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고등고시 출신은 왜 서럽다 하는가
“이제 일어나셔야죠. 다섯 시 삼십 분입니다.”
번쩍 눈을 떴으되 절로 끙, 하며 모로 웅크렸다. 누가 정과 망치를 들고 머리 여기저기를 미리 톡톡 쪼아 두기라도 한 양 숙취가 한꺼번에 두통으로 쏟아졌다.
2006년 4월 15일. 토요일. 충남 천안 상록리조트 318호실. 그의 말처럼 새벽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그와 나는 간밤에 한 시를 넘겨 각자의 잠자리로 들었다. 그런데 놀라웠다. 그는 벌써 방 밖으로 나갈 단장을 끝낸 게 아닌가. 불과 서너 시간만 잤음에도 그는 생생했다. 그때 그는 쉰. 서른여덟인 나의 숙취가 겸연쩍었다.
“국장님, 참 대단하십니다. 저는 제가 먼저 일어날 거라 예상했거든요.”
“어휴, 저도 지금 거의 죽을 맛입니다.”
옛 과학기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의 ‘기계소재심의관(2004년 11월~2006년 11월)’이었던 그, 나경환은 짧게 엄살을 부렸으되 그저 허허 웃었다. 거뜬해 보였다.
기계소재심의관은 국장급 고위 공무원.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등 노무현 정부(2003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의 기술·산업 관련 주요 중앙행정기관이 기계소재 분야 연구개발사업에 쓸 한 해 예산안을 미리 살펴 심의·조정·분배하는 자리였다. 그는 박정렬 정보전자심의관, 김정희 생명해양심의관, 한문희 에너지환경심의관과 함께 임상규 당시 과학기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을 보좌했다. 본부장은 차관급으로 그 직위가 매우 높았다.
나경환 당시 기계소재심의관과 나는 그렇게, 충남 천안 상록리조트에서 4월 14일 오후 여섯 시쯤 시작해 1박 2일 동안 열린 ‘과학기술 언론인 정책토론회’의 새날을 맞았다. 하룻밤 방 짝이었던 것. 14일 저녁 토론회에선 이덕환 서강대 교수의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과학기술 커뮤니케이터 육성 방안’ 특강과 임영모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의 ‘연구윤리·진실성 확보 방안’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과학기술계 연구 부정행위의 역사와 원인, 이를 막아내기 위한 여러 나라의 노력을 알아보고, 연구 윤리와 진실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체계를 찾는 게 토론회 목표였다. 김우식 제2대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2006년 2월~2008년 2월), 임상규 초대·제2대 과학기술혁신본부장(2004년 10월~2007년 1월), 박영일 제23대 과학기술부 차관(2006년 2월~2007년 7월)을 비롯한 과학기술부 주요 간부와 출입기자들이 참석했다. 특히 2005년 말에서 2006년 초로 이어진 ‘황우석의 줄기세포 거짓 논문 사건’이 한국과 세계 과학계를 크게 흔들어 놓은 뒤인 터라 토론회 열기가 뜨거웠다. 그 열기만큼이나 밤 10시께 시작한 뒤풀이도 뜨거웠기에 새날 아침까지 숙취를 남겨야 했다.
나경환 심의관과 나는 이튿날(15일) 토론회 종합 발표·토론 일정과 겹쳤으되 따로 정해둔 각자의 약속을 좇아 새벽같이 리조트를 나서야 했다. 아침에 누가 먼저 일어나든 서로를 깨워주기로 약속한 이유였다. 그는 생생했고, 나는 숙취에 허덕였다.
나경환……, 한국 고위 공무원은 매우 강했다. 그를 강하게 만든 힘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경환과 기술고등고시 15회, 한국 공무원 사회를 비추는 특이한 거울
나경환의 공직 생활은 이채롭다. 한양대학교 기계공학과(76학번)에 재학하던 1979년, 제15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했음에도 공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공부를 한 것. 1982년 6월부터 1983년 8월까지 1년 3개월간 옛 과학기술처(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5급 기계(機械) 사무관’으로 일하기는 했으되 “공무원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단다. 그러고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갔다. 고등고시에 합격했기에 앞으로 나아갈 길이 유망한 보통의 ‘중앙행정기관 5급 사무관’과는 뚜렷이 다른 행보였다. 그의 이런 선택이 기술고등고시 출신이 여러 중앙행정기관 안에서 맞닥뜨리게 마련인 ‘행정고등고시의 벽’ 때문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허나 기술고등고시 출신 공무원은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한 이들보다 수적으로 열세여서 고충(?)이 컸다. 정부가 1964년부터 행정고등고시와 기술고등고시를 시행했으되 행정고등고시 출신이 더 자주 더 많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71년 제6회 기술고등고시로 23명이 배출됐을 때 제10회 행정고등고시로는 204명이 나왔다. 특히 1973년에는 제9회 기술고등고시를 통해 15명이 배출됐을 때 제13, 14회 행정고등고시 합격자로 각각 117명과 147명이나 뽑혔다. 한 해에 행정고등고시를 두 번 치른 거다. 1974년에도 제10회 기술고등고시 합격자는 15명에 불과했으나 행정고등고시로는 제15회에 73명, 제16회에 82명이 합격했다. 이런 흐름이 행정고등고시와 기술고등고시 출신을 암묵적인 ‘주종’ 관계로 내몰았다.
나경환을 비롯한 87명이 제15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한 1979년에도 행정고등고시는 이미 23회째였고, 256명이나 뽑았다. 2008년 5월부터 한나라당 소속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승덕(1978년 제20회 사법시험과 1979년 제13회 외무고시에도 합격), 2010년 8월 행정안전부 제1 차관이 된 김남석, 2011년 1월부터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석동, 제9대 대전광역시 시장(2006년 7월~2010년 6월)을 지낸 뒤 제19대 국회에 진입한 박성효(새누리당) 등이 행정고등고시 23회다. 2007년 1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합류한 뒤 이명박 정부에서 줄곧 요직을 맡은 데 이어 2011년 6월 제3대 기획재정부 장관이 된 박재완, 2010년 8월부터 2011년 6월까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뒤 제18대에 이어 19대 국회에 진입한 유정복, 제28대 법제처장(2008년 3월~2010년 8월)이었던 이석연(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도 합격)도 23회 출신이다. 이처럼 행정고등고시 23회에는 중앙행정기관에서 차관급 이상 정무직 공무원이 된 사람이 많다. 하지만 같은 해 공직에 발을 들인 기술고등고시 15회에는 드물다. 차관급 직위인 제28대 산림청장(2009년 1월~2011년 2월)을 지낸 정광수 외에는 정무직 공무원이 된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기술고등고시 출신 공무원에게 행정고등고시 출신 동료는 좋은 보직과 승진을 가로막는 실질적인 벽이었다. 같은 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물론이고 위아래 행정고등고시 출신에 치였다. 행정고등고시 출신과 함께 승진 경쟁에 나섰을 때 기술고등고시 출신 후보자의 승률이 떨어진 만큼이나 한숨도 깊었다. 1978년 제14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과학기술부·청와대·교육과학기술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무직(장·차관)에 오르지 못하고 ‘가급(옛 1급)’ 직위인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정책실장에 머문 김영식이 좋은 예다. 김 실장은 자신보다 1년 늦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한 박영일이 과학기술부 제23대 차관에 오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중앙행정기관의 가(1)급 상당 직위가 기술고등고시 출신의 일반적인 한계로 여겨졌다. 차관을 지낸 이가 드물었고, 장관은 희귀했다. 더구나 2003년 12월부터 행정고등고시와 기술고등고시를 ‘행정고등고시’로 통합한 뒤 행정·기술 직렬로만 구분하면서 ‘기술고등고시 출신’의 명맥이 모호해졌다. 이후로는 ‘기술직’ 공무원이 온전한 ‘행정고등고시 출신’으로 인지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정통(?) 행정 관료’라는 행정고등고시 출신의 영향력이 기술고등고시 공무원을 짓눌렀다.
아무튼 나경환은 1983년 8월 과학기술처를 떠나 KIST에 합류한 뒤 1989년 12월까지 선임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 사이 KAIST에서 생산공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박사 학위까지 땄을 정도니 평생 연구원으로 살아갈 생각인 듯했다.
1989년 12월에는 새로 문을 연 한국생산기술연구원(KITECH: Korea Istitute of Industrial Technology)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KIST에 있을 때 KITECH 설립준비위원회에 참여한 게 인연이 됐다. 이후 2004년 11월까지 약 14년 동안 KITECH 수석 연구원, 부품소재개발센터장, 선임 연구본부장 등을 맡았다. 1994년 1월부터 1년간 일본기계기술연구소(MEL)에서 초빙 연구원 생활도 했다.
2004년 11월이었다. 나경환은 갑자기 공직으로 돌아갔다. 노무현 정부의 과학기술부가 공개 채용한 ‘과학기술혁신본부 기계소재심의관’에 지원해 뜻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과학기술부를 출입(2004년 2월~2006년 10월)하던 나의 취재 영역과 나경환의 업무 공간이 겹쳤다.
“왜 다시 공무원이 됐어요?”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해 만 47세였던 나경환은 KITECH 선임 연구본부장(2001년 10월~2004년 11월)이었다. 연구원이라기보다 이미 관리자의 길로 들어선 상태였다. 따라서 그가 공직에 복귀한 이유로 내세운 ‘작은 보탬’은 ‘오랜 연구개발 경험을 과학기술행정에 활용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경환은 지금(2013년 1월) KITECH 제9대 원장이다. 2007년 9월 제8대 원장에 취임해 임기 3년을 채운 뒤 2010년 10월 28일 제9대 원장까지 맡았다. 2004년 11월 공직(과학기술혁신본부 기계소재심의관)에 복귀해 2년간 일한 뒤 2007년 3월부터 8월까지 과학기술부 산하 한국과학재단의 국책연구본부장을 맡았던 게 KITECH 원장을 향한 도약대가 됐을 것으로 보였다.
그가 2013년 10월 27일까지인 제9대 KITECH 원장 임기를 다 마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명박 정부(2008년 2월 25일~2013년 2월 25일)와 새누리당의 정치적 선택에 따라 언제든 자리를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 여하튼 나경환 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자리를 빼앗기지 않은 채 임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같은 직위에 연임한, 몇 안 되는 국책 연구기관장이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모두 능력을 인정받은 희귀종인 셈이다.
지난 2008년 정부 산하 기관과 국영 기업(공사)에 몰아쳤던 이명박 정부의 ‘노무현 정부 사람 떨어내기 한파’를 헤아려 볼 때, 나경환 원장은 ‘적어도 정치적으로 무난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공직에 여러 번 들고난 이력은 그의 앞날을 계속 지켜볼 이유가 됐다. 나경환의 삶에 한국 공무원 사회의 여러 곡절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품은 여러 곡절은 곧 한국 관료 사회의 ‘옳고 그른 생태’를 비추는 거울이자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지표로 쓰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파란만장한 기술고등고시 15회
어느 인생에나 곡절이 많고 변화가 심하게 마련이지만, 나경환 원장을 비롯한 기술고등고시 15회는 그 면면이 색달랐다.
조영주 옛 KTF(지금은 KT에 합병) 사장. 그는 1979년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체신부에서 일했고,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지금의 KT)에 들어갔다. 스스로 입사한 것은 아니었고, 1982년 1월 1일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출범했을 때 체신부 아래 153개 전신·전화 관련 기관에서 공사로 옮겨간 공무원 3만5225명 안에 조영주도 있었다.
전신·전화 업무를 하던 이는 한국전기통신공사로 가고, 우편 업무를 맡았던 사람은 체신부에 남았다. 기술고등고시 15회에서는 김기열·노태석·박유호·배상석·서광주·송상헌·윤종록·정수성·조영주·김용현이 가고, 김승호·김승환·김원식·이근협·이재홍은 남았다. 체신부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옮겨간 여러 직원은 공무원 신분을 잃은 것을 크게 걱정했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부(1980년 9월 1일~1988년 2월 25일)의 서슬에 눌려 언감생심 누구 하나 제대로 잡음(?)을 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조영주가 전라남도 나주전화국 국장이었던 1990년 12월 10일.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노태우 군사정권(1988년 2월 25일~1993년 2월 25일)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회사 이름을 ‘한국통신’으로 바꾸었다. 조영주는 이후 한국통신 IMT(3세대 이동통신) 사업기획단장(2000년~2001년), KTF 수석부사장(2003년~2005년 6월)을 지냈다.
2005년 7월. 당시 한국 제2 이동통신사업자인 KTF의 대표이사 사장이 된 조영주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가깝게는 KTF 모(母)기업으로서 2002년 5월 공공 기업에서 민영 기업으로 거듭난 KT(옛 한국통신)의 사장, 멀리로는 정계(政界)에 진출하거나 정보통신 분야 기술·산업·시장 진흥과 규제를 한꺼번에 맡았던 정보통신부 장관을 꿰찰 것으로 점치는 이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특히 2005년 1월부터 1년여간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에서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강철이 조영주 사장의 계성고등학교 선배였던 게 ‘세간의 앞날 예측’에 살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영주의 밝은 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KTF 사장이 된 지 3년여 만인 2008년 9월 19일. KTF에 이동통신서비스용 중계기(휴대전화 등의 통신 신호를 수신한 뒤 증폭해 다른 통신기기에 전달해주는 장치)를 납품하던 한 업체 사장으로부터 제품 공급 계약 유지 청탁에 따른 뒷돈을 받은 혐의를 지고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사흘간 자택과 KTF 집무실에 압수 수색이 이루어진 끝에 9월 22일 구속됐다. 이때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조영주 사장으로부터 정치자금 5000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불거졌으나 증거가 부족해 ‘무죄’로 결론이 났다.
중계기 납품 편의를 봐주고 대가를 받은 책임은 져야 했다. 2008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조영주 사장은 “돈을 받은 것은 인정하나 청탁 대가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에게 돈을 건넨 중계기 납품업체 사장이 “십여 년간 잘 알고 지낸 사이”며 “부적절한 처신을 깊이 반성하지만 청탁은 없었다”고 말했다. 조 자장의 변호인은 “(검찰에서 기소 이유로 든 뒷돈 수십억 원을) 모두 개인적 이득으로 취하지 않은 점”과 함께 “사실상 구체적인 청탁이 없었고, KTF의 사업에 손해나 지장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국가 기간산업체 사장으로써 사회에 공헌한 점을 참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허나 조영주는 KTF 사장이 된 2005년 이후로 50여 차례에 걸쳐 24억 원쯤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실형 선고를 피해가기에는 횟수가 잦았고, 액수도 컸다. 그에게 돈을 건넨 중계기 업체 사장은 “당시 KTF 납품업체에서 배제되면 살아남을 수 없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해 청탁과 관련한 의혹에 살을 붙였다. 이 업체 사장은 회사 공금을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조영주의 가족에게까지 돈을 건넨 것으로 밝혀졌다.
조영주 사장에게 1심에서 ‘징역 3년에 추징금 24억 원’, 2심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23억5900만 원’이 선도됐다. 2010년 4월 16일 최종 선고는 ‘징역 3년에 추징금 23억5900만 원’이었다. 이날 조영주 등으로부터 인사 청탁, 납품업체 선정과 관련해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남중수 당시 KT 사장(2005년 8월~2008년 11월)에게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200시간, 추징금 1억3500만 원’이 선고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남(중수) 전 사장과 조(영주) 전 사장은 ‘공적(公的)’ 서비스를 제공하는 독과점 기업의 대표로서 납품업체 선정 등에 있어 공정성을 유지했어야 함에도 지위를 이용, 청탁을 받고 지속적으로 돈을 수수했다”고 풀어냈다.
재판부의 설명은 이채로웠다. 민영 기업인 KT와 KTF의 사업을 ‘공적 서비스’로 보았고, ‘독과점 기업’으로 규정했다. 그만큼 KT의 집 전화·인터넷서비스와 KTF의 이동전화서비스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특히 KT와 KTF 직원 가운데 체신부 공무원 출신이 많은 태생적 특징을 감안할 때 ‘공적’ 책임을 져야 할 기업이라는 해석으로 읽혔다.
한편 2004년 4월 총선과 2005년 10년 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대구 동구 후보로 나섰을 때 정대근 농협중앙회 회장과 조영주 등으로부터 3억 원 상당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강철 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에게는 2011년 3월 10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1, 2심 재판부는 이강철 수석이 2억5960만 원 상당 정치자금을 받은 것을 유죄로 인정했다. 하지만 조영주 사장이 건넸다는 5000만 원은 증거가 부족해 무죄였다. 이때 “조영주가 노무현 정부의 이강철은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 출범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합류한 영남권 유력자와 끈이 닿아 청와대와 주요 공공 기관과 공영 기업 간 인사 문제의 가교 구실을 하는 등 기세등등하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이강철과 조영주, 이명박 정부 유력자와 조영주에 관한 풍문은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당사자의 설명으로 실체를 드러내거나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역시 기술고등고시 제15회 출신인 윤종록 벨연구소 특임연구원(2009년 8월~)도 1983년 체신부에서 ‘한국통신공사’로 이직했다. 그는 1985년 미국 AT&T에 파견됐고, 1993년에는 조백제 한국통신 사장(1993년~1995년)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98년 ‘한국통신’ 이사가 된 뒤 2001년 3월까지 코리아텔레콤아메리카(KTAI) 사장을 맡았다. 윤종록은 그해 서울로 돌아온 뒤 ‘KT’의 이(e)비즈니스사업본부장(상무), 마케팅기획본부장, 신사업기획본부장, 성장전략부문장(이상 전무)으로 성장했다.
2005년 11월. 윤종록은 부사장으로 승진해 KT R&D(연구개발)부문장이 됐다. 이후로 신성장사업부문장(부사장)을 맡는 등 KT 안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기 시작했다. 윤종록 특임연구원이 한국통신공사로 자리를 옮긴 1983년은 KT가 새롭게 출발한 해였다. 1981년 체신부에서 분리돼 1982년 1월 1일 공사로 공식 출범한 뒤 처음(1기)으로 공개채용한 87명이 입사했다. 이때 김성만·김영환·김요동·남일성·서정수·연해정·유영근·유우현·이영규·정찬우(이상 가나다순) 등이 입사해 조영주·윤종록 같은 체신부 출신들과 경쟁했다.
KT는 이들과 함께 한국 통신시장의 맏형 같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81년 체신부에서 분리될 때 450만 회선에 불과했던 집(유선) 전화시설을 불과 12년 만에 2000만 회선으로 늘렸다. 1997년에는 회사 구조를 정부출자기관(공사)으로 전환하면서 사업 중심을 유선 전화에서 무선 통신과 인터넷으로 옮겼다. 한솔엠닷컴을 인수해 자회사인 KTF와 합병하면서 이동통신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던 것. 2002년 민영 기업으로 거듭난 뒤로는 인터넷 서비스 사업에 역량을 집중해 유선 통신시장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회사가 됐다. 2009년에는 자회사였던 KTF를 합병해 이동통신시장으로 지배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KT는 임직원 3만841명, 자본금 1조5645억 원, 총자산 24조3425억 원, 매출 15조9062억 원, 당기순익 5165억 원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공룡이 됐다.
2009년 8월 윤종록은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2009년 1월 KT에 ‘이석채 시대’가 열리면서 회사를 떠나야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제2대 정보통신부 장관(1996년)을 지냈던 이석채가 이명박 정부 아래 KT의 수장(2009년 1월~3월 사장, 2009년 3월~ 회장)이 되자 부사장 자리를 내놓은 것. 윤종록은 그해 8월부터 미국 벨랩(Bell Lab)에 특임연구원으로 둥지를 튼 뒤 2010년 8월 댄 세노르와 사울 싱어가 함께 쓴<스타트-업 내이션(Start-Up Nation)>한국어판을<창업국가>(다할미디어)라는 제목을 달아 출간했다.
윤종록 특임연구원은 “책(스타트-업 내이션)을 접하자마자 내가 반드시 번역해 한국에 출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처럼 (천연) 자원이 없는 나라가 본받을 곳이 이스라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이스라엘이 가진 게) 농토뿐이었지만 40년 뒤 ‘지식농사’를 짓는 이스라엘을 한국이 본받아야 하며, (21세기형) 제2 새마을운동을 벌일 때”라고 덧붙였다. “(이스라엘이) 열악한 사막에서 세계 최고 농업기술을 개척해 1960년대 말 우리의 ‘새마을운동’을 자극했던 것”처럼 “21세기 사이버 보안 세상의 안전문제를 책임지는 ‘시큐리티 알고리듬(컴퓨터 보안 기술)’을 장악한” 이스라엘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배우자는 것이다.
기술 관료 출신다운 시각이었다. 기술고등고시로 공직(체신부)에 잠깐 몸담은 뒤 26년 동안 KT에서 일한 이의 태생적·전형적 사고 틀로 보였다.
■출발은 같았으되 나중은 다른 기술고등고시와 행정고등고시
늘 기술고등고시보다 행정고등고시 출신의 형편이 좋았다. 행정고등고시 출신들은 단단한 결속과 무게로 서로 밀고 끌어주며 장·차관 등 정무직을 향해 나아갔다.
이쯤이면 ‘아, 기술고등고시 출신은 행정고등고시 때문에 참 서러웠겠구나’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 수 있겠다. 그러나 글쎄, 꼭 그럴까. 중앙행정기관 내 정무직 경쟁에서 밀려나 1급 상당 직위에 만족한 채 공직 생활을 마친 몇몇 기술고등고시 출신의 현주소를 돋우어 보자.
남인석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2010년 2월~2012년 4월)은 1977년 제13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옛 전매청·공업진흥청·통상산업부 등에서 잔뼈를 키웠다. 1997년 12월부터 2001년 6월까지 옛 산업자원부(지금은 지식경제부)에서 산업표준정보과장·품질디자인과장·산업기계과장·산업기술정책과장으로 일했다. 2002년 3월에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으로 파견을 나간 데 이어 2002년 11월 특허청 심사2국장, 2004년 3월 국방부 한국형헬기개발사업단장, 2004년 과학기술부 기술혁신평가국장을 맡는 등 주로 산업자원부 밖으로 돌았다.
2006년 6월 남인석은 한 차례 더 뼈아팠다. 가·나(1)급 상당직인 기술표준원 원장에 내정됐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술고등고시 13회 동기인 최갑홍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는 다·라·마(2~3)급 자리인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정책국장에 만족해야 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낸 대가였을까. 2008년 3월 남인석은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기술표준원장이 됐다. 국가 산업 표준 평가·인증 기관인 기술표준원 원장까지가 남인석 공직 생활의 꼭짓점이었다. 1급 상당직에 머물렀을 뿐 장·차관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정무직을 향한 모든 기회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 확률이 낮아졌다고 해 두자.
낮아진 정무직 확률만큼이나 그의 삶이 크게 작아졌을까. 아니, 울상이 될 이유가 없어 보였다. 2010년 1월 남인석은 한국중부발전 사장이 됐다. 한국중부발전은 충남 보령·서천, 서울, 제주 등지의 5개 화력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한국전력공사에 판매하는 공기업이다. 2010년 기준 자산총계가 5조1273억 원에 달했다. 같은 해 매출 4조6757억 원, 당기순이익 1302억 원을 기록하는 등 알토란 같은 회사다.
최갑홍 국제전기기술위원회 이사회 이사(2011년 10월~ )도 남인석처럼 1977년 제13회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했다. 옛 상공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산업자원부 산업기술개발과장·반도체전기과장·신성장산업연구팀장 등을 맡았다. 2004년 9월에는 참여정부 대통령 비서실로 파견을 갔다. 대통령비서실의 박기영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돕는 행정관으로 일할 때 3급 상당 부이사관으로 승진했다. 최갑홍은 청와대(대통령비서실)에서 ‘황우석의 2004·2005년 줄기세포 거짓 논문 사건’을 지켜봤다. 2005년 말 황우석의 거짓말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청와대 행정관으로서 언론의 접근(취재)을 방어하기도 했다. 황우석의 거짓 논문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도 속았을 곳으로 보였다.
실제로 최갑홍 당시 행정관은 그해 10월 서울대학교의 ‘세계줄기세포허브센터’ 개소 관련 기사를 두고 황우석 연구팀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안규리 교수와 전자신문 과학기술팀 간 충돌을 중재하기도 했다. 안규리 교수는 “세계줄기세포허브 실체가 모호하다”는 전자신문 과학기술팀 조윤아 기자의 보도를 ‘국가 과학기술 발전과 세계 불치 환자를 위해 노력하는 황우석 연구팀을 공연히 흔들어 놓는 행위’로 보았다. 최갑홍은 전자신문의 세계줄기세포허브센터 관련 추가 보도를 막아내기 위해 애썼다. 황우석 연구팀이 연구 성과라며 내세운 이런저런 게 당시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실과 과학기술계의 대표적인 정책 성공 사례였기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 했던 거다.
2006년 6월 기술표준원 원장 자리를 두고 벌인 공개경쟁에서 최갑홍은 남인석에 밀려난 2순위 후보였다. 기술표준원을 관할하는 산업자원부가 ‘남인석을 원장으로 뽑았다’는 보도자료까지 미리 준비해 배포한 상태였다. 하지만 남인석의 음주운전 이력으로 말미암아 최갑홍이 마지막에 웃었다. 최갑홍은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남인석에게 기술표준원 원장 자리를 내주고 한국표준협회로 갔고, 2011년 3월까지 협회장 임기를 채웠다. 한국표준협회는 ‘한국산업표준(KS)’ 관련 사업을 총괄하는 단체다. 2010년 사업 규모가 902억 원에 달했다. 자산도 420억 원어치나 됐다.
김원식 법무법인 세종 고문은 나경환처럼 제15회 기술고등고시로 공직에 발을 들였다. 노동부와 공업진흥청을 거쳐 상공부 전기전자공업국에서 중전기·반도체·컴퓨터산업을 담당(1982년~1989년)했다. 이 인연으로 전산망조정위원회 정보사회종합대책팀장(1989년~1991년)을 거쳐 체신부에 둥지를 텄다.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바뀐 1995년, 대통령비서실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으로 건너가 1년여 동안 일했다. 이후로는 정보통신부 안팎을 드나들며 정보통신국장, 중앙전파관리소장, 정보보호심의관 등을 지냈다. 2006년 1급 상당직인 정보통신부 미래정보전략본부장을 맡아 공직 생활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는 2007년 공직에서 물러나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 제8대 회장에 취임했다. 2010년 3월 TTA를 그만둘 때에는 법무법인 세종의 방송통신 분야 고문으로 옮겼다. 공직 생활 이력에 힘입어 꾸준히 고액 소득자로 남았다.
기술고등고시 출신은 이처럼 정무직에 오르지 못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중앙행정기관 요직에서 물러났으되 처지가 그다지 나쁜 건 아니다. 50대 중반쯤에 퇴직한 뒤 사회적 보호 장치가 빈약한 나머지 온전히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일반 직장인에 견주겠는가. 서럽다 하기엔 가진 게 너무 많다.
2012년 6월 7일 오후 7시께 서울 태평로. 나경환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과 조우했다.
“와……. 우리 거의 십 년? 아니, 칠 년쯤 만인가요.”
반가운 해후.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칠 년쯤을 십 년쯤으로 느꼈다. 나도 같은 느낌. 그의 머리와 눈썹에 앉은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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