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사이언스: 2부
[옐로 카드 Ⅱ-나노 맹신(盲信)]
1941년 미국 로스알라모스연구소 과학자들이 플루토늄(PU)을 만들었다. 인간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원자였다. 플루토늄은 대단히 이상해서 어떤 상태에서도 불안정했다. 아직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만큼 제어하기 어렵다.
플루토늄은 현존 인류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물질이다. 지구를 파괴하고도 남을 원자폭탄의 원료로 쓰인다. 전략적 군사 물질로서 통제되고 있다.
과학기술자들은 순수(?)하다. 처음부터 지구를 파괴하거나 인류를 해치기 위해 플루토늄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플루토늄은 지난 60여년간은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에도 너무나 무서운 존재로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다.
10억분의 1미터, 초미세 세계를 다루는 나노기술도 마찬가지 위험 요소를 가졌다. 10억분의 1미터 아래에는 원자와 분사 단위 세상이 있다. 분자가 물질의 성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물질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삶의 변화를 예고한다. 그만큼 플루토늄이 인류에게 던져준 걱정거리보다 훨씬 넓고 깊은 고민을 잉태할 수 있다. 나노기술 열풍이 불고, 나노기술이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맹신(盲信)을 경계해야 한다.
5장 나노기술, 21세기 연금술
‘물에 녹은 은나노로 살균에서 항균까지.’(삼성전자의 하우젠 세탁기 광고문구)
‘은나노’ 열풍이 불고 있다. 이 단어(정확하게는 ‘은의 나노입자’이겠지만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은나노’라는 함축어가 유행이다)에 대한 삼성전자 측의 설명은.......
은(銀)은 인체에 무해하고 어떤 옷감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강력한 살균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은 그대로는 옷감에 침투해 살균력을 지닐 수 없다. 은의 살균력은 초미립자인 나노 크기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은 나노입자는 650여종의 세균을 제거하는 강력한 살균효과를 발휘한다. 4000억개 은나노 입자가 삶을 수 없는 옷까지 살균한다. 블라우스, 와이셔츠, 란제리, 이불 등 삶은 세탁이 불가능한 모든 옷감에서 살균효과를 발휘한다. 마지막 헹굼 과정에서 은나노 입자로 항균 코팅을 해줘 1개월간 세균의 번식을 막아준다. 땀 냄새를 제거하는 탈취효과까지 있다. 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직물(17종)에서 99.9%의 항균효과가 입증됐다. 민감한 피부를 보호하고 아토피성 피부염도 예방할 수 있다. 삶는 세탁에 비해 소비전력량도 낮아 경제적이다.
세~상에 혁명적이다. 한 번 빨아 입으면 1개월간 세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데 더 말할 게 무엔가.
미국의 시사주간지인 ‘타임(TIME)’도 은나노에 반했다. 2004년 10월 14일 삼성전자 은나노 세탁기를 ‘기술혁명의 산물’이라고 극찬했다.
타임은 ‘하우젠 은나노 세탁기가 삶지 않은 물로 살균을 하고 한 달 간 항균을 해주는 새로운 기술’이라며 작동원리를 자세하게 소개했다. 특히 세탁한 옷들이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세균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타임은 또 ‘이노베이션 스페셜리스트(Innovation Specialists) 10인’을 선정하면서 삼성전자의 은나노 세탁기 개발자인 김형균 수석연구원을 첫째로 꼽았다.
김 연구원은 1999년 일본 출장 중에 세탁을 하지 않아도 냄새가 나지 않는 양말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양말에 살균력을 가진 작은 입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서 은나노 세탁기 개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개발과정에서 연구소 직원들의 양말을 반으로 나눈 후 은나노 세탁기와 일반 세탁기에 넣어 세탁했다. 그는 하루가 지난 후 세탁한 양말의 냄새를 맡아가며 은나노 세탁기의 항균력과 탈취력을 직접 확인했다. 삼성연구소에서 그의 사무실을 찾으려면 더러운 옷이 담긴 세탁바구니를 따라가면 될 정도였다고 한다.
타임은 나노기술이 다양한 영역에서 잠재적인 응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빠르게 성장하는 과학영역 중의 하나로 2015년까지 시장규모가 1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2004년 말 은나노 효과에 대한 물음표 하나가 던져졌다. 은이 가진 살균, 항균력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 의해 체험적으로 입증된 것이지만 물에 녹거나 나노 입자 상태에서도 균을 죽일 수 있을 지가 논란거리다.
#1. 은나노 열풍에 딴죽걸기
2005년 1월 한국화학연구원의 제갈종건 박사는 “아직 과학적으로 은나노 입자의 살균력이 입증된 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금속 상태의 은이 병균의 신진대사를 막아 살균효과를 낸다거나, 금속 상태의 은이 방출하는 은이온(Ag+)의 전기적 부하가 병균의 생식기능을 없애는 역할을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은이 나노 입자로 작아졌을 때의 살균효과에 물음표가 따라붙고 있는 것.
모두가 납득할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세탁기, 에어컨, 공기청정기, 냉장고 등에 나노 입자를 앞다퉈 응용하는 이유는 뭘까. 혹시 재료의 경제성(은을 나노 단위로 잘라 이용)과 새로운 물질이 유발하는 자극성(소비자 호기심 유발)을 ‘잘’ 버무린 결과가 아닐까. 인류가 체험해온 은의 항균효과를 세탁기 등에 적용함으로써 ‘깨끗한 삶’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부여, 판매량을 늘리고 세탁기 가격을 살짝(?) 올리는 방편으로 활용했을 수도 있다.
인류의 은 체험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오랫동안 보존해야 할 음식을 은그릇에 담았다. 미국인들이 서부를 향해 달려갈 때에는 우유를 담아놓은 그릇에 은동전을 넣었다. 우리 민족의 왕(王)들이 은수저를 쓴 것도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지식이다. 이렇듯 뿌리 깊은 은의 항균 효과에 대한 신뢰를 가전제품에 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마케팅 기법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자들의 열정, 땀을 폄훼할 수는 없다. 은나노 세탁기의 항균력과 탈취력을 직접 확인했다는 삼성전자 연구진의 발표에 대해 “당신들 거짓말 하는 거지!”라고 들이댈 수도 없다. 실제로 은나노 세탁기로 빨아 낸 세탁물들로부터 균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실험결과)됐기 때문이다. 다만 은나노 입자가 세탁물로부터 균을 몰아낸 것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다른 요인에 의해 살균효과가 나타났는지가 확실치 않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 정말 그렇구나!’라는 인식이 만들어지기까지 과학적으로 더 입증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완벽하게 입증되지 않은 기술의 성급한 적용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 물질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의 크기가 100나노미터(nm=10억분의 1m)이하이고, 나노 효과를 정말로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엄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익창출에 몰입하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다소 성급하게 ‘은나노’의 상품화를 밀어붙였을 수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비싼 재료인 은을 잘게 쪼갤수록 살균력이 높아지리라는 가정(假定)은 매력적인 상품기획 포인트다.
정육면체 하나를 둘로 잘랐을 때, 부피(총량)는 그대로이지만 표면적은 2배로 늘어난다. 표면을 자르는 순간에 부스러기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다. 은 한 조각을 두 개로 쪼개면, 잘라지는 면만큼 외부와 접촉(반응)하는 공간(표면적)이 증가한다. 따라서 많이 쪼개면 쪼갤수록 표면적이 늘어나 그 만큼 적은 양으로 높은 항균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은나노 열풍의 출발점이다. 커피에 각설탕을 넣는 것보다 가루설탕을 넣었을 때 더 빨리 녹는 현상에 빗댈 수 있겠다.
은을 분말로 만들면 살균 및 항균성을 가진다는 조사결과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만져지는 상태(고체)인 분말과 눈(나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쪼개고 쪼갠 상태(나노입자)의 세계는 서로 다르다. 아직 그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
어찌됐든 은나노 열풍은 대중의 관심을 나노미터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됐다. 과학자들의 연구개발에도 탄력이 붙고 있다.
#2. 나노미터(Nanometer) 세계로의 초대
지구 둘레는 약 4만192킬로미터(km)다. 이를 10억분의 1로 줄이면 둘레 4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구슬이 된다.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 물질의 가장 작은 형태인 원자 3∼4개(원자 1개는 0.1㎚=1옹스트롬)를 나열한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카락을 8만~10만분의 1로 쪼갠 것과 비슷하다.
비교대상을 이리 저리 견주어보아도 ‘느낌으로 다가올 만한 수치’가 아니다. 그래서 ‘극한(極限)’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등장한다.
말하자면, 나노기술은 지구를 가지고 구슬치기를 할 만한 거인(과학기술자)이 성능 좋은 돋보기(전자현미경)를 가지고 지구 안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구슬들을 찾아내고, 이리저리 옮기며, 줄을 다시 세우려는 작업이다.
과학자들은 나노기술을 이용해 원자, 분자들을 쪼개거나 적절히 결합하는 방식으로 기존 물질을 변형하거나 개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재료를 깎고 다듬어서 나노미터 수준에 도달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 있다. 10나노미터 이하로 내려가기 위한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는 원자나 분자를 조작해 새로운 기능과 구조를 만드는 바텀-업(Bottom-Up) 방식. 물질의 생화학적 특성을 이용해 원자나 분자를 블록처럼 쌓아 올린다. 과학자들은 궁극적으로 바텀-업 방식을 통해 나노기술의 눈부신 성과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모습이다.
나노기술은 물질을 원자, 분자 단위에서 다루고 기능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다. 과학자들은 나노기술을 통해 원자, 분자들을 적절히 결합하는 방식으로 물질을 변형하거나 개조해보고 있다. 아예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도 있다.
과학자들을 나노미터의 세계로 유인한 것은 ‘플러렌(Fullerene)’이었다. 플러렌은 60개 탄소원자가 축구공 모양으로 결합해 있는 구조를 가졌다. 지름은 약 0.7나노미터. 플러렌과 비슷한 모양의 ‘돔’을 설계한 건축가 버크미니스터 풀러(Buckminister Fuller)의 이름을 땄다. 1996년 크로토, 스몰리, 컬 등 세 과학자가 플러렌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이후 탄소 수가 70, 82, 120개인 다양한 형태의 플러렌이 발견됐다.
플러렌은 강하면서도 미끄러운 성질을 지녀 다른 물질을 삽입할 수 있고, 튜브처럼 이어질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생긴 모양이 축구공을 닮았다. 축구공이 이리저리 발길질을 당해도 끄덕 없듯 높은 온도와 압력에 견딜 수 있다. 정보기술, 바이오의약, 환경, 구조용 재료 등 폭넓은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약물 운반체(플러렌 안에 약물을 담아 운반하는 것), 전해질 막, 광(光) 전도체 등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이후 1991년 일본 엔이씨(NEC)의 이이지마(Iijima) 박사가 처음 합성한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로 시선이 모아졌다. 탄소나노튜브는 나노 소재로서 적당한 크기인 1~10나노미터의 원통형 관이다. 1개 탄소 원자가 3개의 다른 탄소 원자를 육각형 벌집모양으로 결합했다. 원자배열에 따라 도체, 반도체, 부도체 등 전기적 성질을 띤다. 전기적으로 금속이나 반도체로서의 특성을 선택적으로 가진다. 열전달 능력이 다이아몬드보다 20배 정도 좋고 인장강도도 고강도합금보다 20배 정도 우수하다.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100배 강도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허용 전류밀도도 금속보다 1000배 정도 커 ‘꿈의 소재’로 각광받는다.
탄소나노튜브의 극한에 가까운 물리적 성질 만큼이나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예를 들어 차세대 컴퓨터의 씨앗이 될 트랜지스터, 금속배선 등 전자소자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나노급 집적회로(IC)를 구성하기 위한 로직 어레이(Logic Array), 메모리 어레이(Memory Array), 칩(Chip)으로도 활용될 것이다. 이밖에도 디스플레이, 가시광원, X선, 발광다이오드, 2차 전지 전극, 고강도 구조체 등 현존하는 첨단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한두 세대 진보시킬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나노기술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나노기술은 앞으로 우리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나노기술에 의해 인류의 미래가 바뀔 것입니다. 10억분의 1미터, 초미세세계를 다루는 나노기술에 의해 우리 문명은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에 버금가는 전환점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노기술(NT)은 사회적인 또는 산업적인 통념을 깨는 특이한 분야입니다. 일례로 수 천 년 간 인류는 ‘금은 누런 색이다, 불활성의 특성이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노가 부각되면서 20나노미터 이하의 금 입자는 빨간색을 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금'하면 누런 색의 황금을 연상하는 개념을 무너뜨렸습니다. 과학기술을 신에 비유한다면 나노기술은 제우스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나노기술이 산업에 접목되면 그 파급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일 겁니다.”
작고 작아 가늠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쪼개고 쪼개다보니 물질에 대한 인류의 기존 상식까지 바뀌는 21세기 연금술(나노기술)에 인류가 열광하고 있다.
과거의 연금술이 다소 황당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나노기술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다. 특히 나노기술은 물리, 화학, 재료, 전자, 생물 등 기존 학문과 기술 분야를 횡(橫)으로 연결(interdisciplinary)해가고 있다.
과연 나노기술은 우리 주변을 어떻게 바꾸어놓을까.
요즈음 고층 건물 유리창을 닦는 초보자나 아르바이트생은 하루에 5만∼8만원 정도를 번다. 숙련공의 일당은 15만∼20만원이다. 튼튼하게 지은 고층 건물이 100년쯤 버틴다고 볼 때, 이 직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멀지 않아 나노기술(NT)에 자리를 내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노기술로 유리창을 닦는다고?
우선 연꽃 잎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보자. 주르륵 흘러내린다. 먼지도 함께 흘러내리기 때문에 연꽃잎은 항상 깨끗하다.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수많은 미세 솜털(돌기)들이 물방울을 떠받치고 있다. 이 솜털들이 물을 빨아들이지 않는 성질, 즉 소수성(疏水性)을 갖게 해준다. 이른바 ‘연꽃효과’다.
과학자들은 연꽃효과를 모방, 소수성이 있는 나노 소재를 만들어 고층 건물 유리창에 덮어씌우려 노력하고 있다. 유리창에 붙은 먼지를 빗물로 자연스럽게 씻어 내리자는 것.
그런데 먼지 중에는 물과 친한 성질(친수성)을 가진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하루살이, 모기 등이 유리창에 부딪혀 죽거나 배설물을 남긴다. 바로 유기물질(有機物質)이다. 친수성(親水性) 먼지는 빗물에 쉽게 씻겨 내려가겠지만, 유기물질은 손으로 닦아내기 전에는 오랫동안 유리창에 붙어 있게 된다.
연꽃효과만을 모방한 나노 소재만으로는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연구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다. 티타늄과 산소 화합물(TiO2)인 티타니아(titania)를 나노 촉매로 만들어 유리창에 함께 입히면 된다. 티타니아 나노 촉매는 유기물질을 광(光)분해한다. 이 촉매는 햇빛(자외선)을 받으면 유리창에 붙은 유기물질을 질소, 이산화탄소 등으로 분해해 공기 중으로 날려버린다. 실제로 20나노미터 이하 티타니아 입자가 자외선과 접촉하면 살균력, 스스로 세척하는 능력, 김 서림 방지효과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화학연구원의 제갈종건 박사팀은 이 같은 티타니아 나노 촉매의 특성에 주목, 유기오염물질을 광분해하는 차세대 폐수처리시스템을 개발해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나비 날개도 나노미터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돋보기(전자현미경) 아래 놓이면서 아주 좋은 연구대상이 됐다. 나비 날개는 나노미터급 작은 돌기들에 힘입어 소수성이 구현된다. 비 오는 날, 나비가 날아다닐 수 있는 이유다. 과학자들은 나비 날개를 본 딴 옷감, 이른바 나노섬유를 만들고 있다.
실제 2003년 11월 섬유업체인 우리나라의 새한과 미국의 벌링톤(Burlington)은 공동으로 나노가공기술을 이용해 물과 기름이 원단에 스며들지 않고, 땀을 빨리 흡수해 뽀송뽀송하게 해주는 옷감을 만들어냈다.
이에 앞선 2003년 6월에는 부산대학교 김복기 교수팀이 탄소나노튜브와 폴리머 복합체를 이용, 세계에서 가장 질긴 섬유를 개발했다. 이 섬유를 이용해 사람 근육보다 100배 정도 강한 인조근육을 만들거나, 초강도 방탄조끼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또 전기를 저장하는 기능까지 갖춰 새로운 형태의 배터리를 개발하는 소재로 쓰일 전망이다.
머리카락 한 올보다 500분의 1이나 얇은 나노 섬유를 꼰 실(絲)도 나왔다. 2003년 3월 전북대학교 섬유공학과 김학용 교수팀은 나노 섬유를 꼬아 실로 만들어냈다. 이 실은 기존 섬유들보다 100분의 1 만큼 가늘다. 열을 잘 보존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옷은 물론이고 인조혈관, 인공신장 투석망 등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비 날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디스플레이(display) 소재를 만들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나비 날개 표면은 나노미터 단위의 들쭉날쭉한 간격으로 그물처럼 짜여 있다. 그 일정치 않은 간격에 따라 빛에 반응하는 형태가 다르다. 나비는 간격을 넓히고 좁히면서 빛의 특정 파장을 반사, 그때그때 다른 색깔(보호색)을 만들어낸다. 과학자들은 이 같은 성질을 본 딴 광결정(photonic crystal)으로 TV, 컴퓨터, 휴대폰 등에 장착하는 새로운 방식의 창(디스플레이)을 만들 계획이다.
누구나 스파이더 맨(spider-man)이 될 수도 있다. 스파이더 맨의 형님(?)인 거미의 발다닥에 전자현미경을 들이대면, 수 백 나노미터 크기의 작은 털 60만여 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털들은 머리카락 한 올을 1000분의 1로 쪼갠 크기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미세한 털 60만여 개는 전기적으로 중성인 물체 두 개가 서로 아주 가까워졌을 때 발생하는 인력, 즉 반데르발스 힘에 의해 거미가 천장에 붙어 다닐 수 있게 만든다.
거미 발바닥의 미세한 털들은 천장과 붙은 듯, 떨어진 듯, 알 수 없을 만큼인 수 나노미터 떨어진 채 반데르발스 힘에 의해 더욱 강하게 들러붙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힘은 거미 몸무게인 약 15밀리그램의 173배(0.025뉴톤)를 지탱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 몸무게의 173배를 버텨낼 수 있는 섬유는 그야말로 꿈의 소재가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나노기술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거미 발바닥과 같은 소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거미 발바닥과 같은 성질을 가진 소재로 만든 장갑과 신발, 옷을 착용하면 누구나 영화 속 스파이더 맨처럼 높은 건물 벽을 타고 오를 수 있을 전망이다.
독일의 안토니아 케셀 박사는 “물에 젖었거나 기름기가 있는 곳에도 달라붙는 포스트-잇(post-it)을 개발하거나 우주비행사가 우주선 바깥에서 안전하게 달라붙어 이동할 수 있는 우주복도 가능할 것”이라며 인공 거미 발바닥 소재의 구체적인 쓰임새를 예상하기도 했다.
이렇듯 인간이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예전엔 몰랐던 자연현상을 모방하고, 미세분자들을 삶에 유용한 형태로 다시 짜 맞추기 시작했다.
#3. 쏟아지는 연구 성과
과학자들은 나노기술 상용화를 위해 휴식 없는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다. 속출하는 나노기술 연구 성과들은 인간이 이용해온 기존 물질의 성능을 크게 개선하고 있다. 또 분자 단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구조(바텀-업)를 만들어 전(前)에 없던 물질을 만들어 낼 태세다.
2004년 11월 26일 경기 과천 정부청사. 현택환 서울대 교수(응용화학부)가 기자들을 찾아왔다. 현 교수는 여러 나노기술을 상용화하는데 필요한 기본재료인 ‘균일한 나노입자’를 대량으로 값싸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유명 과학저널인 네이처 메티리얼(Nature Materials)도 현 교수의 연구 성과를 높이 평가, 2004년 12월 호에 게재했다.
현 교수는 “시판중인 균일하지 못한 자성체 나노 입자보다 1000배 싸게, 1000배 많은 양의 ‘균일한 나노 입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자신이 확립한 기술보다 “더 싸게 균일한 나노 입자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현 교수의 성과는 나노 전자 소자, 테라비트(Tb)급 차세대 저장매체, 차세대 디스플레이 형광체, 자기공명영상(MRI) 조영제(造影劑) 등 미래기술을 상용화하는 지름길을 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는 값싸고 독성이 없는 ‘금속·계면활성제 착화합물’을 서서히 가열한 후 섭씨 300도에서 30분간 추가로 가열, 5시간 만에 12나노미터의 균일한 자성체 산화철 나노입자 40그램을 만들어냈다. 원료로 쓴 금속염은 1킬로그램(㎏)당 7만원, 계면활성체는 1킬로그램당 2만원으로 1그램의 나노입자를 만드는데 불과 250원이 들었다. 이는 1㎏당 200만원인 기존 원료(유기금속화합물)를 이용해 생산한 불균일 자성체 산화철 나노 입자(그램당 10만원), 자기공명영상 조영제용 자성체 나노 입자(그램당 200만원) 등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다.
또 기존 나노 입자 제조기술로 10나노미터 크기의 균일한 나노 입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험난한 입자크기분리과정으로 말미암아 많아야 100∼500밀리그램(㎎)을 만드는데 그쳤으나, 현 교수의 제조방법으로는 '입자크기분리과정'이 필요 없는 것으로 검증됐다.
현택환 교수는 “실험조건과 금속염의 종류를 바꾸면 5, 8, 12, 16, 22나노미터 등 다양한 크기와 종류로 균일한 나노 입자를 제조할 수 있다”며 “세계에서 이보다 싼 방법으로 나노 입자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은 없다”고 강조했다.
삼성종합기술원 재료소자연구소의 박완준 박사는 “나노 입자를 균일하게 배열하는 것 자체가 난(難)기술”이라며 “비록 실험실 수준이지만 균일한 나노 입자를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생산할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테라비트급 저장매체로 가는 길이 한층 순탄해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 교수는 앞으로 하나의 나노 입자를 하나의 비트(bit)로 사용할 수 있는 미래소자기술과 테라비트급 하드드라이브에 쓰일 나노막대(Nanorods), 나노선(Nanowires)등을 개발할 계획이다.
-왜 나노 입자가 중요합니까.
▷테라비트급 자기저장매체, 자성체 나노 입자 MRI 조영제, 반도체 나노입자를 이용한 바이오센서, 태양전지, 디스플레이, 레이저 등에 활용할 나노기술의 기초핵심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왜 균일한 나노 입자가 중요합니까.
▷나노 입자의 전기적, 자기적, 광학적 성질들이 입자크기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나노 입자를 이용한 디스플레이, 레이저 등 나노 광학소자로부터 나오는 빛의 색깔은 입자 크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즉 선명한 빛깔의 광학소자를 얻으려면 입자크기가 균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노기술을 차세대 하드디스크드라이브인 테라비트급 자기저장매체로 응용하려면 균일한 10나노미터 정도의 자성체 나노 입자를 바둑판처럼 잘 정돈해 배열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잘 배열한 나노 입자들은 ‘하나의 입자를 하나의 비트(bit)’로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04년 11월 30일에는 국민대학교 신소재공학부의 김지영·신현정·이재갑 교수팀과 화학과 성명모 교수팀이 ‘새로운 금속 및 산화물 나노 튜브 제작 공정’의 개발성과를 공개했다.
김지영 교수는 “집을 지을 때 벽돌과 시멘트가 필요하듯 새로운 방식의 금속 및 산화물 나노 튜브가 차세대 나노 소자, 센서 등을 만드는데 필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성과는 나노 튜브를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한 형상과 물질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공정을 확립했다는 것. 특히 다양한 물질로 형성된 나노 튜브의 벽 두께를 원자단위로 손쉽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 많은 나노 소재 연구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탄소처럼 ‘망상구조’를 가진 물질의 경우에는 기(氣)상에서 촉매를 이용한 ‘일방향 성장법’을 통해 나노 튜브를 만들어야 했다. 또 망상구조를 갖지 않는 금속 및 산화물은 ‘템플레이트를 이용한 화학적 도금방식의 공정’으로 제작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나노 튜브는 △튜브 벽의 두께와 형상을 제어하기 힘들고 △튜브 특성을 재현하고 균일한 성질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특히 서로 다른 물질을 층으로 쌓아 특성을 개선하는 복합튜브를 만드는데 한계가 있었다.
국민대 연구진은 원자층 증착(Atomic Layer Deposition)방식과 자기조립단분자막(Self-Assembled Monolayer)의 특성을 결합한 ‘새로운 선택적 증착 방식’을 개발해 나노 템플레이트에 적용함, 나노 튜브의 자유로운 물질 선택과 원자단위로의 두께 조절이 가능도록 하는 진전을 이뤄냈다. 이로써 외경 수십~수백 나노미터, 길이 20마이크로미터의 형상을 가지는 나노 튜브를 산화물(산화티타늄, 산화지르코늄)․반도체(황화아연)․금속(구리, 코발트) 등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이들을 원자층 단위로 쌓아 나노 튜브를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함에 따라 차세대 정보통신, 환경, 에너지, 바이오, 의료 등에 응용할 수 있을 전망이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개념의 나노 정보소자와 센서, 몸 안 표적(질병)을 찾아 약물을 투입하기 위한 나노 캡슐 등의 개발을 앞당길 것으로 예측된다.
“나노기술 핵심재료인 단일 벽(Single Wall) 탄소나노튜브를 ‘상온’에서 합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2004년 12월 7일 삼성종합기술원 박완준 박사가 4년 6개월여간 흘린 땀의 결실을 공개했다. 박 박사는 “고품위 탄소나노튜브 양산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다양한 나노 소재분야로의 파급효과가 클 것”이라며 “기초 나노 소재분야에서 기술적 리더십을 확보하는 큰 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탄소나노튜브를 합성하려면 최저 700도에서 최고 2000도에 이르는 고온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또 고압, 고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설비도 필요하다. 더구나 고온, 고압, 고진공 제조환경에서 합성된 탄소나노튜브의 순도가 70~95%에 불과하고, 수율도 60~70%에 그쳐 경제적이지 못한, 즉 양산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박 박사팀은 페로신(Ferrocene)과 자일렌(Xylene)을 혼합한 액상원료-가스형태보다 월등히 많은 탄소원소를 공급할 수 있다-에 초음파를 이용, 상온에서 탄소나노튜브를 합성해냈다. 이를 통해 전자소자로 사용하는 직경 1.4~1.8나노미터급 단일 벽 탄소나노튜브의 합성수율을 60~70%에서 9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또 정제과정을 거친 후 70~95%의 순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기존 공정의 단점을 뛰어넘어, 별도 정제과정 없이 100%의 순도를 실현해냈다고 설명했다.
화학분야 권위지인 미 JACS도 2004년 11월 인터넷 판을 통해 박 박사팀의 연구 성과를 소개했다. 연구팀은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일본, 중국에서 특허 출원중이다.
지구의 70%가 물이다. 하지만 정화하지 않은 상태로 쓸 수 있는 물은 1%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다.
과학자들은 한 번 사용한 물을 모두 정화해 다시 사용하는 ‘방류하지 않는’ 물 관리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중이다. 이 같은 목표에 나노기술이 큰 보탬이 될 전망이다.
2005년 1월 18일, 한국화학연구원 제갈종건 박사팀은 △고분자섬유로 짠 튜브형 지지체 △미세 다공성 고분자 층 △고분자 층을 덮는 나노 광촉매(티타니아)로 구성한 물 분리막 소재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50∼100나노미터 크기의 수많은 구멍(기공)을 가진 고분자 층을 ‘가운데를 비운 실(中空絲)’의 형태로 만들어냈다. 이 소재를 연결해 모듈을 만들어 화학적 산소 요구량(COD) 300 이상 폐수를 30 이하 깨끗한 물로 걸러냈다. 우리나라 폐수방류기준은 COD 100 이하이고, COD 30 정도면 곧바로 마실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기존 중공사가 잘 끊어지고 오염물질이 달라붙어 기공이 막히는 단점을 개선, 연간 500억원대인 국내 관련 시장을 빠르게 대체할 전망이다.
제갈종건 박사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중공사를 개발함에 따라 내구성이 1년(기존)에서 최소한 2∼3년으로 늘어나 경제적”이라며 “폐수처리는 물론이고 정수, 공업용 물 제조, 식용 물 관련 산업 등 폭넓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벤처기업 (주)우리텍과 기술실시계약을 체결, 2005년 내에 실용화할 계획이다.
나노기술로 만든 신세계를 향해, 인류가 내달리고 있다. 과연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6장 나노 플러스 알파(+α)
1980년대 중반, 수 마이크로미터(1백만분의 1미터) 크기의 기계부품, 특히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초미세 가공기술이 확립됐다. 21세기 초, 과학자들은 10억분의 1미터인 나노미터 단위에서 기계부품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인류의 나노기술은 백혈구, 염색체, 디엔에이(DNA) 등 생물체 기본 요소들까지 들여다보고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발달했다. 생물체 기본 요소를 조작하고 분석함으로써 생명현상을 밝혀내고 잘 활용하겠다는 것. 차분하게는 정상세포를 비껴가며 암세포만을 죽이는 나노 미사일(missile)의 등장을, 성급하게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의 꿈을 부풀린다.
원자, 분자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살펴보는 것은 근원(根源)에 대한 탐구다. 구체적으로 나노기술이 생명공학기술 발전의 도약대가 되고 있다. 이미 ‘나노바이오테크놀로지(NBT : Nano-Bio Technology)’라는 말까지 나왔다. 생명공학과 정보기술의 융합체인 바이오인포매틱스(Bio-informatics)의 경우에도 나노기술을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이렇듯 나노기술이 21세기 공학계의 새로운 토대로 자리매김하면서 초미세 기계기술, 정보통신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광학부품제조기술 등을 한 꾸러미로 묶는 멤스(MEMS : 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의 발전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물질을 원자, 분자 단위로 조작(나노기술)하면 마이크로미터 수준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전기적, 자기적, 광학적 특성들이 발현된다. 이에 힘입어 새로운 나노·생명공학·정보통신 기술 융합체(기계)들이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내밀 것이다.
나노기술이 그 자체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보통신, 생명공학, 자동차, 기계, 환경 등 인간이 다루는 거의 모든 기술 분야의 새로운 기반(인프라스트럭처)으로 등장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생물학적 물질이 스스로 특정한 구조를 만들어내는 자기조립현상을 응용한 새로운 나노 공정 기술을 확립하는 등의 형태로 제반 기술들과 상호보완적인 발전관계를 형성할 전망이다.
#1. 팹(fab), 나노 융합기술 도약대
2005년 3월 16일 오전 11시 대전광역시 대덕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임상규 과학기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차관), 이희철 교수 등이 모였다. 그 누구보다 이희철 교수의 감회가 남달랐다. 국가 나노기술 발전의 도약대가 될 ‘나노종합팹(fab)센터’의 소장으로서 2002년 10월 이후 2년 6개월여 동안 공들여온 결실을 선보이는 날이기 때문.
나노 팹 센터는 개별 연구자와 기업·연구소들이 자체적으로 확보하기에 어려운 고가(高價)의 나노기술 연구장비를 설치해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 이른바 고가의 첨단 연구 장비 전문 서비스 센터라고 할 수 있다.
2002년부터 과학기술부와 산업자원부를 중심으로 모두 4개의 나노 관련 팹센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 첫 결실이 한국과학기술원 내에 설치된 나노종합팹센터(소장 이희철)다.
정부(과학기술부)는 2002년부터 2011년까지 9년간 모두 2900억원(정부 1180억원, 민간 1720억원)을 투자해 나노 소자 제작·시험·측정·가공에 필요한 연구 장비를 확보할 예정이다. 그 1단계 결실로 140개 고가 장비가 나노종합팹센터에 설치돼 2005년 3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센터에는 10나노미터 이하로 초미세 회로패턴(pattern)을 만들 수 있는 ‘전자 빔 리소그라피 시스템(Electron-Beam Lithography System)’, 나노 구조 분석용 초미세 시편을 제작할 수 있는 나노 임플린트 리소그라피 시스템(Nano Imprint System) 등 나노 단위 공정과 소자를 개발할 수 있는 첨단 장비들이 갖춰졌다.
전자 빔 리소그라피 시스템은 100킬로전자볼트(KeV)로 가속한 빔을 이용해 실리콘 기판 위에 초미세 회로패턴을 만들어주는 장비. 100나노미터 이하의 소자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회로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나노 임플린트 리소그라피 시스템은 국내 처음으로 설치된 것. 30나노미터 이하의 회로패턴을 만들 수 있다. 반도체 패턴공정 개발은 물론이고 레이저 다이오드, 양자점 레이저와 같은 광(光)소자를 개발하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이와 함께 전자 빔과 이온 빔을 동시에 사용해 나노 단위 제품을 가공·검사·분석하고,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측정 장비인 ‘듀얼 빔 접속 이온 빔 시스템(Dual Beam FIB System)’도 센터 공간을 차지했다. 전자 빔과 이온 빔을 하나의 장비로 출력하고 조절함으로써 가공에서 수정에 이르기까지 일괄 처리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무엇보다 수 센티미터의 조각 웨이퍼(Wafer)를 만들어 실리콘 계열 반도체 칩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 있게 돼 국내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발전을 꾀할 밑바탕이 될 전망이다. 8인치 웨이퍼를 이용한 시제품 제작도 가능하다. 나노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반도체 분야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할 수 있다. 나노 반도체 소자는 물론이고 극(極)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나노 바이오 칩 등을 한 자리(팹센터)에서 연구할 수 있다. 나노 관련 융합기술 연구의 보고(寶庫)가 탄생한 셈.
나노종합팹센터는 건물을 짓는 데에만 300억원이 들어갔고, 연건평이 5448평(팹동·연구동·설비동)에 달한다. 1차로 140개 장비를 구입하는데 787억원을 쏟아 부었다.
센터는 앞으로 나노집적공정(CMOS)를 기본 구조로 하는 소자의 기술적·개념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연구 서비스를 제공한다. 실리콘 웨이퍼나 특수한 용도의 기판 위에 전자빔을 쬐어 별도의 감광원판(Mask)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패턴을 사진처럼 찍어낼 수 있는 리소그래피(lithography)기술도 가능하다. 이는 당장 차세대 반도체 분야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나노 소자 간의 연결 정확도를 높이고, 부분적인 소자·소재·공정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나노기술 구현에 필수적 요소인 산화막, 다층실리콘막, 금속막, 구리막 등 심층 미세 증착기술도 지원된다. 또한 나노구조체, 나노자성체, 나노튜브 등의 형성과 양자 분야의 기초·원천기술 연구개발을 지원할 수 있다.
특히 나노와 생명공학기술의 융합연구, 디엔에이(DNA) 소자, 자기조립분자소자, 생체센서 연구개발도 가능하다. 디엔에이, 알엔에이(RNA) 등 단백질 시료와 나노 신소재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은 물론 나노 단위 소재의 전기·자기·기계적 특성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연구범위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을 홀로 갖출 만한 기업체를 찾아볼 수 없다. 해외도 마찬가지. 그래서 국가 기관이 나서 국민의 세금을 쓰게 됐다.
구체적으로 나노미터 크기의 물질이나 구조가 갖는 독특한 성질과 현상을 이용해 새로운 소자를 만들게 된다. 이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국내 업체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분야에 큰 힘(연구개발 지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데이터 저장매체, 광(光) 분야 연구기관에도 유용한 기반 설비가 된다. 앞으로 지엠알(GMR : Giant Magneto Resistance) 하드디스크, 지엠알 센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전계방출표시장치(FED), 레이저 다이오드, 양자점 레이더, 단전자 소자 등 미래에 각광받을 소자들이 나노종합팹센터에서 태어날 것이다.
소재의 결정 크기를 나노 단위로 미세하게 만든 뒤 물리·화학적 방법을 통해 기존 소재의 물리적 성질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것도 나노종합팹센터가 보여줄 기술적 진보다. 전자부품과 센서, 촉매, 자동차 바퀴(타이어), 환경친화적인 세정제, 염료와 안료, 항공 및 방위(防衛)산업 등의 분야가 이용자들이다. 주로 분말 형태의 나노 소재, 탄소나노튜브, 고분자 나노 복합체 등이 개발될 전망이다.
디엔에이 칩, 랩온어칩(Lab-on-a-chip), 바이오 센서, 단백질 칩 등 사람의 질병을 진단하고 건강상태를 항상 체크해줄 바이오 칩들도 나노종합팹센터를 통해 발전속도에 탄력을 붙일 것이다. 약물전달시스템, 생체조직, 조직공학, 관상동맥 확장용 소재 등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가 활약(?)할 새로운 물질의 탄생도 예상된다.
궁극적으로는 멤스(MEMS : 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을 뛰어 넘어 분자 단위의 조립·제어·측정을 구현할 님스(NEMS : Nano Electro Mechanical System)가 구현될 것이다. 나노종합팹센터를 통해 님스가 등장하면 나노 센서, 나노 구동기, 나노 리소네이터(Resonator), 생명공학기술 등과의 융합을 통해 가히 혁명적인 질병을 진단·치료법이 생활 가까이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밖에 2003년 9월 구축에 돌입한 나노소자특화팹센터, 2004년 설치작업을 시작한 나노기술집적센터도 국민의 돈(세금)으로 마련하는 나노 융합기술 도약대다.
오는 2008년까지 1731억원이 투입될 나노소자특화팹센터는 화합물 반도체 중심의 나노소자 공정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 서비스를 전개하게 된다. 2005년 11월 말까지 3000평 규모의 팹동을 먼저 만들어 2006년 1월부터 시범서비스를 시작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가시광선·적외선·자외선 영역에서 파장을 내는 발광(發光)소자, 초고속 신호처리용 전자소자를 개발하는데 유용한 설비가 될 것이다. 비(非)실리콘계 다기능 소자 개발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풀이된다.
나노기술집적센터도 2008년 완공을 목표로 2668억원이 투입된다. 설치될 장소도 전북대학교, 한국생산기술연구원(광주), 포항공과대학교 등으로 분산 배치될 예정이다. 전북대와 생산기술연구원은 나노 공정기술과 장비, 포항공대는 나노 소재와 재료 분야에 집중하게 된다. 지역별 센터로 연구 인프라와 생산역량이 모이면 광(光)산업과 연계한 디스플레이, 나노 단위 회로집적기술을 활용한 반도체, 나노분말을 비롯한 신소재·재료 분야의 공정과 생산기술이 확립될 전망이다. 정부는 나노기술집적센터를 통해 ‘지역균형발전’과 ‘나노 기술발전 기반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 나노 플러스 바이오
사람은 사람을 닮은 2세를 낳는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유전정보와 아빠의 유전정보가 적절하게 섞인다. 사람에게서 쥐, 원숭이, 소나무, 상어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은 각자의 유전정보가 서로 달라서다.
유전정보는 염색질(Chromatin)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염색질은 진핵생물의 핵 안에 있는 호염기성(염기성 색소에 잘 염색되는) 물질을 정의한 형태학적 용어다. 염색질이 뭉쳐 염색체를 구성하고, 세포분열을 통해 성체로 자라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염색질은 디엔에이(DNA․디옥시리보핵산)와 히스톤(Histone)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히스톤은 유전정보의 보관을 도와주는 단백질이고, 디엔에이에 모든 유전정보가 담겨 있다. 디엔에이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등 4가지 염기(nucleotide)가 있다. 디엔에이의 유전정보는 사람(생물체)의 몸을 구성하고 생명을 유지한 기능을 담당하는 단백질로 옮겨져 유전적 형질을 발현한다. 결국 디엔에이는 ‘사람의 설계도’인 셈이다.
1953년 4월 미국의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디엔에이(DNA)를 세상에 처음 소개했다. 왓슨과 크릭은 유명 과학저널인 ‘네이처(Nature)’에 20세기 굴지(屈指)의 과학성과인 ‘디엔에이 이중나선구조’를 발표했다. 디엔에이 이중나선구조는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이 각각 화학적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로 결합, 두 가닥으로 꼬여 있다는 것. 이 같은 상보(相補)적 결합을 통해 유전정보를 조전한다는 게 연구결과의 핵심이었다.
이후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유전자 조작기술, 증식기술이 개발됐다. 1970년대 말부터 유전자의 서열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분자생물학적 기술이 많이 향상됐다. 그러나 한 개 유전자의 유전정보를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1990년경 하나의 염기를 규명하는데 드는 비용은 1달러 이상으로, 이를 사람의 유저체 전부를 해독하는 비용으로 환산하면 약 4조원 이상으로 가히 천문학적이다. 기간도 10년 이상 소요된다.
1990년 세계 각국 과학자들이 인간 유전체(게놈)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1995년 바이러스성 뇌막염 원인균인 ‘헤모필러스 인플루엔자(Haemophilus Influenza)’의 모든 유전정보를 밝혀냈으며, 2003년 4월 인간의 유전체 서열 정보가 규명됐다. 30억 개 염기와 4만여 개 기능유전자로 이루어진 인간 유전체 지도가 나온 것.
눈부신 인간 탐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다. 유전체 지도를 만들었지만 아직 유전자의 정확한 개수와 기능을 알지 못한다. 약 2만5000개~3만개로 ‘추산’되는 인간 유전자의 4분의 1 정도의 기능을 추측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기존에 잘 알려진 유전자와 서열이 비슷해 기능도 비슷할 것으로 여길 뿐이다. 아직 기능을 추측조차 해볼 수 없는 유전자가 많고 많다. 또 신비로운 생명현상 근원의 하나인 단백질의 발현 및 기능 기전(메커니즘)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아니, 십리, 백리, 천리가 안개에 휩싸인 듯하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안경(나노기술)을 끼고 용감하게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길이 오리, 십리가 될지도 모른 채다. 중간에 길이 끊어지거나, 길 한가운데에 나락(那落)으로 빠질 구멍이 뚫려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노미터 크기를 들여다보게 됐고, 다룰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이 과학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나노기술에 힘입어 1994년에 등장한 디엔에이 칩은 과학자들의 보폭(步幅)을 크게 넓혀놓았다.
디엔에이 칩은 1994년 미국 애피메트릭스(Affymetrix)사의 스티브 포더 박사가 개발했다. 애피메트릭스사의 디엔에이 칩은 는 빛을 이용한 판화기법(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과 화학 합성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 실리카 칩 위에 광판화 마스크를 입히고 일정 부위만 빛을 쬐어 반응에 민감한 작용기만 드러나게 한 후, 핵산을 결합시켜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빛의 투사와 도입시키는 핵산의 순서에 따라서 올리고 핵산들이 칩 위에 형성된다.
최초의 디엔에이 칩은 유리판 위에 디엔에이를 바둑판처럼 조밀하게 붙인 것이다. 디엔에이는 음(-)전기를 띠므로 유리판에 양(+)전기를 띠는 물질을 붙여서 서로 붙게 만들 수도 있고, 화학적 결합을 이용할 수도 있다.
디엔에이 칩은 주로 유전자 검색과 연구에 쓰이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유전자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유전자가 산재해 있다. 기존에 알려진 유전자로부터 새로운 기능이 밝혀지기도 한다. 이러다보니 유전자 관련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 자체가 방대했다. 그래서 일종의 유전자 연구 도구로서 디엔에이 칩이 필요했다.
디엔에이 칩은 유리,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기판 위에 특정 연구 목적에 맞는 수많은 디엔에이를 고착시켜 놓은 것. 수천, 수만 개 유전자를 한꺼번에 연구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또 생화학반응(산화 및 환원)을 구동력으로 삼기 때문에 별도의 전원(電源)이 필요하지 않다. 전기(電氣)를 이용한 초미세 소자들의 약점인 발열(發熱)현상도 거의 없다. 그 제작과정이 실리콘 기판 위에 전자회로를 집적(集積)하는 반도체 칩과 비슷해 ‘칩(Chip)’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생명공학 연구자들의 입맛에 맞춰 칩을 제작하는 업체들도 생겼다.
디엔에이 칩은 장차 인간 질병에 관한 범용 칩으로 발전할 전망이다. 예를 들어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적 특성을 표준화해 칩에 담아낸 후 개인별 건강상태, 질병 징후 등을 분석해내는 것. 이른바 질병 종합 진단용 생명공학센서다. 진단이 간편하고 정확할수록 맞춤형 의료 서비스가 가능해진다는 게 과학자들과 정부 정책입안자들의 시각이다.
2004년 12월 22일, 한국원자력의학원 이기호 박사는 ‘간암 환자의 예후(豫後)를 알려주는 유전자 칩’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박사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김용성․염영일 박사가 발굴해놓았던 1만4000종의 한국인 유래유전자를 활용, 간암 관련 지표유전자 1165개(핵심지표유전자 253개)를 발굴해 칩에 담아냈다. 한국인 디엔에이 중에서 간암 관련 유전자 정보만을 취합해 유리 기판 위에 집적한 것. 연구팀은 이를 통해 간암 환자별 생존가능성을 정확히 예측하고, 맞춤형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박사는 “간암은 한국인 암 발생률 및 사망원인의 3위를 차지하는 질병인데, 다른 암에 비해 예후가 나빠서 전체 환자의 10% 정도만 5년 이상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렇게 생존율이 낮은 것은 초기 진단시에 암이 상당히 진행돼 치료 받을 기회가 적다는 점과 치료 후 재발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간암환자의 예후를 미리 예측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간암 재발 등의 예후를 미리 예측해 더욱 효율적인 환자관리와 치료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수술이 불가능한 환자의 조직검사 △수술을 받은 환자의 재발예측지표 및 치료 가이드(guide) 마련 △환자 체질에 맞춘 방사선 및 항암제 치료 등에 칩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연구실 풍경으로부터 ‘집에서 임신 진단 키트를 사용하듯 암 진단용 디엔에이 칩을 대중화한 미래 세상’을 그려볼 수 있겠다. 이를 실현하려면 생체 시료를 섞거나 분리하고, 분석 및 예측을 작은 칩 위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립하는 게 선결과제다. 말하자면, 일반 병원의 실험실이나 질병 진단용 시료 분석실을 칩 위에 담아내는 셈. 나노기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질병 예후를 알려줄 수 있는 디엔에이 칩을 사람의 피하조직에 이식하는 청사진까지 그려진다. 사람 몸에 이식한 종합 질병진단용 디엔에이 칩을, 최근 정보통신기술(IT) 분야에서 각광받는 알에프아이디(RFID․전자태그)기술과 접목해 언제 어디서나 쉽게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해보자는 것. 이른바 바이오 인포매틱스(Bio-informatics)의 구현이다. 엄밀하게는 디엔에이, 단백질, 화학 생물학적 시료들을 반응시켜 분리, 분석, 데이터 처리를 하나의 칩 위에서 처리하는 랩 온 어 칩(Lab-on-a-Chip)에 의한 바이오 인포매틱스다.
바이오 인포매틱스가 발달하면, 사람들의 몸 안에 이식한 알에프아이디 기능을 갖춘 디엔에이 칩으로부터 생산된 데이터들이 정부, 기업, 의료기관의 컴퓨터(데이터웨어하우스)에 쌓일 것이다. 나노기술에 힘입어 칩 안에 주민등록번호, 신용상태, 사는 곳 등 간단한 신상 정보는 물론이고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정보를 담게 될 것이다. 공무원, 기업가, 의사 등은 언제 어디서나 단 한 번의 접속(Log-In)으로 네트워크에서 공유되는 특정인의 정보를 검색․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나는 디엔에이 칩을 몸에 이식하기 싫다”거나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약물전달시스템(DDS : Drug Delivery System)도 나노기술을 발판으로 삼아 혁신을 꾀한다. 이른바 ‘생체 미사일’로 불리우는 나노 약물전달시스템은 인체의 필요 부위(질병)에만 약물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예를 들어 현존하는 암 치료법인 항암제 투여, 방사선 요법이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파괴하는 단점을 나노 약물전달시스템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약물전달시스템은 ‘지속성 약물방출시스템’, ‘제어방출시스템’, ‘포적지향형 약물전달시스템’이 있다.
지속성 약물방출시스템은 약물이 너무 서서히 흡수되거나 지나치게 빨리 몸 밖으로 소실되는 경우에 적용된다. 약물의 방출속도를 늦추려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제어방출시스템은 표적(질병세포)부위의 혈장 농도를 제어해 치료효과를 조절하기 위한 것. 약물전달시간을 연장하고 약물방출속도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체계다.
표적 지향형 약물전달시스템은 정상세포를 피해 질병세포에만 약물을 전달하려는 것. 가장 각광받는 나노 약물전달시스템이다. 약물을 질병세포까지 운반하기 위한 나노 캡슐 연구도 병행되고 있다. 이를 위해 질병세포가 있는 목표 부위에서만 녹거나, 특정 항원이나 항체 반응을 이용해 캡슐을 터뜨릴 수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캡슐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백혈구 등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막아내는 기술도 핵심요소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 인체 면역체계 레이더를 피해가기 위한 ‘스텔스 기술’, 표적만을 공격한다는 ‘미사일 기술’ 등의 용어가 쓰인다.
2003년 1월 이화여자대학교 손연수 교수팀은 암 조직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나노 백금착물 항암제 신물질’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항암제 치료가 어려운 위암세포(YCC-3), 폐암세포(A549)를 공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높다.
2003년 8월에는 나노기술을 적용해 인체 내 흡수속도를 2배 가량 끌어올린 해열진통제가 시장에 나왔다. 한미약품은 두통약 주성분인 이부프로펜(Ibuprofen)이 사람 몸 안에서 잘 흡수되지 않아 약효가 늦게 나타나는 점에 주목, 나노기술로 약물 입자를 잘게 쪼갬으로써 흡수속도를 높였다.
아예 사람 몸 안에서 항체처럼 바이러스, 균 등을 직접 공격하는 ‘나노 로봇’까지 개발될 전망이다. 나노 로봇을 혈관에 풀어놓아 온 몸을 돌아다니며 특정 바이러스를 잡도록 하겠다는 것.
나로 로봇은 분자 크기의 기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분자기계는 이미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몸 안에는 리보솜이라는 물질이 있다. 이것이 20개 아미노산을 원료로 삼아 세포의 기능과 특성을 결정해주는 단백질을 끊임없이 조립한다. 리보솜이 곧 분자기계이자 나노 로봇이다. 과학자들은 리보솜과 같은 분자기계를 적절히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 기계를 컴퓨터 산업, 의학 등에 적용할 계획이다. 후천성 면역결핍증(HIV)처럼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불치병을 치료하는데 쓰일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생명유지현상의 기본인 세포 조립, 면역체계에까지 나노기술로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도전에 나섰다.
#3. 나노 플러스 아이티(IT)
정보기술은 사람이 움직이는 곳마다 컴퓨터가 존재하는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잠을 자는 사이에도 컴퓨터가 계속 작동하며 편안한 잠자리를 유지시켜 줄 모양이다. 이를 위해 ‘입는(wearable)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전개되고 있다. 무게와 크기에 의해 사람의 행동이 제약을 받지 않을 정도가 되려면 컴퓨터 소재, 부품, 설계 자체의 변화가 요구된다. 컴퓨터의 눈(디스플레이), 머리(메모리), 생명(배터리)도 새로운 소재와 형태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탄소나노튜브는 철강보다 100배 강하다. 그러나 무게는 철강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열(熱) 및 전기 전도율은 구리보다 좋다.
과학자들은 차세대 컴퓨터에 쓸 새로운 전자회로소자의 유력한 후보물질로 탄소나노튜브를 손꼽는다. 20세기 산업계를 이끈 물질이 실리콘(반도체 소재)이라면, 21세기 핵심물질이 탄소나노튜브라는 말까지 나온다. 인간에게 더 편리하고 유익한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생각하게 될 지능형 기계(로봇), 컴퓨터 등을 개발할 지름길도 탄소나노튜브를 기본 소재로 하는 나노기술 안에 숨어 있다.
전자를 전도하는 N형 폴리머와 정공을 전도하는 P형 폴리머 사이에 반도체 양자점들을 배열하면 가시 스펙트럼의 색상을 내는 발광 다이오드(LED)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구조는 같아도 입자 크기에 따라 갖가지 색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1.8나노미터(nm) 입자는 녹색 빛을 발하는 반변, 2.5나노미터 입자들은 자외선을 받을 때 붉은 빛을 낸다. 이것은 그저 예쁜 광선이 만들어낸 볼거리를 넘어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포켓 컴퓨터용 플렉서블(Flexible) 화면이나 벽걸이 TV 화면에 이런 다이오드를 이용할 수 있다.
디엔에이를 이용한 전자회로의 상용화 가능성, 즉 디엔에이 컴퓨터도 등장할 전망이다. 나노기술을 통해 디엔에이의 천문학적인 정보저장능력에 바싹 접근하면서 컴퓨터 연산 수행능력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셀 수 없이 많은 디엔에이 분자들을 연산에 동원함으로써 실리콘 밸리에서 만들어낼 수 없었던 연산능력을 가진 컴퓨터를 만들어 낼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기존 컴퓨터가 모든 정보를 정리하는 형태인 ‘0과 1 이진법의 연속적인 전개’를 4개 염기(아데닌․구아닌․시토신․티민)로 대체한다. 4개 염기를 2개 꾸러미로 묶어 0과 1 디지털 신호로 제어하는 것. 이 같은 기술이 상용화되면 같은 크기의 실리콘 기판 위에서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의 단위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디엔에이와 같은 유기물질을 이용한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는 분자 단위의 소자를 이용하게 된다. 매우 큰, 아니 엄청난 진보다.
과학자들은 첨단 현미경을 통해 나노미터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디엔에이를 비롯한 생화학 기전(메커니즘)을 이용한 다양한 차세대 컴퓨터를 만들어갈 태세다. 고등동물의 신경계, 내분비계, 면역계에서 생체 분자가 정보를 모으고 전달하며 처리하는 메커니즘을 본떠 컴퓨터를 만들겠다는 것. 생화학적 차세대 컴퓨터들은 단백질을 스위치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DNA 유형의 회로 제조 공정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미 DNA를 응용해 나노 금속선을 제조하는데 성공했고, DNA로 네트워크를 만들면 전기가 흐른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결국 DNA를 사용해 전자회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난 것이다.
1파운드의 디엔에이 분자(약 1000쿼트의 액체 속에 떠 있는 이 분자들은 약 1입방야드의 부피를 차지한다)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컴퓨터보다 더 많은 메모리를 저장할 수 있다. 이는 인간 두뇌 능력의 100조 배가 될 것이다. 게다가, 1온스밖에 되지 않는 디엔에이도 미국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보다 10만 배나 빠른 연산을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의 열정은 나노기술로 만든 징검다리를 디엔에이, 단백질 등 분자를 넘어 원자와 전자 세계에까지 걸쳐 놓았다. 일정한 파동을 그리는 전자의 흐름을 0과 1 이진법 트랜지스터로 만들어 보자는 것. 원자의 회전 방향을 위, 아래로 통제해 0과 1 이진법을 구현하겠다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양자(quantum)컴퓨터다. 그런데 양자 컴퓨터는 큐비트(Q-bit)라는 양자 비트(quantum bit)를 사용, 기존의 0과 1 이진법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전망이다. 이진법을 활용하는 기존 컴퓨터와 달리 두 개의 파동함수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상태로 연산을 할 수 있기 때문. 기존 컴퓨터는 하나의 연산을 끝낸 후 다른 연산으로 들어가는 순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양자컴퓨터는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연산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큐비트 1개로 0과 1을 동시에 표시한다. 큐비트 2개라면 00, 01, 10, 11를 한꺼번에 표시할 수 있다. 따라서 엔(n)개 큐비트로 2의 엔(n)승만큼의 정보량 처리능력이 구현될 것이다. 이를 통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데이터를 동시에 병렬처리하게 된다.
수학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난제로 유명한 소인수분해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의 컴퓨터로는 ‘250디지트(digit : 2진 단위)’의 수를 소인수분해하려면 80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만약 ‘1000디지트’의 수라면 10의 25제곱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는 우주의 나이보다 많은 시간이다. 그러나 양자컴퓨터로는 몇 십 분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현재의 컴퓨터로는 해독하는데 수백년 이상 걸리는 암호체계도 양자컴퓨터를 이용하면 불과 4분 만에 풀어낼 수 있다고 한다.
양자컴퓨터는 그 개념이 일찍 등장한 편이지만,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과학적 한계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나노기술을 등에 업고 그 한계에 바싹 접근해가고 있다. 아마도 20년 후 쯤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능력을 보유한 차세대 컴퓨터(양자컴퓨터)가 탄생할 것으로 예측된다. 인간처럼 학습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컴퓨터까지 점쳐질 정도다. 슈퍼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누르는 전조(前兆)도 있었다.
최강의 컴퓨터, 양자컴퓨터가 실용화될 때 ‘인간보다 똑똑한 로봇’, 그래서 ‘인간을 지배하려는 로봇’이 등장한다면......
7장 나노의 역습 2030
나노 기계(로봇)들이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2030년 1월 1일 아침, ㄱ씨는 끝내 새벽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망 원인은 질식(窒息). 사람들은 경악했다. ㄱ씨의 폐암을 치료하기 위해 투입됐던 나노 캡슐(약물전달시스템)이 그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수 밀리그램의 항암제를 나눠 담은 나노 캡슐 수 백만개는 ㄱ씨 폐암 조직이 발산하는 신호를 따라 가서는 정확하게 약물을 투하했다. 수 일 뒤, ㄱ씨의 병세는 뚜렷하게 호전됐다. 2주 정도를 지나서는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노 캡슐 모두가 폐 깊숙이 암 조직에 도달한 게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나노 캡슐들은 서로 가장 비슷한 화학적 구조를 가졌기에 서로 뭉쳤다. 과학자들은 일부 나노 캡슐이 불량품이어라 하더라도 나노 단위의 초미세 분자이기 때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인체 면역체계에 의해 소멸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ㄱ씨의 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서로 뭉친 아주 조금의 나노 캡슐들은 ㄱ씨의 몸이 예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암세포였다. ㄱ씨의 면역체계는 당황했다. 항체들이 나노 캡슐 주위를 둘러싸고 공격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캡슐 주위로 생명을 다한 항체들이 쌓여갔다. 이 또한 새로운 형태의 찌꺼기였다.
찌꺼기가 불어나면서 주변 정상 세포가 손상되기 시작했다. 세포가 손상되면서 조직에도 문제가 생겼다. 조직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전체 폐 운동능력이 빠르게 위축됐다. 결국 그는 호흡을 이어가지 못했다.
과학자들도 당황했다. ㄱ씨가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특이체질일 것이라는 과학적 예측이 아닌 억측도 나왔다. 이미 폐암 치료용 나노 캡슐의 사용이 대중화한 상태여서 국가 기관도 크게 당황했다. ㄱ씨 유족들은 시신에 대한 훼손을 바라지 않았다. 정책 입안자, 과학자들이 회의를 열어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기적이고 원천적인 재고(再考)가 필요했다.
봇물 터지듯 항암제 투여용 나노 캡슐에 대한 거부반응이 속출했다. 정부 기관이 서둘러 나노 캡슐 유통을 막았다. 그러나 죽음 문턱에 바싹 다가선 말기 암 환자들의 항의가 들끓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이어졌다.
2030년 2월 1일 정오, ㄴ씨는 점심 식사 도중에 갑자기 심한 구토증세를 느꼈다. 이상하다고 느끼며 왼쪽 손목 피부 아래에 이식한 바이오(bio)칩을 휴대폰 창에 갔다댔다. 휴대폰 창에는 ‘특별한 이상 징후 없음’이라고 표시됐다. 정말 이상했다.
며칠 뒤, ㄴ씨는 구토증세가 가라안지 않자 병원을 찾아 정밀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식도에 알 수 없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의사들이 경악했다. 바이오칩이 인지하지 못할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기 때문.
몇 주 뒤, 화장품이 문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상대적으로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적었던 화장품용 나노 캡슐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 나노 캡슐이 여성의 피부 아래로 깊이 침투하면서 아주 뛰어난 기능성 화장품을 만들어냈지만, 모든 캡슐이 적당한 깊이에서 선택적으로 녹아주지 않았다. 일부 캡슐이 피부 아래를 지나 세포에까지 침투, ㄴ씨의 식도에 암을 유발했다. 바이오칩의 질병 인지기능도 새로운 형태의 암세포, 즉 통제되지 않은 나노 캡슐을 잡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안전성 검증작업에 소홀한 채 성급하게 상품화한 대가였다. 이후 나노 캡슐을 이용한 고기능성 화장품으로 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몇몇 회사들은 천문학적 소송비용으로 하나둘 무너졌다. 그 것은 마치, 아주 오래 전(前), 여성 가슴 확대수술에 쓰였던 각종 소재들이 일으켰던 소동의 재탕(再湯)인 듯 했다.
당초 화장품 회사에 고용된 과학자들은 나노 캡슐에 담은 고기능성 합성물들이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합성물들이 혈관이나 세포와 결합하기 전에 피부 각질 주변에서 분해 되는 실험결과를 내보였다. 그러나 자외선 차단기능 화장품에 채택했던 분말 형태의 산화아연은 인체에 무해할 것으로 여겼지만, 나노 입자 상태로 작아지자 일부 소비자들의 몸 안에서 과도한 반응을 일으켰다. 오히려 독(毒)이 됐다는 조사 결과들이 잇따랐다. 산화아연보다 더 강력한 자외선 차단기능을 발휘하는 나노 입자(분말)들도 문제였다. 소비자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초미세 공간 안에서 캡슐이 터져 분말이 폐 깊숙이 침전되고, 혈관과 세포로까지 옮겨갔다. 나노 입자들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정상세포와 결합했다. 결국엔 정상세포들이 썩어갔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신경세포들이 “나, 아파요”라는 신호를 보내기에는 나노 캡슐들이 너무 작았다. 그저 인체 면역시스템의 자동 방어능력에 맡겨 놓아야 했다. 그러나 기존 인체 면역체계들도 나노 미터의 작고 작은 기계(캡슐)들이 일으키는 미증유(未曾有)의 침공사태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하나 둘, 빠르게 정상세포들이 죽어갔다.
분말형 나노 입자들의 역습(逆襲)은 인류에게 가공할 위협으로 다가왔다. 과거, 건설 노동자들의 폐 깊숙이 들어가 질병을 일으켰던 석면을 건설재료로 쓰지 못하게 하는 식의 해결책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석면은 아예 사용을 막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인간의 통제권역에서 벗어나버린 나노 분말은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다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2030년 3월 1일, 긴급 유엔(UN) 총회가 열렸다. 각 국 대표들은 영상회의시스템 앞에 모였다. 그들은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나노 입자의 생산을 중단하자”며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미 나노 입자 제조기술이 널리 보급됐고, 거의 모든 산업에 나노 입자가 쓰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 모든 기업체와 상품들을 모두 쓸어 담아 폐기할 수 없었다. 아니, 나노 입자는 이미 ‘폐기되지 않는 재앙’이 되어 있었다. 유엔은 서둘러 세계 과학자들을 지원, 나노의 역습을 막아낼 수단을 강구하기로 결정했다. 유엔은 뒷북이라도 쳐야 할 상황이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유엔의 결의는 정치적인 제재로 이어지지 않았다. 일부 국가들은 비밀리에 분말형 나노 무기를 계속 만들고 있었다. 에이(A)국에서는 실험실에서 분말형 나노 무기가 누출돼 연구원이 시체로 실려 나왔고, 실험실로부터 반경 100킬로미터를 차단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에이(A)국에 집중됐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제재로 이어지지 못했다.
제이(J)국에서는 대기업 연구자였으나 자신만의 종교에 심취한 정신 이상자가 회사 실험실에서 독성이 있는 나노 분말을 몰래 들고 나와 지하철에 흩뿌렸다. 10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고, 300여 명이 정기 검진 대상으로서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됐다. 제이(J)국 정부에서는 사고 지역을 차단한 채 1주일 간 강력한 진공청소기를 동원해 청소(?)했다. 하지만 한 사회단체가 1년여가 지난 뒤 사고 지점을 정밀 검사한 결과, 독성 나노 분말이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사회에 심각한 걱정거리가 던져졌다. 몇몇 국가에서 생명공학 연구 중에 발견한 ‘예상치 못한 기능’을 가진 돌연변이 생명체들을 폐기하지 않은 채 나노기술을 이용, ‘원래 목적과 다른 형태’로 가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방어할 수 없는, 공격 여부를 인지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는 나노 생물학 무기가 출현했다는 소식에 세계가 미증유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 같은 소식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물, 불, 가리지 않고 수단을 강구하는 ‘집단’들에게 희소식이 됐다. 실제로 씨(C)국에서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억만장자가 나노 생물학 무기로 불손한 상상을 실천하려다가 덜미가 잡혔다. 그는 몇몇 과학자들을 돈으로 매수, 나노 생물학 무기를 만들려 했다. 뚜렷한 목적도 없었다. 새로운 무기를 이용해 더 큰 부(富)를 축적하거나, 모종의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주체할 수 없을 억만금을 가지고, 재미삼아,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일을 찾아 헤맸을 뿐이었다. 그저 장난처럼 역사 이래 기록된 적이 없는 생물체가 인류의 생명을 앗아갈 뻔 했다.
국제사회가 몇몇 불손한 의도를 가진 국가의 나노 생물학 무기 개발행위를 통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경제 제재와 같은 수단은 섣부른 자극이 될 수 있어서다. 해당 국가들은 강력한 외교적 카드로 나노 생물학 무기류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무기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쉽게 옮길 수 있으며, 살포가 간편하다는 점에서 더욱 인류를 떨게 했다.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넘어갈 때의 문턱(검색시스템)도 새롭고 다양한 종류의 생물체들을 구별해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굳이 사람이 옮길 필요도 없다. 수출·입 물품에 묻혀 쥐도 새도 모르게 국경을 넘나들 것이라는 우려가 분출했다.
한 번 사용된 나노 생물학 무기는 나름의 생태계를 형성해가며 지구 정복을 시작했다. 과학자들이 나노 생명체를 통제할 수단을 강구했지만,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다. 단세포 동물이 원시 지구의 주인이었듯, 어쩌면 그들(나노 생명체)은 새로운 지구를 만들어갈 씨앗일지도 몰랐다.
2030년 5월 1일, 나노 생물체의 가공할 위력이 다시금 입증됐다. 그들이 세상 어느 곳에나 설치돼 언제나 접속할 수 있는 컴퓨터 네트워크 안으로 스며들었던 것. 그들은 광속 네트워크를 타고 지구에 존재했던 어떤 종류의 단세포 동물들보다 빠르게 세계 곳곳에 퍼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과학자들은 “나노 생물체들과 기존 네트워크의 물질적 차이에 의해 유비쿼터스 컴퓨팅 시스템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믿지 못할 호언을 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간 나노 생물체의 종류가 무엇인지,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어떻게 통신망을 파괴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과학자들과 네트워크 관리자들은 문제가 발생하는 부분을 차단하고 제거한 뒤 나노 생물체에 감염되지 않은 깨끗한 시스템으로 바꿔나갔다. 참으로 눈물 겨운 노력이었다. 세계 질서와 대화의 근간인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를 보호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나노 생물체의 가공할 네트워크 파괴력이 알려지면서 해커들도 준동했다. 해커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강력한 파괴본능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노 생물체를 구해 네트워크 안에 풀어놓기만 하면, 해킹 완료! 해커들은 포털, 국가기관 인터넷 홈페이지 등 네트워크의 주요 로터리들은 선택해 나노 생물체를 담은 캡슐들을 집중적으로 투하했다. 주요 로터리에 접근하기가 어렵다손 치더라도 인근 네트워크를 감염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일단 나노 생물체 주입이 완료되면, 그 다음은 나노 생물체가 알아서(?) 네트워크를 망쳤다.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곳곳에 구멍이 생기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주문하지도 않은 상품이 배달되는 일은 가벼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ㄹ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홈(home) 네트워킹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집주인을 침입자로 간주,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나노 생물체에 감염돼 완전히 정신이 나간 홈 네트워킹 시스템은 집주인의 홍체와 지문, 고유 심장박동파장 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달려온 경찰의 비상조치로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홈 네트워킹 시스템이 집주인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를 거부했다.
심하게는 한 가정에서 홈 네트워크 시스템의 자동 공기청정 순환체계가 작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외부로부터 나쁜 공기를 끌어들이면서 가족 모두가 질식사하는 참사도 벌어졌다.
세계 여러 국가는 나노 생물체와 해커의 위협 앞에서 무력했다. 구시대 유물(?)인 유선전화 앞으로 달려가 국가 핫라인(hot-line)을 다시 개설해야 했다. 유비쿼터스 네트워크로는 언제 어느 곳에서 ‘구멍’이 생기고, 돌이킬 수 없는 오해(선전포고)를 불러오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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