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먼지떨이] 제주역사기행
요즈음 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한겨레신문사·2004년)’을 가까이에 두고 쉬엄쉬엄 읽는다. 그러다 깜짝 놀란 것 하나, 제주가 1275년부터 100년 동안이나 원(元)의 직할지였다는 사실. 몽골 사람이 직접 관할한 땅이었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그렇게 배운 기억이… 없다. 놀란 것 하나 더, 제주 사람에게 고려든 몽골(元)이든 모두 ‘외세’였다!
깜짝 놀란 이유? 지은이의 지적처럼 중앙, 즉 권력 중심의 역사만 배운 탓이다. 제주 같은 변방과 그곳에 살던 사람의 이야기는 한국사 교과서에서 소외됐다.
“아빠, ‘비석거리’가 비석치기 하던 거리야?”
2010년 8월 21일. 또는 22일. 조천비석거리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화북비석거리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도로표지판이 내 눈에 들어왔을 때, 시우가 그렇게 물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건가.”
어릴 때 동네 어귀에서 친구와 작은 돌 몇 개 세워놓고 놀아본 기억(비석치기)은 있지만, 그 놀이가 비석 세워둔 거리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비석치기’라는 게 정말, 민중이, 탐관오리를 기리는(?) 비석(碑石)에 침을 뱉거나 돌멩이로 성씨(姓氏) 부문을 뭉개버렸던 데서 유래한 모양이다. 화북비석거리에 나란히 선 비석의 성씨 부문이 모두 뭉개져 있단다(136쪽).
조천과 화북이 옛 제주를 들고나는 관문이었기에 지방관리가 중앙권력(임금)의 눈에 띄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세운 ‘스스로 선정(善政)을 기린 비석’이 많다는 것. 지은이는 ‘헛된 명예를 위해 애꿎게 석공만 괴롭힌 사람(132쪽)이 많다’고 짚었다.
“어, 시우야! 비석치기가 비석거리에서 하던 놀이가 맞네.”
서울로 돌아온 9월 어느 날, 나는 ‘제주역사기행’ 속 조천·화북비석거리에 맺힌 옛 이야기를 읽고는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양 옆에 있던 시우에게 말했다.
“저도 알아요~!”
녀석, 얼굴도 돌리지 않은 채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는 투다. 하! 이미 “책에서 봤다”고 했다.
조천(朝天) 포구에는 ‘북쪽을 사랑하는 정자’가 있었다. ‘연북정(戀北亭)’이다. 조선시대 제주 지방관에게 ‘북’은 곧 임금이자 중앙 권력이었다.
제주 지방관이 일하던 관청에는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도 있었다. ‘망경루(望京樓)’다. 제주 관청 건물 가운데 가장 컸단다.
누각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문이나 벽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이다. 서울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울과 북쪽만 그리워한 탓일까. 지은이는 “제주에 온 지방관들이 선정을 펴는 경우가 드물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것만이 주된 관심사였다”고 썼다. 그 시절 “제주 지방관은 부임 자체가 좌천이었다. 중앙 정계 복귀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니 목민(牧民)은 뒷전이었다(131쪽)”고 풀어냈다.
권력을 좇아 위만 바라보는 족속 때문에 여럿 힘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곳의 풍토와 인물은 아직 혼돈 상태가 깨쳐지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저 일본 북해도의 야만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추사 김정희의 제주에 관한 지독한 편견(127쪽)이다. 제주에 가기 싫었던 중앙 관료의 애환(?) 같은 게 이 같은 첫인상으로 발현한 모양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김정희는 제주에서 거듭났다. 그 유명한 ‘추사체’가 제주에서 완성됐다(157쪽)고 썼다. 제주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특정 글씨체에 구속됨이 없이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제주역사기행’에 쓰인 김정희의 삶 곳곳에서 드러나는 사대주의와 중앙 권력을 향한 미련을 접한 뒤로 그를 완전히 동정할 수 없었다.
2010년 11월 18일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가 ‘제주유배문화의 녹색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 일환으로 ‘추사의 길’을 열었다. 김정희의 제주 대정 유배지를 중심에 두고 세 갈래로 걷는 길을 개발했단다.
그 길의 중심에 추사 기념관도 있다. 2010년 8월 26일 비를 뚫고 그 기념관에 갔다. 넓은 데 볼 게 많지 않았다. 그나마 대부분 모조품이었다.
‘제주역사기행’은 추사 김정희의 발길을 더듬는 여행에서 꼭 챙겨야 할 품목이다. 발걸음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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