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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위에 김대현이 앉아 있었다

eunyongyi 2026. 4. 2. 21:46

바로 거기, 전주고 교문

제61회 전국체전이 전주에서 열렸다. 1980년 시월 8일부터 13일까지 엿새간. 다른 건 모르겠고 그저 고교 야구. 특히 인기가 몰려 가장 높은 곳에 닿은 선린상고 2학년 박노준과 김건우가 그달 10일 전주시 덕진동 공설 야구장에서 경북고와 8강전을 치른다는데 어찌 집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야구장으로 갔다. 길머리 사람 수가 생각보다 적고 되돌아오는 이도 보여 못내 찜찜하더니 역시나 야구장에 방이 붙었다. 경기 치를 곳을 전주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바꿨다는 것. 1980년다웠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나. 3.3킬로미터 떨어진 노송동 전주고로 우 몰려갔다.
이미 시작된 경기. 관람객 많은데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 키 큰 어른 어깨만 보였다. 전광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몇 회 몇 점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른 어깨만 보고 돌아설 수 있나. 나는 어른 허리춤 사이를 비집고 우익수 뒤쪽으로 갔다.
‘이게 뭐야. 설마 이게 담장이야?’
외야를 플라스틱 끈 두어 개로 둘러쳤을 뿐 울타리가 없었다. 초교 6학년 어린이가 보기에도 그건 야구장 외야 담장이랄 수 없겠는데 웬걸, 선린상고 우익수 김건우가 바투 보여 좋았다. 나도 경기장 안에 함께 서 있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김건우 다리 사이를 지나친 야구공이 내 앞으로 굴러왔다. 공을 잡았다. 두 손으로. 플라스틱 끈 바로 아래에서.
“야호, 내 공이다!”
내가 웃고 둘레 어른이 웃었다. 부러워하는 목소리도 들렸고. 다리 사이로 공 빠뜨린 김건우도 웃었다. 플라스틱 끈 담장이 어이없었을 터.
알다시피 이런 흐름은 ‘인정 2루타.’ 경북고 타자가 2루로 뛰어가는 사이 나는 뒤로 물러나와 야구공 잡은 기쁨을 누렸다. 서슴없이 웃으며. 공 쥔 오른손을 마른하늘로 휘두르기도 했고.
“야, 인마, 공 이리 가져와!”
난데없는 소리에 돌아보니 전주고 교문 기둥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전주고 야구 모자를 쓰고. 전주고 유니폼까지 입어 그가 선수인 걸 알게 했다.
나는 얼굴 찌푸리며 “왜요?”라고 되묻긴 했되 “이 xx가, 빨리 안 가져와!”라는 서슬에 공을 던져 주고 말았다. 겨를 없이 공을 내준 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붙박였다. 분해서. 그렇다고 그에게 주먹 쥐고 달려들 수 있나. 그는 고등학생, 나는 초등학생. 둘레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1980년다웠다.

▴야구 선수 김대현이 앉아 있던 전주고 교문 기둥. 오른쪽 기둥 위에 앉아 선린상고와 경북고 경기를 바라봤다.

곧 잊었다. 공 하나 빼앗긴 걸 두고 어디 몸져누울 일인가. 금세 잊었되 하나 새긴 건 있었다. 힘 좀 있다고 함부로 빼앗아선 안 된다는 거.
쭉 잊고 살았다. 1987년 여름까지. 어느 날 ‘타이거즈’ 경기를 중계하는 티브이에서 그를 다시 봤을 때까지. 보자마자 대번에 알아봤다. 전주고 교문 기둥 위에 앉아 있던 야구 선수. ‘투수였구나.’ 그날 이름도 알게 됐다. 김대현. 전주고와 원광대를 거쳐 1986년 타이거즈 야구단에 들어간 투수.
티브이를 바라보는 눈길 따라 마음이 여러 갈래로 얽혔다. 응원하는 야구팀 투수가 오래전에 내 야구공 빼앗아 갔기에. ‘계속 응원해? 아니, 괘씸한데 어떻게 응원까지 해. 그래도 잘 던져 주면 타이거즈에게 좋잖아.’
곧 크게 놀랐다. 이듬해인 1988년 팔월 27일. 선발 10승을 바라보던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다음 경기를 위해 광주에서 서울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 뭐라 말하거나 생각나는 것 없이 그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미리 헤아릴 수 없는 사람 삶. 무거움.
야구가 다시 뜨거워진 계절. 2026년 사월 1일 오전 10시 28분께. 나는 야구 선수 김대현이 앉아 있던 전주고 교문 앞에 다시 섰다. 46년 만에. 1980년과 김대현을 짚어 보고 내 삶을 되짚었다. 바로 거기, 전주고 교문 앞에 다시 붙박였을 때 내 옆을 지나치던 한 분께 물었다.
“선생님, 혹시 여기 이 교문 기둥이 자리를 옮긴 적 있습니까.”
“아니오. (소병민 중령 동상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이쪽 담벼락을 다 허물긴 했지만 교문은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죠.”

▴2026년 4월 1일 오전 10시 28분 전주고 교문 앞. 1980년 10월 10일 오른쪽 끝 기둥 위에 야구 선수 김대현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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