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빈의 도깨비방망이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터덜터덜 마운드를 내려왔다. 투구 수가 103개에 달했지만 5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정확히는 4와 3분의 1이닝이었고, 상대 팀에게 5점이나 내준 뒤였다.
2002년 5월 7일 밤 유난히 서늘했던 미국 프로야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홈구장.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그를 ‘외계인’이라 했을까. 무시무시한 강속구로 메이저리그 타자를 윽박지르던 바로 그 마르티네즈다. 그 무렵 그가 등판해 100개 이상을 던졌다면 완투·완봉을 기대해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실제로 그는 그해 30게임에 나서 20승 4패, 방어율 2.26, 삼진 239개를 기록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왕성했다.
덩치 큰 랜디 존슨(208㎝)이나 로저 클레멘스(193㎝)도 좋았지만, 몸집 작은 도미니카 출신 ‘외계인(180㎝)’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랬던 그가 그날 밤 안타를 7개나 내주며 무너지다니. 홈런도 맞았다. 실망. ‘외계인’을 끌어내린 애슬레틱스는 도대체 어찌 된 도깨비방망이인가 했으되 시선을 이미 마르티네즈에 꽂았던 터라 ‘이런 날도 있지 뭐’ 하고 말았다.
그런데 웬걸, 애슬레틱스는 그해 8월 13일부터 9월 4일까지 20연승했다. 올해로 139년째였던 메이저리그 역사에 유일한 기록. 지난달 17일 개봉한 영화 ‘머니볼’이 되새긴 바로 그 전설 같은 이야기다. 당시 애슬래틱스는 덥수룩한 수염·머리털에 발 빠르고 방망이가 좋아 스타 기질 넘쳤던 쟈니 데이먼, 장작을 패듯 야구공에 무지막지했던 제이슨 지암비를 다른 팀에 내줬음에도 승승장구했다. 스캇 헤티버그처럼 몸값 싼 선수들이 금자탑을 쌓았다. 애슬레틱스 빌리 빈 단장은 데이먼·지암비를 대체할 선수 말고 20만달러쯤 주면 어떤 방법으로든 1루에 살아 나갈 ‘사람’을 찾았다. 명성이 자자했던 ‘애슬레틱스 영건(투수) 3인방(팀 허드슨과 베리 지토와 마크 멀더)’의 2002년 몸값도 197만달러(약 22억7000만원)에 불과했다. 올해 선발 투수 5명에게 6700만달러(약 772억원)를 지급한 필라델피아 필리스 같은 팀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음에도 비슷한 효과를 냈다.
과연 빌리 빈의 도깨비방망이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해석이 분출했으되 궁극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신뢰’로 보였다. ‘돈보다 사람’이었다. 공을 제대로 던지거나 받지도 못한 스캇 해티버그가 2002년에만 홈런 15개, 타점 61점을 올릴 수 있게 한 열쇠. 그가 20연승 끝내기 홈런을 칠 수 있게 틀을 깬 비결. 우울에 잠긴 그와 그의 가족에게 기회와 기대와 믿음을 준 게 “승리 나와라 뚝딱”이 됐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걷는 빌리 빈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도전을 접기 전에 도깨비방망이의 진상을 캐어 보는 건 어떨까. 판에 박힌 쳇바퀴를 닳도록 돌려선 곤란하니까. 바꿔볼 때가 됐으니까. 누구에게나 열쇠는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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