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곱나 일이 곱지 (4) 황석영
황석영…… 그의 입에서 ‘광주사태’라는 단어가 튀어 나온 뒤로부터 나는 그의 역사의식을 의심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렇게 말한 모양이니, 헛웃음만 나왔다.
나는 사실, 올 3월부터 황석영의 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그가 ‘광주사태’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기 전이다. ‘개밥바라기별(문학동네)’로 시작해 ‘바리데기(창비)’를 봤고, 고향에 갔다가 책꽂이에서 옛 단편 모음집 ‘삼포 가는 길(심지, 1987년)’을 꺼내왔다. 내친김에 예전에 읽지 못한 ‘무기의 그늘(창비)’까지 읽었다.
갑자기 왜 황석영? 3월에 ‘개밥바라기별’로부터 끌어안은 화두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257쪽)’ 때문이었다. 그래, 어디, 오늘을 제대로 살아볼까나…… 하는 마음이었다고 하자. 그랬고, 한두 권 더해가면서 여러 화두를 얻어 이리저리 굴려가며 많은 생각을 했다.
단편 모음집에서 ‘탑’ ‘섬섬옥수’ ‘낙타누깔’ ‘몰개월의 새’ 등을 읽을 즈음,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광주사태 등)이 튀어나와 매우 실망했으되…… 어디 사람이 곱나 일이 곱지 하는 심정으로 나름의 화두를 곱씹으며 마음에 담았던 거다. 그 화두를 부른 황석영의 문장들은 이를테면 이랬다.
#1 개밥바라기별
이십 년 이상이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던 정신이상자들이 정상적인 환경에 놓인 지 불과 몇 달 만에 대부분 완치되었다지요.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것의 힘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89쪽)
누구나 삶의 고통은 몸 안의 어느 깊숙한 곳에 간직한다.(250쪽)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257쪽)
뭘 하러 흐리멍텅하게 살것냐? 죽지 못해 일하고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며 살 바엔, 고생두 신나게 해야 사는 보람이 있잖어.(259쪽)
#2 아우를 위하여
그냥 모른 체하면 모두 다 함께 나쁜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집안 형편이 좋은 학생은 그렇지 못한 다른 친구들께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143쪽)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너는 저 깊고 수많은 안방들 속의 사생활 뒤에 음울하게 숨어 있는 우리를 상상해보구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생활에서 오는 피로의 일반화 때문인지, 저녁의 이 도시엔 쓸쓸한 찬 바람만이 지나간다. 그이가 봄과 함께 오셨으면 좋겠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 그이가 오는 걸 재빨리 알진 못하겠으나, 얼음이 녹아 시냇물이 노래하고 먼 산이 가까와 올 때에 우리가 느끼듯이 그이는 은연중에 올 것이다. 그분에 대한 자각이 왔을 때 아직 가망은 있는 게 아니겠니. 너의 몸 송두리째가 그이에의 자각이 되어라. 형은 이제부터 그이를 그리는 뉘우침이 되리라.
우리는 너를 항상 기억하고 있으며, 너는 우리에게서 소외되어버린 자가 절대로 아니니까 말야. (대단원)
#3 무기의 그늘
폭풍우의 날에도 시간은 지나간다. (상권 119쪽)
우리들의 기계, 우리들의 독약, 우리들의 무기, 우리들 자신의 절망, 지옥은 모든 우리를 포함한 우리가 지어낸 물건들의 광란하는 축제이다.(상권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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