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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거짓말

eunyongyi 2023. 10. 28. 22:27

정철운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9년 1월 30일 초판 1쇄. 2019년 4월 8일 초판 2쇄.

경성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우병동 교수는 1996년 <언론과 사회> 기고 글에서 오보를 두고 “부정확한 정보가 사실처럼 보도되면 수용자들의 현실 인식이 잘못되고 거기에 따라 잘못된 의사 결정이 이뤄지며 모두가 피해를 입는다"고 지적했으며, “단편적 정보를 입수했을 때에도 경쟁 심리나 저널리즘적 확대·과장 의욕에 쫓겨 앞질러 보도함으로써 사실을 일그러뜨리고 조작하는 경우가 나타난다"고 우려했다(7쪽).

SBS 보도의 핵심이었던 일명 ‘장자연 편지'는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 장자연이 쓴 편지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오보가 됐다(12쪽).

<중앙일보>는 당시 오보에서 “일본에서는 반딧불 오징어를 천연기념물로 정했으면서도 때론 먹기도 한다. 7마리 포장에 580엔(6,000원)이다”라고 보도했는데, 여기서 조금만 의문을 품었다면 오보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32쪽).

10월 15일 오후 살아 있다던 백 선장의 유해가 떠올랐다.······중략······이 사건을 두고 당시 <시사저널> 사회부장이었던 소설가 김훈은 “서해 훼리호와 함께 보도의 공신력과 책임도 함께 수장됐다"고 지적하며, “모든 비극은 그토록 단순하고도 간단한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지 않음으로써 발단한 것"이라고 적었다(49쪽).

양 씨는 “제작진은······중략······그들은 방송 송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나는 국과수 결과가 보름 정도 있으면 나올 테니 그거 보고 방송을 내든가 하라고 말했다"고 전한 뒤 “시간에 쫓기는 탐사 보도 프로그램은 없다. 면밀한 팩트 체크가 아니라 시간을 선택한 순간 공익성은 크게 훼손된다"고 주장했다(72쪽).

1989년 봄, 통일에 대한 열망 속에 방북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소설가 황석영은 중국 베이징을 거쳐 3월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황석영 방북 사건의 충격 속에 3월 25일에는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도착했다. 문 목사는 김일성을 만났다(82쪽).

2월 13일 새벽 1시, ID 문제 등을 계속 질문하던 한상진 기자가 K씨에게 “당신 미네르바 아니지?”라고 물었다. K씨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네"라고 답했다. K씨는 “기고문을 보낸 것도, 인터뷰를 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도 심하게 압박이 들어와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게 됐다. 박대성이 구속됐을 때는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105쪽).

이처럼 쉽게 쓰는 기사는 쉽게 무너진다. 논란이 될 사안에 대한 보도에서 반론 취재는 기본이다. 그러나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135쪽).

재판부는 <한국일보>기자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과 박 시인에 대해 전화 또는 대면 인터뷰를 실시하지 않은 사실에 무거운 책임을 물었다(164쪽).

오보를 막을 수 있는 순간은 있었다. 박영훈 목포MBC 기자는 세월호 참사 현장을 가장 먼저 찾았다. 사고 현장은 그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가 선박을 섭외해 현장을 확인한 뒤 목포MBC는 전원 구조가 아니라고 서울MBC에 보고했다. 그러나 박상후 MBC 전국부장은 이를 묵살하고 중대본 발표를 받아썼다. 당시 서울MBC 보도국장은 김장겸 전 MBC 사장이었다(169쪽).

재판부는 “인용 보도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사가 언론중재법 등이 정하는 언론의 공적·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고 할 수 없고 형사판결로 간첩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상태임에도 정반대로 원고를 간첩이라고 단정적으로 지칭하거나 간첩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김씨의 발언 등을 그대로 보도한 점"을 문제로 꼽았다(186쪽).

재판부는 ‘신경민 막말 파문' 보도가 MBC 보도국 간부들이 방송을 사유화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언론 출판의 자유를 누리는 언론사가 언론사로서의 지위를 이용해 스스로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보도를 하는 경우라면 그 표현된 내용이 공공적 의미를 지닌다 하더라도 보도의 공정성을 준수할 의무가 더 요구된다"고 밝혔다(199쪽).

(1991년) 5월 9일 자 ‘조선일보’는 <분신 현장 2~3명 있었다. 목격 교수 진술, 검찰 자살 방조 여부 조사>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옥상엔 혼자 있었다: 서강대 운전사 경찰에 밝혀, 목격 교수들 “2~3명 더 있었다고 말한 적 없다">라는 정반대 기사가 실렸다. 바로 다음 날인 10일 자에서 조선일보는 문제의 목격 교수인 서강대학교 윤여덕 교수의 반박을 담았다. 윤 교수는 맞은편 본관 옥상에서 흰 점과 점퍼 차림의 누군가를 봤는데 정황상 사건 직후 옥상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본 서강대학교 학생들이었다. 검찰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던 조선일보가 망신을 당했다(240쪽).

강기훈은 김형영 구속 사실을 교도소에서 접했다. 그는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한 뒤 <언론노보>와 인터뷰에서 “(국과수 필적 감정 조작이) 예상대로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또 한 차례 언론에 대한 배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243쪽).

1992년 당시 <언론노보> 기자였던 김종배는 장남 이학관과의 인터뷰를 통해 “학관 씨가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기사를 실었다. 김종배는 <미디어오늘> 기자이던 1998년에도 <조선일보>의 이승복 보도는 오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245, 246쪽).

1989년 일본 <아사히신문>은 자사 기자가 오키나와 거대 산호초에 ‘KY’ 낙서를 새긴 뒤 누군가 낙서를 했다며 거짓 기사를 내보내자, 해당 오보 과정을 철저히 규명했으며 <아사히신문> 사장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255쪽).

재판부는 <미디어워치>가 태블릿PC 조작 주장의 허위 여부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피고인은 언론 지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 자신들에게 부여된 공적 책임을 외면하고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수행하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허위 사실을 보도하고 이를 출판물로 배포하기까지 했다. 재판 중에도 출판물과 동일한 주장을 담은 서적을 다시 배포하고 있다. 이런 행위로 인해서 사회 불신과 혼란은 확대됐고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사회 전체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2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