너무 벅찬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이종장기 이식연구의 실질적인 목표가 위독한 환자의 생명을 얼마간 연장하는 임시방편, 혹은 원래 장기를 보조하는 기능’이라는 현실적인 해석도 고개를 들고 있다. 보다 차분하고 냉철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자는 얘기다.
물론, 아주 당연히, 간절하게 과학기술자들이 인간 면역시스템의 비밀을 완전하게 풀어내기를...... 이종 장기 이식시대가 열리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4장 생명공학 보고서 2025
투명하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피어(Pier) 39 선착장의 살진 물범들을 꽤 오랫동안 내려다봤다. 아니, 피어 39 물범들이 ‘내가 이 곳 터줏대감입네’라는 듯 나를 흘깃거렸다.
샌프란시스코 가을 바닷바람은 여전히 상큼했다. 물론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20년 전인 2005년 무렵의 샌프란시스코만(灣)을 휘돌아 나가던 바람보다는 상큼함이 덜 하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 하나가 발걸음을 피어 39에 이르게 했다. 생명공학 보고서 2025! 좀 더 정확하게는 ‘생명공학 보고서 2025-한국을 중심으로’였다.
중앙정보국(CIA)은 왜 나에게 이런 골칫거리를 부탁했을까. 그들은 나의 오랜 서울 특파원 생활 중에 알게 됐거나, 느꼈던 점들을 편안하게 풀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중앙정보국의 광범위한 정보력과 직원(과학자)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보고서는 비웃음만 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피어 39를 떠나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를 향한 발걸음이 터벅, 터벅, 더 무거워졌다.
처음 제안(동영상 e메일)을 받았을 때에는 ‘하필, 중앙정보국이야’라는 생각에 곧바로 휴지통에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메일을 다 보고 난 뒤로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괘씸하다고도 느꼈다. ‘간절히 부탁한다’고는 못할망정 말투가 ‘생각 있으면 회신 주세요’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해보고픈 마음이 새록새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한국을 중심으로’일까. 한국 정부가 지난 20년 동안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로 선진 생명공학기술국가의 반열에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세계 생명공학산업의 주도권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틀어쥐고 있다. 오히려 1900년대 초 혼란(전쟁)을 틈타 인간 생체 실험을 했고, 이를 토대로 선진 생명공학기술국가로 올라선 일본이 더 위협적이지 않을까.
물론 2000년대 초 미국이 앞서가던 이종(異種)장기 생산용 무균 미니돼지산업의 주도권이 한국으로 옮겨가긴 했다. 2004년 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균 미니돼지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은 불의의 사고로 돼지들을 공기에 노출시켰다. 돼지들이 무균성질을 잃으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사이 한국 과학자들은 미국과의 격차를 벌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런 정도의 정보라면 중앙정보국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와 과학자들은 국제사회를 위협할 만한 불순한 의도를 가진 집단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중앙정보국이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고민을 접기로 했다. 오랜 서울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얻은 한국의 생명공학기술 현황을 편하게 풀어놓기로 했다. 한국 정부와 과학자들의 고민도 풀어놓을 생각이다. 한국의 생명공학기술 발전과 고민은 오늘날 인류가 맞닥뜨린 고민에 맞물려 있다. 나의 보고서는 곧 생명공학기술이 야기한 인류의 고민을 살펴보는 작업인 셈이다. 중앙정보국이 이 보고서로부터 가치 있는 낙수거리 정보를 찾아낼지 말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1. 무너진 기대, 지엠오(GMO)
2025년, 세계 인구가 79억 명으로 늘어났다. 어떤 이는 중국, 인도 등지의 인구 집계가 정확하지 못했다며 85억 명 정도로 추산했다.
과학자들은 2005년 무렵부터 20년 뒤 인류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쉼 없이 노력했다.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땀이었다. 당시, 중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가들의 역동적인 산업화로 인해 경작지 면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경작지도 맹독성 화학비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날로 피폐해졌다. 농업 정책 전문가들은 2025년쯤 세계인의 배를 불리려면 2005년도 생산량보다 30% 이상 증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 각국 관료들과 과학자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유전자변형생물체인 지엠오(GMO)로 눈을 돌렸고 적극적인 연구 지원을 펼쳤다.
2010년, 한국 과학자들은 결국 광우병 내성 소를 상품으로 만들어냈다. 한국 정부는 광우병 내성 소 수출을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지의 몇몇 국가를 주요 공략대상으로 삼아 적극적인 지원을 펼쳤다. 광우병 내성 쇠고기를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다시피 했다.
한국 정부와 과학자들은 “인류가 인간 광우병인 ‘변종 크로이펠츠-야콥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며 대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몇몇 선진국과 시민단체로부터 ‘배고픔에 고통 받는 사람들(국가)을 이용한 임상실험’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갖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광우병 내성 소 수출 진흥정책에 힘입어 2012년부터 몇몇 선진 국가에서 아주 적은 양의 광우병 내성 쇠고기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변화는 광우병 내성 소에 대한 신뢰의 결과라기보다는 ‘광우병 내성 소를 수입하는 대신 한국도 우리의 지엠오 제품을 더 많이 사라’는 국가 간 거래의 결과였다.
한국은 자국 내 시민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옥수수, 콩 등 선진 국가의 유전공학 전문기업들이 만들어놓았던 지엠오 식품들을 대거 수입했다. 그 대신에 광우병 내성 소 수출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나 2025년 현재, 광우병 내성 소에 대한 몇몇 선진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일부 선진 국가에서는 한국산 광우병 내성 쇠고기를 아예 일반 소비자들과 분리해 소화했다. 공공기관을 통해 거리를 떠도는 이(homeless)들에게 광우병 내성 쇠고기를 무료로 급식, 또 다른 인권 침해 논란을 불렀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소비자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광우병 내성 쇠고기를 전량 소각, 한국 정부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광우병 내성 소의 안전성을 입증하는 다양한 실험결과들이 발표됐지만, 소비자의 선택기준은 달랐다. 소비자들은 늘 ‘유전자를 변형하지 않았음(Non-GM)’ 표시를 확인한 뒤 쇠고기를 구입했다. 자연스럽게 한국산 광우병 내성 쇠고기의 판매가격이 폭락했다. 광우병 내성 쇠고기로 스테이크를 조리해 판매한 유명 레스토랑이 문을 닫기도 했다. 광우병 내성 소 관련 제품의 수입을 중단하라는 소비자 단체와 환경단체들의 주장이 더욱 힘을 얻었다.
국가 간 무역 관계에 따라 광우병 내성 소 수입허가조치를 내렸다손 치더라도 선진국들의 전반적인 쇠고기 수입 검역체계는 한층 강화됐다. 이러한 추세는 소비자들에 의해 결정됐다. 드넓은 초원에 방목한 소로부터 생산된 질 좋고 안전한 고기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것. 가진 자는 안전한 고기를, 가난한 자는 광우병 내성 소를 먹는 상황이 나타났다. 사회 갈등으로 비화됐다. 결국 광우병 내성 쇠고기를 골칫거리로 여기는 국가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 과학자들은 광우병 내성 소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전개했다. 하지만 ‘위험하다’거나 ‘미심쩍다’는 세계 소비자들의 반응을 잠재우지 못했다. 특히 기존의 광우병 증세와는 다른 변종이 생겨나면서 한국 과학자들과 정부의 근심도 늘어만 갔다. 연구개발 투자금은 물론이고 몇몇 후진국에 대한 무상에 가까운 지원으로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한국 내 여론이 들끓게 되면서 한국 정부의 광우병 내성 소 지원정책도 시들해졌다.
또 광우병 내성 소가 자연생식(종족번식)능력이 없어 쇠고기 대량 생산체제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던 게 한국 정부에 자충수(自充手)가 됐다. 사실 광우병 내성 소를 인공수정하고 수많은 대리모(소)에 착상시킨 뒤 송아지로 키워내 전국 축산농가(畜産農家)에 공급하는 것 자체를 민간 기업체가 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적극적으로 광우병 내성 소 실용화를 지원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연구개발 단계에서부터 실용화, 해외 판매로 개척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한 정부 지원이 이루어졌고, 그 어느 순간에도 쉽게 발을 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국가 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버티며, 광우병 내성 소 판매시스템을 끌어안고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한국 정부는 첫 단추(연구개발 지원)를 잘못 꿴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수렁에 빠졌다.
지엠오들이 자연에 섞이면서 예상치 못했던 현상들도 속출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낮은 온도(냉해)와 물(홍수)에 강한 쌀을 만들어내 시베리아 등지에서 경작을 시작했지만, 뜻밖의 국지성 병충해들이 창궐해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막에서 견딜 수 있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를 개발했으나 거센 모래바람을 타고 빠르게 퍼지는 지구 사막화현상에 묻혀버렸다.
과학자들은 자연재해 내성이 강해진 작물들을 공격할 만큼 강해진 변종 병충해를 잡기 위해 새로운 연구를 시작해야만 했다. 쳇바퀴를 돌려야만 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던 다른 지엠오 제품들이 해가 지날수록 생산량이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 같은 조짐은 오래 전부터 조심스럽게 예고됐던 현상이었다. 양, 소, 염소, 황소 등 인간에 의한 이종교배 등으로 가축화된 동물들을 그들의 조상(야생동물)과 비교했을 때 몸 크기가 작고, 얼굴이 짧으며, 체지방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약 1만 2000년 전에 처음으로 길들이기 시작한 회색늑대 케이니스 루퍼스(Canis lupus)가 오늘날의 개(Canis familiaris)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개가 가축화된 이후로 뇌 크기가 약 400cc에서 250cc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이종교배는 너무나 극적인 효과를 내기 때문에 가축화된 동물들은 대부분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지엠오의 극적 효과는 이종교배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유전자 조작을 통해 품종을 개량한 옥수수, 콩 등이 대량으로 생산돼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갈 때만 해도 지엠오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병, 가뭄, 추위, 염분 등에 강한 식물들이 속속 태어나면서 기후, 강우량, 꽃가루를 옮겨줄 곤충 등에 따라 제한됐던 경작의 한계들이 조금씩 무너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극한 기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잔디, 나무 등을 이용해 국토의 사막화 현상을 얼마간 해결하는 성과를 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유전자 변형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자가 바라던 대로의 기능을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과학적 예측과 실제가 달랐던 것이다. 그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예상하지 못한 위험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 하나, 둘, 늘어났다. 중국 국토 사막화 현상을 막기 위해 개발된 지엠오들도 날로 예측하기 어려워지는 이상 기후현상 앞에 무력했다.
2025년 현재, 지엠오를 이용해 세계의 배고픔을 해결하겠다는 꿈은, 그저 꿈으로만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제 더 이상 “국가에 대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그 나라의 농업에 유용한 식물을 하나 더하는 것이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은 미덕이 아니다.
#2. 난제(難題), 이종장기이식
2010년부터 무균 미니돼지는 손상된 췌도를 가진 환자들에게 새 삶을 주기 시작했다. 특이한 체질을 가진 몇몇 환자가 급성 면역거부반응으로 유명을 달리하긴 했지만, 과학자들은 일반적인 당뇨환자들에게 새 췌도를 이식해줄 수 있었다. 이후 과학자들은 이종장기이식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적 형질을 갖도록 조작된 돼지로부터 심장, 간, 폐, 신장 등을 꺼내 사람 몸에 이식하려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연구 성과가 세계 도처에서 봇물을 이뤘다.
2015년, 한국 과학자들이 건강한(?) 무균 미니돼지로부터 꺼낸 이식용 심장을 들고 70대 남자 환자를 눕혀놓은 수술대 앞에 섰다. 세계 첫 이종장기이식 시도였다. 수술 대상자는 당시의 보편적인 의학기술로는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였다. 이미 죽음을 선고받아 자포자기 상태였던 그는 과학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5년을 더 살았다. 세계 모든 과학자들이 흥분했다. 한국 과학자들의 놀라운 의지와 기술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세계 처음으로 돼지 심장을 이식받은 환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그는 5년 동안 가슴에는 자신의 심장, 배에는 돼지로부터 이식받은 심장을 품고 있어야 했기 때문. 2015년 무렵의 과학기술은 주(主)동력이랄 수 있는 환자의 심장 기능을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돼지의 심장을 보조동력으로 활용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환자는 자신의 심장 기능을 활성화하는 약, 돼지 심장의 면역거부반응을 억제하는 약을 함께 복용해야만 했다. 배 안에 이식한 심장이 돼지 원래의 생태적 특성에 따라 몸무게 200킬로그램에 걸맞은 단계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약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성장억제제의 효력이 예상보다 신통치 않은 탓에 첫 이식수술 후 2년 만에 다시 새로운 돼지 심장으로 바꿔야 했다.
배 안에 돼지 심장을 이식받은 그의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첫 수술 후 1년여 동안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다. 통원치료가 가능해진 1년 후에도 집에서 거의 누워 지내야만 했다. 원래의 배 안에 없던 돼지 심장 때문에 가벼운 산책조차 힘겨웠다. 돼지 심장이 대장과 위에 눌리면서 늘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과식(過食)은 만용이었다.
그는 돼지 심장 이식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 건강한 사회생활을 꿈꿨다. 그저 다시 사회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새로운 짐만 지워준 꼴이 됐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세상의 관심도 버거웠다. 사람들은 티브이(TV)를 통해 세계 첫 이종장기이식 수혜자를 자주 보고 싶어 했다. 각종 난치병 환자들의 갈망은 더욱 뜨거웠다. 하지만 그는 한두 차례의 인터뷰 후로는 언론의 뜨거운 조명에 신경질부터 나기 시작했다. 3개월여 만에 그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게 됐다.
어찌됐든 세계 과학자들은 한국에서의 첫 이종장기이식 성과에 환호했다. 혹시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여겼던 것을 현실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종장기이식에 대한 윤리적 논란을 뛰어 넘는 한국 정부와 과학자들의 용단에 찬사를 보내는 이도 많았다. 그 성과를 발판으로 삼아 이종장기이식시대를 꽃피울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사실 놀라운 과학적 성과였다. 인간의 원초적 염원인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길을 여는 큰 발걸음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과학자들은 이 성과로 노벨의학상을 받았고, 세계 도처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한국 정부도 서울을 세계 의학기술연구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만들어 더욱 알찬 지원책들을 쏟아냈다.
첫 이종장기수술을 성공리에 마친 뒤 한국 정부와 의학 산업계의 노력은 더욱 놀라웠다. 우선 수 백 억원을 들여 완전한 무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대형 미니돼지 사육시설을 여러 개 만들었다. 이 시설로부터 한국과 세계 병원으로 돼지 장기를 배달하기 위한 첨단 무균 이동시스템도 만들었다. 이 시스템에 힘입어 한국은 세계 제1 장기수출국으로 떠올랐다. 아예 무균 미니돼지 사육시설과 수술실을 턴키(Turn-Key)로 수출하기도 했다. 한 발 앞선 수술경험을 바탕으로 양성된 한국의 전문 인력이 세계 각국의 병원으로 건너가 활동했다.
이 같은 한국의 성과는 세계 유일의 무균 미니돼지 보유국가라는 데서 비롯됐다. 지난 2004년 말, 무균 미니돼지의 종주국이었던 미국에서 불의의 사고로 ‘돼지들이 공기에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무균 미니돼지 수십 두(頭)가 건너갔다. 이에 따라 2005년 이후로 오랫동안 한국의 무균 미니돼지들이 세계 유일의 이종장기이식 연구재원으로 남게 됐다.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무균 미니돼지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한국의 황새걸음을 따라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돼지를 이용한 이종장기이식 연구는 한국에서 시작돼 한국에서 마무리되는 환경이 조성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도 환경시민단체들의 거센 항의와 비난, 국민의 생명 윤리에 관한 가치관 혼란에 쩔쩔매야 했다. 국제환경단체로부터 비난이 쇄도했다.
이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환자들에게 한국에서 공급되는 돼지 장기는 소중하게 쓰였다. 세계 방방골골에서 분출하는 난치병 환자들의 뜨거운 성원은 2015년 한국에서 첫 이종장기이식 수술이 성공한 후 10년여 동안 ‘보조기능을 하는 이종장기’를 대중화하는 밑거름이었다.
보조기능 이종장기 수술이 대중화했지만 사회 문제까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돼지 장기를 이식받은 환자들이 사회로부터 돌연변이 취급을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종장기이식)을 했던 청소년들이 친구들로부터 심한 따돌림을 당한 끝에 자살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 국민들의 이종장기이식 수혜자에 대한 배척은 그 어느 나라보다 심했다. 새로운 이기주의를 떨쳐내자는 캠페인이 펼쳐졌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일부 이종장기이식 수혜자의 극단적인 범죄행위도 속출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종장기를 이식받아 생명을 연장했으나,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신체적 한계와 운동량 때문에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늘어났다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됐다.
유엔(UN)은 이종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포용할 국제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3. 통제불가(統制不可), 인간 복제
2005년 한국의 황우석·문신용 교수가 인간배아복제 줄기세포를 추출해 배양하는데 성공하면서부터 인간복제의 공포는 예견됐다. 그들의 연구 성과는 분명 불치병 환자들에게 큰 희망이었다. 그들의 목적도 숭고했다. 그러나 세계 곳곳의 연구실에서는 황·문 교수가 제시한 ‘길(Road)’을 따라가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길, 인간 복제라는 불손한 시도를 했다.
2020년 1월, 세계가 경악했다. 한 과학자가 돈의 유혹과 과학적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10년 전부터 시도한 인간복제의 결과가 드러나서다.
굴지의 재벌인 ㅇ씨는 외아들을 뜻밖의 사고로 잃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 이념과 철학을 그대로 이어줄 믿음직한 후계자, 자신의 핏줄을 간절히 바랐다. 그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 많은 시간을 고민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시신이 조금이라도 더 싱싱할(?) 때 체세포를 떼어내야 했기에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우선 천문학적인 돈을 싸들고 과학자 ㅂ씨를 찾아갔다. 역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비밀 연구실을 제공했다.
유혹에 넘어간 과학자는 돈보다는 명예욕에 불탔다. 세계 처음으로 인간복제에 성공한 과학자로 회자되고 싶었다. 재벌이 건네준 돈은 금상첨화였을 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과학자 ㅂ씨는 특별하게 새로운 연구법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복제 양 돌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체세포를 이용한 포유류 복제의 매뉴얼을 손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이에 황·문 교수의 연구 성과는 불손한 의도를 가진 과학자 ㅂ씨에게 인간복제 실현을 위한 가속페달이 됐다. 윤리적 머뭇거림은 많은 돈과 명예욕(?) 앞에 맥없이 힘을 잃고 말았다.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수백 명의 건강한 여성들로부터 난자를 사들일 수 있었다. 연구(?)에 가속도가 붙었다.
들어가는 돈이 많아질수록 과학자 ㅂ씨와 재벌 ㅇ씨의 광기(狂氣)도 달아올랐다. 아주 쉽게 윤리적 경계선들을 휙, 휙, 넘어설 수 있었다.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 같았다.
열 개 수정란에서 가능성이 보였다. 과학자 ㅂ씨는 가장 건강한 상태를 보이는 수정란을 재벌 ㅇ씨에게 자세히 브리핑했다.
ㅂ씨는 “2010년에만 해도 기술적으로 수정란의 대리모 착상이 어려워 성공률이 낮았지만 이젠 다르다”며 “가능성이 보이는 열 개 중에서 3~4개 정도를 3~4명의 대리모에게 착상하겠다”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성과와 계획을 설명했다.
ㅇ씨는 이번에도 시간을 들여 고민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대리모 열 명을 구할 테니 열 개 모두 착상해주시오. 대리모는 건강하고 똑똑하며 아름다운 이들을 뽑아서 제공하리다. 이후 착상 상태를 봐서 최종 후보를 결정합시다.”
재벌 ㅇ씨는 쌍둥이를 바라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방대한 규모의 기업체를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끼리 모든 걸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나마 인간복제 쌍둥이가 탄생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결국 복제 아기는 2020년 1월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재벌 ㅇ씨는 그 모든 과정을 비밀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과학자 ㅂ씨의 명예욕을 완전하게 억누를 수 없었다.
과학자 ㅂ씨는 자신의 자랑스런(?) 성과를 널리 알리고픈 마음에 밤마다 이리저리 뒤채였다. 자랑스런 발표의 순간을 고대하며 재벌로부터 제공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이리저리 숨겨놓는 일에도 열중했다. 하지만 재벌가(家)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미 받아 써버린 나머지 토해내야 할 돈도 너무 많았다. ㅂ씨는 머리를 썼다. 특종에 혈안이기 마련인 언론에 슬쩍 정보를 흘렸다. 물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진 않았다.
기사가 게재되자 그야말로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종교계가 맹렬하게 비난했다. 과학이 만들어낸 개가라며 크게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구촌이 미증유의 논(論) 분열현상으로 들끓었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재벌 ㅇ씨의 아들 복제하기와 비슷한 사례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과학자들은 논쟁과 혼란의 틈을 타고 ‘첫 시도’라는 윤리적 부담감을 떨어내려 했다. 복제의 정당성과 이점을 강조하는 억지도 잘 포장돼 덧붙여졌다. 이를 계기로 불치병을 가진 2세, 배우자, 부모를 법의 테두리 밖에서 복제한 사람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려 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복제한 사람도 있었다.
한 쪽에선 절망과 탄식이, 다른 쪽에선 희망과 희열이 분출했다. 갑작스런 가치관의 붕괴에 절망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사이비 교주는 인간 복제를 교묘하게 종교로 포장해 엄청난 돈을 끌어 모아 사회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렇듯 세계가 혼란과 논쟁에 휩싸였을 무렵, 재벌 ㅇ씨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그릇된 선택과 욕심을 후회했다.
그는 유언을 통해 “저의 잘못된 욕심이 세상에 큰 걱정거리를 던졌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새로운 아들이 자연이 허락한 방식으로 자신의 2세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자식을 쉽사리 죽이지 못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미 태어난 그에게도 최소한의 인권은 있으니까요. 그냥 제 자식의 삶을 제 자식에게 맡겨 주십시오. 다만 복제된 그가 스스로를 다시 복제하려는 시도가 성사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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