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 사이언스: 3부-1
#4. 디비(DB)와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밀월(蜜月)
21세기 초, 컴퓨터 공룡기업인 아이비엠(IBM)은 데이터베이스를 비롯한 소프트웨어 사업전략의 초점을 ‘침투하는(Pervasive) 컴퓨팅’에 맞췄다. 그 목표는 ‘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것. 생활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컴퓨팅, 곧 유니쿼터스 컴퓨팅!
아이비엠과 함께 세계 3대 데이터베이스 메이커로 군림하는 오라클(Oracle),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를 비롯한 수많은 정보기술기업들도 ‘사라지는(disappearing) 컴퓨팅’이라거나 ‘보이지 않는(invisible) 컴퓨팅’이라는 형태로 유비쿼터스 컴퓨팅 세상을 겨냥한 기술과 제품(소프트웨어) 개발에 발 벗고 나섰다.
이 같은 기술 발전과 신제품에 힘입어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 관리, 활용 능력이 더욱 좋아질 것은 자명한 일. 방대하게 축적한 데이터 량을 바탕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가미해 전개될 기업의 마케팅 전략 앞에 소비자들의 주머니는 날로 가벼워 질 것이다. 또 소비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에 관한 정보(데이터)들이 거래를 통해 이리저리 옮겨지고 이용될 것이다. 차디찬 구조조정 바람 속에서도 금융권들이 정보화에 적극적인 것도 보다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 만큼 고객 공략이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수수료 인하에 인색하면서도 적극적인 정보화 투자를 감행하는 이유다.
2005년 3월 다국적 데이터웨어하우스 선두기업인 엔씨알(NCR) 테라데이타사업부는 ‘EDW(Enterprise Data Warehouse)의 신기원’을 선언했다. 대형 금융회사의 통합,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의 사용증가, 알에프아이디(RFID)칩의 등장으로 기업들이 감당할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데이터 관리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데이터 무한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익스트림(eXtreme) 데이터웨어하우징’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기업이 담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는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데이터웨어하우스 만들기가 본격화된 것.
이 같은 무한 데이터 관리개념의 등장은 기업의 인-하우스 데이터와 사회 공공재(公共材)로서의 데이터 경계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그 경계가 사라졌을 때 유니쿼터스 컴퓨팅 시대가 열릴 것이다.
데이터가 하나 둘씩 쌓이고, 그 양이 늘어나면 공공재(公共材)가 아닐까. 데이터를 끌어 모은 주체가 기업이라손 치더라도, 심지어 돈을 주고 사들였다손 치더라도, 그 쓰임새에는 ‘고객이 허락한 만큼만’이라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데이터 량이 늘어날수록 ‘허락한 만큼’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다. 특히 고객들 대부분은 애매모호하거나 이리저리 꼬아놓은 약관(約款)에 무기력하다. 귀찮아하며 쉽게 기업의 요구(약관)에 ‘동의’한다.
고객과 기업의 데이터 사용허가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정 기업이 끌어 모은 데이터는 또 하나의 자산(資産)이다. 기업의 자산은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만약 약 3000만에 달하는 국내 유선전화 가입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의 데이터를 특정 사업자가 독점한다면, 수 년, 아니 불과 몇 개월 내에 엄청난 부(富)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만도 아주 훌륭한 데이터인데다 그 양(약 3000만)이 엄청나기 때문. 특별한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냥 다른 이에게 넘겨준 후 사용료만 징수하더라도 가늠키 어려운 돈이 착, 착, 쌓일 것이다.
2005년, 케이티(KT)는 ‘KT 소디스’라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자사가 보유한 국내 유선전화가입자의 이름, 주소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의 주거변화(이사)를 신용카드회사, 공공기관 등에 통보해주는 서비스를 개발한 것. 이를 위해 고객들에게 경품을 제공해가며 ‘KT 소디스’ 서비스에 가입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벌써 개인 정보(데이터)에 관한 ‘공개 금지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개인에 관한 데이터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닌 세상’이 열릴 것이다. 아예 ‘비밀’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더욱 세밀한 데이터 공개·이용·판매 기준을 만들어야 할 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 관한 데이터가 거래되는 것,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 관한 데이터가 자동으로 분석되는 것,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구매행위가 예측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가장 많은 비밀(데이터)를 가진 자, 그가 곧 21세기 최고 권력가다.
(10장) 에베레스트 2020.
해발 5400미터. 베이스 캠프를 떠났다. 발걸음마다 뽀드득, 아니 파삭거리며 눈이 부서졌다. 바람에 눈 내린 표면이 얼어붙었기 때문인지 정겨운 소리(뽀드득)보다는 파삭, 파삭거렸다. 서울에 눈이 내린 지 오래 전이었기에 에베레스트가 빚어내는 자연(自然)의 소리와 느낌이 좋았다.
캠프 주변이라 눈은 많지 않았다. 약 72시간 동안 등반조건이 좋을 것으로 예측됐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미 10년여 전부터 산책을 하듯 편안하게 에베레스트를 오가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만든 등반로가 사람들을 혹독한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했다. 탄소나노튜브 등반로는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지난 10년간 에베레스트에 오르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 90대 중반의 노인이 해발 7800미터 지점에서 뜻밖의 심장마비를 맞이했던 것. 그의 죽음은 고지대 산소결핍증이나 동사(凍死), 눈사태 등 옛 에베레스트 등반길에서 흔히 일어났던 위협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집이나 도시, 캠프에만 있었더라도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에베레스트 해발 7800미터 지점의 탄소나노튜브 밖 자연 그대로의 트래킹 코스에 간단한 의료시설과 의료진이 없었다는 것, 그가 비상수단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특히 그는 디엔에이(DNA) 칩 진단을 통해 예고됐던 ‘90대 중반의 심장마비 가능성’에 대해 성실하게(?) 대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신을 돌보는 데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 관리소에서도 그에게 등반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지만, 그가 외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람들은 ‘요즈음 같은 시절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라며 헛웃음을 쳤다. 언론들도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란 듯 사회면에 작은 상자기사로 그의 죽음을 알렸다.
언론의 관심은 며칠 후 발견된 그의 유서에 집중됐다. 그는 요즈음 같은 시절에 걸맞지 않게도 종이 위에 연필로 유서를 썼다. 종이 위에 유서를 쓴 후 고색창연한, 거의 골동품 같은 나무상자 안에 담아놓았기 때문에 유비쿼터스 컴퓨팅 네트워크가 그의 자살 계획을 미리 감지하지 못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네트워크를 피해 자살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로 여겨졌다. 언론들은 ‘유비쿼터스 컴퓨팅 네트워크에 구멍’을 들먹이며 연일 들끓었다.
그는 유서에 ‘100년을 넘겨가며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에베레스트로 죽으러 간다. 나는 그 곳에서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질 것이다’고 썼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다. 그는 디엔에이 칩의 성실한(?) 원격 의료 관련 데이터 전송능력을 감안, 수 년 전부터 조금씩 자신의 심장이 약해지도록 내버려뒀다. 에베레스트의 탄소나노튜브 등반로의 구역별로 만들어놓은 ‘튜브 바깥 맛보기 코스’로 나가는 것(트래킹)을 허락받을 수 있을 만큼의 심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탄소나노튜브 등반로 밖 해발 7800미터 지점에서 산소마스크를 벗어버렸다. 아예 유비쿼터스 헤드셋을 벗어버림으로써 유비쿼터스 컴퓨팅 네트워크가 자신의 선택(자살)을 되돌리도록 설득하는 것을 차단했다. 그의 심장은 갑작스레 다가온 지구 3대 극한지역, 에베레스트 7800미터 지점의 차가운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지난 10년여 만에 에베레스트에서 뜻밖의 죽음을 맞이할 두 번째 사람이 될 확률은 거의 0퍼센트. 그걸 이유도, 위험도 없다. 에베레스트는 이미 특별한 산책코스 정도의 여행상품으로 대중화했다. 1991년 이이지마 박사가 철강보다 강한 탄소나노튜브를 발견했고, 이를 이용해 풍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에베레스트의 10개 등반코스에 튜브형 엘리베이터를 만들어놓았기 때문.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욱 정상까지 오르든지, 엘리베이터 옆으로 천천히 걸어도 좋았다. 탄소나노튜브는 남, 북극과 함께 3대 극한으로 여겨지던 에베레스트의 자연변화를 견뎌내고도 남을 만큼 강했다.
날씨가 좋을 경우에는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트래킹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됐다. 물론 위험지역이나 암벽에서는 전문 산악인들에게만 자연 그대로의 에베레스트가 허용됐다. 전문 산악인들에게도 기상변화가 심할 때에는 출입 자체가 봉쇄됐다.
회사 동료들은 휴가신청을 낸 나에게 “갑자기 웬 에베레스트? 얼마 전 신문에 난 노인처럼 자살하러 가는 건 아니지?”라며 우스개를 걸치기도 했다. 특히 탄소나노튜브의 보호막(엘리베이터) 바깥으로 트래킹을 몇 차례 시도한다고 얘기했을 때에는 “대단한다”는 탄성을 연발했다.
아내도 갑작스런 나의 에베레스트 여행계획에 잠시 눈길을 돌리기는 했지만, 곧바로 자신의 일 속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재밌겠네. 그런데 함께 가기는 좀 어렵겠다. 내가 요즈음 일이 밀려서......”라며 “오랜만에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겠네. 잘 다녀와”라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여전히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자연이었다. 거센 눈보라와 냉혹한 온도가 나를 3일 동안 캠프에 붙잡아 놓았다. 튜브 밖 트래킹을 신청했기 때문에 에베레스트 관리소로부터 ‘3일 후 날씨가 좋아질 때까기 대기하라’는 권고 조치가 나왔던 것. 권고조치는 말 그대로의 권고가 아니었다. 통제였다. 물론 튜브 안에서 안전하게 등반하는 것은 날씨에 관계없이 허락됐다.
가깝게는 에베레스트 주변, 멀게는 인도양까지 흩뿌려진 스마트 더스트(Smart Dust)들로부터 기후 예측용 인공위성을 거쳐 기상청 슈퍼컴퓨터로 모아진 데이터(Data)를 토대로 발표되는 예보(豫報)는 정확했다. 3일간 정상을 향한 길, 정확하게는 엘리베이터 바깥 길이 모두 폐쇄됐다. 전문 산악인들도 마찬가지여서 튜브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3일이 지나 날씨가 갰다. 캠프 관리소로 갔다. 관리인은 우선 나의 오른 손목 피부에 삽입되어 있는 디엔에이(DNA) 칩부터 스캔(scan)했다.
‘현재 37세. 앞으로 47세까지 특별한 질병 징후 없음. 5년 전 오른쪽 발목 인대에 문제가 있었으나 정상으로 회복. 등반을 위한 근력, 지구력, 균형감각 오케이. 정신질환 병력 없고, 징후 없음.’
스캔 결과는 푸른 색! 최소한 튜브 바깥 등반도중에 심장마비를 일으키지는 않을 상태였다.
다음은 옷, 등반용 장비, 신발 등에 들어가 있는 각종 칩(chip)의 작동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스캔. 거의 모두 정상이었다. 다만 옷 안쪽에 장착된 습도 조절용 나노 칩 일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리소가 대여하는 방한복으로 갈아입었다.
헤드셋 통신상태 오케이! 출발!
에베레스트, 로체, 마칼루, 초오유 등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남쪽 트래킹 로드를 선택했다. 트래킹 후 남동릉을 따라 정상까지 이어지는 코스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발 6000미터까지 갔다. 남동릉을 선택한 옛 등반가들이 첫 번째 난관으로 맞닥뜨렸던 ‘아이스 폴(Ice Fall)’이 있는 곳. 이 곳에서부터 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인 ‘웨스트 쿰’을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구역. 나는 아이스 폴 지역의 거대한 빙벽을 사다리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해발 8000미터 지점의 ‘남쪽 안부(South Col)’에서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이후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길에서 100미터 정도를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걸어볼 수 있을 지는 날씨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모든 트레킹 루트에서는 튜브 엘리베이터 옆을 따라 움직이는 ‘생명 줄’을 허리에 연결해야만 한다. 생명 줄 역시 탄소나노튜브로 만든 것으로 자연이 만드는 충격에 끊어진 사례가 없다.
해발 6000미터 트레킹 허용 구간.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기기 전, 다시 한 번 각종 장비와 칩의 작동상태를 검사했다. 신체리듬도 정상인 것으로 나왔다. 편안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튜브 출입구가 열렸다. 자연 속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멀리 정상 위로 실을 몇 가닥 펼쳐 놓은 듯 구름이 흘렀다. 아름다웠다.
특별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출발한 등반객들은 삼삼오오, 혹은 둘씩 점을 이루며 걷어 오르고 있었다. 조금 더 멀리로는 나처럼 홀로 출발한 등반객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빙벽(아이스 폴)이 앞을 가로막았다. 헤드 셋 안면부 창(디스플레이)에 빙벽용 사다리 매뉴얼을 올렸다. 빙벽 속 스마트 더스트들로부터 ‘눈사태 위험 없음, 서 있는 곳으로부터 우측 20미터 지점이 안전’하다는 메시지가 눈 앞 창에 떠올랐다. 배낭에서 사다리를 꺼냈다. 빙탑의 높이는 30미터 정도. 사다리를 빙벽 아래쪽에 꽂았다. 쑤욱, 블루투스(Bluetooth)로 사다리 높이를 조절해 그 끝을 빙탑 언저리에 걸쳤다.
사다리에 첫 발을 올려놓으려는데, 서울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왜?”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아이스 폴 앞이네...... 위로 올라간 후 가까울 것 같다고 좌측으로 치우쳐서 걸으면 많이 힘들겠다. 그 곳에 쌓인 눈들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빙되어 있는 것으로 나오네. 아마 발이 깊이 빠질 거야.”
“응, 봤어. 우측으로 조금 돌아가듯 걸어갈 생각이야. 집엔 별일 없지?”
“응. 조금 심심한 것 빼고는...... 위성영상으로는 자기가 실제보다 조금 더 뚱뚱해 보인다.”
“......”
“해발 8000미터 이후로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가는 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왜, 남편이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할까 걱정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정상 부근은 워낙 날씨 변화가 심하잖아. 혹시 예전에 다쳤던 발목이라도 접질릴까봐......”
“너무 걱정하지 마. 조심조심 걸어갈 생각이니까. 그 정도로 바람이 심해지면 아예 통제되겠지.”
“그래, 그렇겠지. 여하튼 조심하고, 즐겁게 보내.”
빙벽 위로 올라섰다. 산사태 예고지수는 여전히 ‘0’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만일 예고와 달리 산사태가 시작되면 관리소 측에서 자동으로 나의 생명 줄을 되감을 것이었다.
즉흥적으로 관리소 측에 “이 구간에서 헤드 셋을 20분간 열고 해발 6000미터 이상 고지대의 희박한 산소를 체험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관리소 측에서는 원격으로 나의 디엔에이(DNA) 칩으로부터 현재의 건강상태, 산소결핍증으로 고통 받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 전문 의료진 의견 등을 취합했다.
5분쯤 지났을까. 관리소로부터 ‘15분 오케이’ 사인이 전송되어왔다. 대신 헤드 셋 산소호흡기 개폐를 관리소에서 통제하기로 했다. 지난번 에베레스트 자살사건 이후로 헤드 셋 산소호흡기 온·오프를 관리소에서 직접 통제하게 됐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곧 눈 주위만 남긴 채 코 아래 부분이 드러났다. 눈 앞 창에는 산소호흡기 오픈 타이머가 떴고, 15분 카운트를 시작했다.
훅, 차갑고 차가운 공기가 코와 잎을 통해 목 뒤로 넘어갔다. 걸음마다 훅, 훅, 힘겨운 호흡이 이어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디엔에이 칩으로부터 부지런히 나의 신체상태가 점검되면서 창에 떴고, 동시에 관리소로 송신됐다. 관리소에서 나의 헤드 셋 안면부에 ‘8분 경과’ 메시지를 띄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견딜만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면서 호흡이 더욱 턱 밑을 쳐 올렸다. 헤드 셋 안면부에 노란색 등이 켜졌다. 노란색 등이 켜진 후로는 관리소에서 언제든지 열린 산소 호흡기를 닫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눈 앞 창에 떴다. 발걸음이 천근 만근이었다. 산소 호흡기가 아쉬웠다. 무엇보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그야말로 혹독했다. 하지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잘 버텨야만 추가로 신청한 ‘해발 8000미터 지점의 100미터 트레킹’에서도 에베레스트의 극한 자연을 산소 호흡기 없이 맛볼 수 있을 것이었다.
몇 분이 더 지났을까. 차디찬 바람과 가쁜 호흡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 됐을 즈음, 헤드 셋이 얼굴 전체를 다시 덮었다. 산소 공급도 재개됐다. 털썩, 주저앉아 산소를 마셨다.
“대단한데, 15분을 다 버텨냈어.”
서울의 아내였다. 모니터를 통해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후~ 쉽지 않네. 뭐랄까. 가슴이 콱 틀어 막히는 느낌이었어.”
“너무 무리하지는 마. 몸 상할라.”
해발 8000미터 지점. 다시 트레킹 코스. 이 곳부터는 탄소나노튜브 바깥으로 20미터 이상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할 날씨 변화와 거센 바람 때문이었다.
에베레스트 관리소에서는 마지막으로 내 몸을 검색했다. 이번엔 정신 상태 분석을 위한 간단한 질문들도 있었다.
몇 분 뒤, ‘마지막 체험코스, 트레킹 오케이!’
튜브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것인지 모를 거센 바람이 몸을 휘감고는 돌아나갔다. 발걸음이 만년설에 푹, 푹, 박혀서는 다시 뺄 수 없을 듯 힘에 겨웠다.
‘어디… 한 번 만용을 부려볼까.’
관리소에 다시 ‘산소호흡기 없는 트레킹’을 신청했다. 관리소에서는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허락하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다시 ‘해발 6000미터 트레킹 코스에서의 무산소 등반 경험’을 내세워 ‘단 몇 분만이라도 무산소 트레킹을 바란다’고 요청했다.
몇 분 뒤, 눈 앞 창에 ‘3분 오케이 사인’이 떴다. 헤드셋의 코와 입 부문이 다시 턱 밑쪽으로 철커덕 내려갔다.
콱, 가슴이 답답해지며 호흡이 힘들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이 그야말로 천근만근이었다.
1분쯤 지났을까. 희박한 산소 탓인지 머리가 띵띵 거렸다. 심한 어리러움, 턱을 치받는 호흡, 3분은커녕 2분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관리소에서 눈 앞 창에 노란색 경고등을 켰다. 2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할 것 같았다.
2분쯤에 가까워졌을까. 관리소로부터 ‘10초 뒤 산소 호흡기를 재가동하겠다’는 메시지가 왔다. 10, 9, 8, 7, 카운트 다운.
마음으로 카운트 다운을 따라갔다.
‘5, 4. 3….’
헤드 셋 코와 입 부문이 산소 호흡기로 다시 덮이려는 순간, 두 손으로 턱 밑쪽을 감싸 쥐었다. 산소 호흡기가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그 자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관리소 담당자가 깜짝 놀랐는지 창에 문자를 띄우지 않고, 직접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음산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지긋이 내려누르는 듯한 조명 아래에서 그의 턱 선 각이 더욱 예리해졌다. 차갑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습니까. 자살이라도 하려던 겁니까?”
“…….”
나는 에베레스트 해발 8000미터 지점 트레킹 코스에서 헤드 셋 턱밑을 부여잡은 채 정신을 잃었다. 에베레스트 관리소에서는 나노 섬유 구난(救難) 줄을 되감아 지일, 질 나를 탄소나노튜브 등반로 안으로 끌어넣었다.
나는 말했다. “내가 그곳에서 죽든 살든 내 마음대로 아닙니까”라고.
그의 두 눈이 각각 좌우로 길어질 수 있을 만큼 길어졌다. 그리고는… “당신, 당신 같은 사람들, 정말 큰 문제야. 흐리멍텅한 생각, 흐리멍텅한 목적으로 무조건 자유롭게 살겠다는 족속들 말이야.”
“자유롭게 살겠다기보다는… 그냥 그 순간에 통제받기가 싫었을 뿐이오.”
“그럼 아예 모든 네트워크로부터 벗어나 깊은 산 속으로 가서 살지? 왜 엉뚱한 짓을 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 속을 끓이는 거야.”
그의 핏대가 섰다. 흥분하면서 존댓말도 사라졌다.
“내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당신네들이 내가 어느 산으로 들어갔고, 하루에 어디에서 어디까지 움직였고, 무슨 일을 했는지 모릅니까. 내가 내 피부 안쪽에 이식된 신분증(디엔에이칩)을 마음대로 뺄 수 있나요. 당신은 그럴 수 있나요? 나는 다만 순간순간 내 자유의지를 선택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슨 벌레 보듯 몰아붙이지 마세요.”
“정부가 만든 개인정보보호법을 모르나?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도 당신의 데이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어. 그 정도면 당신이 바라는 순간순간의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것 아닌가?”
“그게 억지라는 것 모르세요. 물론 정부든 기업이든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겠지.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나를 관찰하고, 나에 관한 데이터를 조작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신문에도 정부가 주요 인사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데이터를 ‘블랙리스트 파일’로 관리해온 것이 사실로 드러났지 않았습니까. 나는 일종의 항의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건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위한 최소 조치였어. 그 조치가 당신 같은 정신병자까지 포함하는 것도 아니야.”
“어찌됐든, 나는, 당신네들의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게, 모든 데이터가 한 눈 아래에 놓이고, 마음먹기에 따라 비밀리에 데이터를 이렇게, 또는 저렇게 조율할 수 있는, 이 망할 전체주의가 싫소.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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