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 피난

2014.10.31. 10:51 ㅡ 책

eunyongyi 2020. 6. 26. 15:30

[독후]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의 독서일기, 여덟 번째

장정일 지음. 마티 펴냄. 2010년 8월.


다음 글을 읽고 1~5번까지 답하시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 )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다섯 문제를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가슴속과 뇌리에 각인된 세 문제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과 작가 이름을 각각 한자로 쓰는 것, 괄호 안에 들어갈 단어가 무엇이냐는 것. 이것은 나에게 온<전자신문>의 강렬한 첫인상! 1995년 입사 국어 시험 첫 꾸러미. 제목과 작가는 늘 가슴속에 살았고, 괄호 넣기는 뇌리에 새겨 넣었다. 이 문제에 모두 답한 나는 2012년 사월 일일, 만 십칠 년에 하루를 더한 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더 이상<전자신문>에 이름을 걸고 글(기사·칼럼)을 쓸 수 없게 됐다. 뒷날…… 그리된 까닭을 시시콜콜 꼭 되새김질하리라.
책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나의 삶을 즐겁게 하고는 했는데, 그 책의 그 등장(전자신문 입사 시험)은 유달리 특별했다. 삶의 심지(心志)를 돋우는 바탕이었고, 책을 더욱 사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이 처음이었다. 아예 서평을 모아 놓은 책이 처음이었다. 나는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할 책의 마지막 쪽 마침표까지 내키는 대로 삼키는 유형이어서 이런 종류의 도서를 따로 펼친 적이 없다. 그런데 ‘여덟 번째’라는 말에 붙들려 그 양(量)에 놀랐고, 책꽂이에 꽂아 두었으되 아직 읽지 못한 김영미의<그들의 새마을운동>같은 책이 궁금한 까닭에, 마지막 쪽 물음표까지 삼켰다.
‘아, 좋은 나침반이로구나!’ 하는 깨달음.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속 귀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고, 김용철의<삼성을 생각한다>를 잊고 있었구나 하는 독서 계획까지. 지은이와 나의 책 읽기가 많이 겹치지 않았으나 얼마간 비슷한 생각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까지. 그래서 그의<독서일기>로부터 더 많은 책을 꺼내볼까 하는 마음까지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안에, 내용이 궁금한 책이 들었으되 돈까지 주고 사야할까를 고민하는 게 한 권 있다. 지은이는 그 책을 썼다는(?) 저자가 그 책을 “가장 열심히 읽어야 할 사람(123쪽)”이라고 지적했다. “줄 쳐 가며 읽어야” 한다고 덧붙였을 정도다. 그 책을 사서 밑줄 쳐 가며 읽은 뒤 버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 진짜 버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러다 이런저런 쓰레기 같은 책들에 매이는 것 아닐까. 하여 그 책은 살 생각을 접었다.
“신산하다”고 말하기 부끄러우나 늘 책에 기댈 수 있어 행복했다. 늘 책에 기댈 수 있을 것 같아 기껍다.

 

덧붙여 하나. 1995년<전자신문>입사 시험 문제의 정답은 ‘土地’와 ‘朴景利’와 ‘늘인’이다. ‘토지’는 가슴에 꼬~옥 품을 보배다.

둘. 한 신문사 후배 기자는 내게 “쓰기 싫은 글은 절대 쓰지 않을 장정일”의 독서일기(2011년 일월 ‘시사IN’ 175호)에 나의 책<미디어 카르텔: 민주주의가 사라진다>(마티, 2010년 십이월)가 포함됐다며 그 가치를 높게 보았다. 영광이고, 고마웠다.
<미디어 카르텔>은 어금니 사려문 결과였고, 보람됐다. 미디어는 내게 늘 화두였고, 여전히 그렇다.
셋. 아~이피TV.
2011년 일월. 나는 인터넷 프로토콜(IP)을 이용한 티브이(TV), 이른바 ‘IPTV’에 한창 적응해갔다. 본격적으로 리모트 컨트롤러를 손에 쥐기 시작한 건 2010년 시월쯤이다. 처음에는 버튼이 많아 황망했는데 4개월 정도 이리저리 눌러본 덕에 ‘느긋하게 보고픈 프로그램을 끌어오는’ 정도가 됐다. 이것 하나로도 내겐 놀라운 변화였다. 1970년대 김일의 통쾌한 박치기를 보려고 TV 한 대 앞에 동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던 추억을 간직한 터라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 것 같았다.
그해 그달 십구일 밤에는 3500원을 내고 영화 ‘아저씨’를 끌어다 보았다. 그날 3500원을 냈으니 이후로 10일 동안 ‘아저씨’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다시 끌어낼 때마다 추가로 결제되는 듯해 늘 불안했다. 능수능란한 IPTV 시청자가 되기까지 갈 길이 멀었던 거다.
사실 아날로그 종합유선방송(케이블TV)을 볼 때에만 해도 버튼 서너 개면 충분했다. 위나 아래 한쪽으로 채널을 바꿔가며 ‘볼만할 것 같은’ 실시간 방송이나 재방송 프로그램을 선택했으니 전원·채널전환·볼륨 버튼이면 그만이었다. 그랬던 게으름뱅이가 ‘아저씨’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기에 편안한 시간에 불러내고는 했다. 스스로 제법 흐뭇한 시청자이자 능동적인 누리꾼이 된 느낌이어서 뿌듯했다.
그런데 IPTV를 보는 눈살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위나 아래로 죽 훑어보고 싶은데 화면 바뀌는 속도가 느렸다. 채널 전환이 늦는다고 해야 겨우 1초도 되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리모트 컨트롤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은 늘 네댓 번 앞서 나갔다.
화면이 멈출 때도 있었다. 모 방송사의 인기 다큐멘터리를 끌어내 볼 때였다. 소리는 들리는데 화면이 섰다. 1분 이상 기다렸음에도 화면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기’ 버튼을 눌러야 했고, 다시 그 프로그램을 불러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어보기’ 표시가 떴고, 화면이 멈췄던 곳에서 다시 이어지기 전에 ‘흔들면 더 부드럽다는 술 광고’부터 시청해야 했다. 볼 마음이 없었고, 볼 필요도 없던 광고에 한 번 더 노출됐던 것이다.
우연히 서로 다른 방에 놓인 지상파 TV 방송(MBC·EBS·SBS·KBS)과 IPTV의 채널이 겹칠 때에는 돌림노래를 들어야 했다. 지표면을 따라 방송 전파가 퍼지는 지상파 TV와 이를 인터넷으로 다시 전송하는 IPTV 사이에 시차가 나기 때문. 뉴스를 볼라치면, 한 문장 정도를 두고 돌림노래 현상을 빚었다. 또 갑자기 볼륨이 커지는 현상이 잦은 등 기술적으로 손볼 게 적잖이 남은 상태였다.
시청자를 위한 세심한 기술적 배려(개선)가 요구됐다. IPTV 상용 서비스 준비가 한창이던 2008년 시월 이십팔일, KT 경영연구소는 IPTV 가입자 수가 2009년 상반기에 280만, 그해 말에 350만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는 2010년 십이월에야 300만 명을 돌파했으니 예측치보다 1년쯤 늦었다. 기술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IPTV를 제대로 손질할 때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기술적으로 조금 모자람에도 성급히 시작한 ‘아~이피(IP)TV’ 말고 ‘즐겁고 풍요한 IPTV’를 고대했다.
참, 2008년 IPTV 상용 서비스를 준비할 때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연도별 일자리 창출 효과 예측치(누적)’를 내놓았다. 2009년 8300명, 2010년 1만5200명, 2011년 2만2600명, 2012년 2만9700명, 2013년 3만6500명이었다. IPTV가 2013년까지 일자리 3만6500개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얘기였다. 당시 방송통신위원회는 ETRI 예측치를 바탕으로 삼아 “IPTV를 신성장동력과 일자리 창출 과제의 첫째로 삼겠다”고 밝혔다. 2011년 일월, 2010년까지 IPTV에서 일자리 1만5200개가 새로 생겼는지 의문시됐다. 아무리 살펴도 IPTV 3사에 2009년과 2010년 2년간 새로 생길 것으로 예측됐던 일자리 1만5000개는 없었다. 애초 목표대로라면 2011년에도 새 일자리 7600개를 추가해 그해 말까지 2만2600개에 닿기를 ‘기대’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2012년 일월, 2011년까지 IPTV에서 일자리 2만2600개가 새로 생긴 것 같지 않았다. 정책 당국의 검증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IPTV 관련 투자 4조5000억 원(인프라 2조8000억 원, 콘텐츠 1조7000억 원)에 따른 생산유발효과도 8조900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듣기 좋은’ 예측치도 있었는데, 글쎄…… 될까.
넷. 종편, 명약관화.
“방송 광고 예산을 어떻게 짜고 집행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2011년 일월. 굴지의 대기업에서 언론홍보를 총괄하는 A가 한걱정이었다. 쌈짓돈이 주머닛돈인 광고 예산으로 새로 등장할 4개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이하 종편)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두 종편에 광고를 몰아줘 다른 사업자의 곱지 않은 시선을 뒤집어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 MBC·SBS·KBS 등 지상파 방송사업자가 시주라도 하듯 종편을 위해 조금씩 광고를 덜어 낼 리도 없어 이래저래 A의 고민이 깊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했다. 2010년 말 기준으로 8조1000억 원쯤인 한국 광고시장이 종편 4개를 더 품어줄 만큼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에 “광고시장을 2011년 8조7000억 원(국내총생산 대비 0.74%), 2015년까지 13조8000억 원(1%)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으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광고시장 총매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1% 돌파’는 관련 업계의 오랜 염원일 정도로 어려운 목표. GDP가 늘어나는 것보다 광고가 되레 줄어드는 흐름을 보인다는 분석까지 나온 터라 방통위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더욱 떨어뜨렸다. 2010년 기준으로 3조2000억 원쯤 되는 밥상(방송광고매출)에 많아야 숟가락 한두 개를 더 놓을 수 있을 텐데, 네 명(보도전문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인 연합뉴스TV를 포함하면 다섯)이 함께 둘러앉으려 하니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한나라당과 방통위가 종편에게 ‘광고 영업을 직접 할 수 있는 길’을 터주려 하면서 사달의 수위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으로 보였다. 종편의 광고 직접 영업이 허용될 전망이자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의 광고판매 대행 족쇄’에 묶여 있던 지상파 방송사업자까지 들썩였다. 실제로 2011년 일월 이십사일 한국언론학회가 주최하고 MBC가 후원해 한국언론재단에서 열린 ‘방송환경 변화에 따른 미디어렙(Media Representative) 도입정책 방향’ 토론회에서 제기된 ‘1사 1렙’에 MBC가 쌍수를 들었다. MBC는 그날 저녁 9시 ‘뉴스데스크’와 이튿날 아침 ‘6시뉴스매거진’을 이용해 김상훈 인하대 교수(언론정보학과)의 “1사 1렙 체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그러나 ‘1사 1렙’은 곧 방송광고 완전 경쟁 시대의 개막을 뜻해 ‘방송 공영성 훼손 우려’를 불렀다. 태생적 한계를 가졌으되 권력과 자본의 입김이 직접 방송에 닿지 않게 얼마간 기여한 KOBACO와 같은 완충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따라서 ‘제한적 경쟁 체제’에 대한 언론계의 고민이 깊었고, 김민기 숭실대 교수(언론홍보학과)는 ‘1사 1렙을 반기는 MBC를 자기 욕심’으로 풀어냈다. MBC 콘텐츠의 힘과 영향력이 민영 미디어렙과 맞물리면, 한국 방송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큰 파괴력을 발휘한다는 게 김 교수의 시각이었다. 스스로를 ‘공영방송’으로 분류해 온 MBC에게 공적 책임 의식을 묻는 발언으로 읽혔다.
종편과 지상파 방송사업자의 광고 경쟁이 가열될수록 방송은 물론이고 신문을 포괄하는 전체 언론계의 눈에 핏발이 설 게 자명했다. 핏발은 출범 뒤 3년 동안 각각 4000억~5000억 원씩 손실을 볼 것으로 예상되는 종편에서 더 빨갛게 돋을 것으로 보였다. 이에 MBC를 비롯한 힘 있는 지상파 방송사업자까지 광고 영업을 강화하면, 지역 방송·신문의 생존부터 크게 위협할 것으로 예상됐다. 궁극적으로 ‘자본(기업)이 사회의 공기(公器)인 언론에 큰 생채기를 낼 게 분명하다’는 분석을 낳았다.
자본의 언론 공공성 훼손 조짐은 뚜렷했다. 소비자(시청자) 편익을 저해할 것으로 우려돼 광고를 할 수 없게 했던 ‘전문 의약품’을 TV에 등장시키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방통위도 “주무 부처와 협의해 방송광고 금지 품목을 완화하겠다”고 밝혔던 터라 전문 의약품 광고 허용 논란에 불이 붙었다.
먼저 생존이 급한 몇몇 종편이 ‘전문 의약품’에 군침을 흘렸다. 한 종편은 자사 신문을 나팔수로 삼아 “종편에만 의약품 광고를 허용하라”는 요구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의약품 광고는 오·남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 수위가 높았다. 시민의 건강을 외면한 채 서너 개 민간 방송사업자에 도움이 될 정책을 방통위가 검토하려는 상황이어서 더 주목됐다. 종편의 눈길은 먹는 물, 알코올 17도 이상 술, 병원·의원 등 이른바 ‘돈(광고비) 많은 곳’에도 꽂혔다. 그러나 여러 병원·의원이 TV 광고에 경쟁적으로 돈을 쓰기 시작하면, 의료비 상승을 불러 시민에 이중고를 안길 개연성이 있어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분출했다.
그 무렵 MBC·EBS·SBS·KBS 등 종합편성을 하는 기존 지상파 방송사업자의 채널번호(6~13) 가까운 곳에 종편을 심으려는 이른바 ‘황금채널 지원 작업’도 가시화할 개연성도 엿보였다. ‘황금채널’ 논쟁은 2010년 시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종편을 선정한 뒤 행정지도를 이용해 채널(번호)을 관리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비판이 일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2011년 일월에 들어서면서 ‘시청자의 채널 선택 편익 증대’를 이유로 삼아 다시 여론의 틈새(반응)를 엿볼 조짐이었다. 방통위 실무진으로부터 “새로운 사업자(종편)가 (시장에) 정착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 맞다. 법 테두리 안에서 (종편을 위한) 채널 지원 문제를 검토할 것”이라는 발언이 흘러나왔다.
방통위 등의 물밑 지원을 등에 없고 광고 영업전에서 승리한 한두 종편은 ‘경쟁사업자 삼키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다. 신문과 방송을 모두 가진 한국판<뉴스코프>나<폭스TV>가 탄생하면 객관적이고 다양한 언로에도 상처를 낼 게 분명해 보였다. 특히 다른 종편을 사들이는 사업자로 크기 위해, 또 시청자 눈길을 붙들기 위해 TV 화면을 ‘노란색(옐로 저널리즘)’으로 물들일 개연성이 크다는 걱정이 앞섰다. 광고 영업에 도움이 될 선정적 프로그램이 쏟아질수록 방송의 공익성도 크게 훼손될 것으로 풀이됐다.
공적 책임을 외면한 채 자본에 휘둘리고 권력에 야합하는 한두 종편이 득세하면, 도미노가 넘어지듯 지상파 방송사업자와 신문의 ‘정론(正論) 직필(直筆) 뿌리’까지 흔들릴 게 뻔했다. 지역 미디어로부터 고사가 시작돼 한국 언론 생태가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돈을 만들지 못하는 순서’대로 보도·시사·교양 방송시간이 오락물에 점령당할 것이라는 얘기다. ‘언론 사유화 저지 및 미디어 공공성 확대를 위한 사회행동’을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는 종편의 등장에 따른 언론 생태 변화 가능성을 위기로 인식했다. 대한항공과 삼양사 등 종편에 참여(투자) 기업 상품의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 방통위원회의 종편 선정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정보공개 청구 등 실질적인 ‘개국 저지 운동’을 전개했다. 허나 종편은…… 2011년 십이월 일일 기어이 개국하고 말았다.
다섯. 방송프로그램 국내제작 새 기준, 종편 특혜 징조.
방송통신위원회가 2011년 칠월 일일부터 새로운 ‘방송프로그램 국내제작 인정기준(안)’을 시행했다. 국내인이 제작비의 30% 이상을 대고, 외국과 맺은 공동제작협정에 따라 만든 방송프로를 국내제작물로 보는 게 요체다. 외국에서 제작한 운동 경기 중계방송프로 가운데 한국 팀이나 선수가 출전하고, 우리말로 해설·중계한 것도 국내제작물로 인정했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선수나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가 나온 경기를 우리말로 중계하면 국내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얘기였다.
‘방송프로 등의 편성에 관한 고시’를 바꾸는 것이었기에 새 국내제작 인정 기준은 방통위 뜻대로 시행됐다. 방통위는 “국내제작 인정기준과 절차를 마련함에 따라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해외 인력을 활용하는 등 국내 방송프로 제작이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했다.
과연 그럴까. 아니, 상식에 어긋났다. 특히 운동 경기 중계방송프로 관련 기준은 말이 안 된다. 돈(중계료) 주고 산 외국 방송프로를 두고 국내에서 제작한 것으로 인정하겠다니 과연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제작’이라는 단어부터 찾아보자. 돈 주고 통째로 사들이는 것 말고, 재료를 가지고 기능과 내용을 가진 새로운 물건이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게 ‘제작’이다.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는 전체 방송시간의 40% 이상을 국내제작물로 편성해야 한다. 상식에 어긋난 국내제작 기준은 종합편성(종편) PP로 나설 동아·중앙·조선일보와 매일경제가 ‘국내제작물 편성 규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개연성이 컸다. 이 기준이 방송은 물론 신문 생태계까지 뒤흔들 종편을 위한 차별적 규제의 징조가 아닐지 우려됐다. 이러다 우리말로 더빙한 외국 영화까지 국내제작물로 인정해주는 것 아닐까.
여섯. 종편·지상파 방송광고 비대칭 규제 안 될 말.
2011년 유월. 최시중 당시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종편)를 ‘아기’로 품었다. 그달 삼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 나가 “종편이라는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걸음마를 하기까지 각별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종편이 안착하는 수준에서 지원”하기 위해 “광고영업자유를 그대로 두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종편과 지상파 방송 간 광고영업 비대칭 규제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 무렵 지상파 방송은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를 통한 판매대행체제에 묶여 있는데, 지상파 방송처럼 보도·오락·교양 프로그램을 종합편성을 하는 종편에게는 자유영업을 허용하는 게 특혜 시비로 귀착하는 상황이었다. 최 위원장은 종편 편애 시비를 불식하려는 듯 “지상파 방송에 묶인 핸디캡(광고판매대행규제)을 풀어 비대칭 규제를 해소하는 게 (정책) 방향”이라고 밝혔다. “종편에게 주어진 자유 폭을 그대로 유지하고 지상파 규제를 낮춰 전체적으로 (광고영업규제를) 자유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다리면 다 풀어주겠다는 얘기였다.
동아·중앙·조선일보와 매일경제 등 종편사업자는 쌍수를 들고, MBC·SBS·KBS 등 지상파 방송은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기’인 종편은 ‘확실한 아빠(방통위)’를 얻었고, 지상파 방송은 종편 덕에 자유롭게 광고를 판매할 날이 가시권에 들어왔기 때문.
“모든 걸 시장에 맡기자”던 이명박 정부의 방통위가 유독 종편을 아기로 본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국내총생산(GDP)의 0.75%에 불과한 광고 시장 규모를 선진국 수준인 1%로 끌어올리는 데 종편 4사가 꼭 필요해서였을까. 넷 중 하나라도 시장에 잘 안착하면 2012년 총선과 대선에 유용할 것 같아서였을까.
뻔한 나머지 정답을 대강 헤아릴 만한 물음표가 자꾸 늘어났다. 차라리 “아기(종편)가 예쁘다”거나 “종편이 필요하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덜 우습겠다 싶었다.
일곱. 시대착오적인 KBS 수신료 인상 강행.
2011년 유월 이십이일. 한나라당이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한국방송공사(KBS) 수신료 1000원 인상안’을 머릿수로 밀어붙였다. 2500원에서 3500원으로 올리자는 것. 법안소위 위원 8명 가운데 강승규·김성동·조윤선·한선교 의원(이상 한나라당)에 김창수 의원(자유선진당)이 인상안 찬성 쪽에 가세했다. 한선교 법안 소위원장은 민주당 쪽 질의권을 제한하고, 의사봉을 두드리지도 않는 등 절차적 하자를 끌어안은 채 표결을 강행해 날치기 논란을 자초했다.
미디어 관련법 충돌은 숙명적인가. 여야가 또다시 익숙한 장면을 연출했다. 한나라당이 표결 강행으로 수신료 인상의 뜻을 분명히 한 데다 민주당이 국회 상임위 활동을 전면 거부할 정도로 파장이 컸다. 그런데 웬걸, 민주당이 그달 이십이일 인상안에 합의했다. 민주당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한나라당이 여론을 등지는 이유였다. 49개 언론·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언론 사유화 저지 및 미디어 공공성 확대를 위한 사회행동’의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0.2%가 KBS 수신료 인상에 반대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당이 시민 열에 여덟이 반대하는 일을 과감하게(?) 밀어붙인 자신감의 근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당시 주요 시민단체는 KBS를 ‘정권 나팔수’로 보기 시작했다. 나팔을 불기 위해 방송프로그램 제작 자율성과 독립성을 훼손했고, 비판 프로그램을 부당하게 폐지했으며, 직원에 대한 보복 인사가 횡행했다고 보았다. 동아·중앙·조선일보와 매일경제신문의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PP) 쪽으로 광고 물꼬를 트기 위해 KBS 수신료 인상안을 활용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수신료를 올리는 대신 KBS 2TV와 라디오 등의 광고량을 줄여 종편 PP를 도와주려 했다는 것이다.
KBS 수신료 인상안을 둘러싼 의혹이 많았다. 그럼에도 밀어붙이려 했다. 시대착오적이었다.
여덟. 방통위 설립 취지 되살릴 때. 그만 좀 밀어붙이라.
제2기(2011년 삼월 이십육일~2014년 삼월 이십오일) 방송통신위원회가 기어이 파행으로 치달았다. 2011년 팔월 팔일 그해 제46차 회의 의결사항으로 탁자에 올린 ‘창원문화방송(MBC)과 진주MBC 합병 허가건’을 두고 여야 상임위원들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민주당 쪽 김충식·양문석 상임위원이 합병 반대의사를 개진하고 퇴장했다. 최시중 당시 방통위원장, 홍성규 부위원장, 신용섭 상임위원 등 정부 여당 쪽 위원들은 개의치 않고 ‘합병 허가’를 의결했다. 야당 쪽과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여당 위원들끼리 다수결로 결정한 것이다.
여당 쪽 위원들은 재적위원(5명) 과반수(3명) 찬성으로 의결했으니 절차상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달리 김충식·양문석 위원은 머릿수로 밀어붙인 여당 쪽 위원들이 ‘합의제 독립 행정기구’인 방통위의 존립 가치를 훼손했다고 보았다. 특히 양 위원은 “전체회의를 전면 거부할 것”이라고 밝혀 파행 장기화를 예상하게 했다.
방통위 여당 쪽 위원들은 2010년 십일월에도 야당 쪽이 모두 퇴장한 가운데 ‘종합편성·보도전문 방송채널사용사업자 세부심사기준과 사업자 선정 일정’을 의결했다. 이런 사례는 2008년 삼월 이십육일 출범한 제1기 방통위를 합해도 서너 차례에 불과했다. 그만큼 여당 쪽 위원들에게도 ‘합의 결여’는 큰 부담이었다.
하여 더 신중했어야 했다. 특히 진주와 사천 등 당시 서부 경남지역 주민의 64.1%가 창원·진주MBC 통합에 반대하는 상황을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다. 지역 여론과 이해관계자의 찬성을 이끌어내지 못해 1년 넘게 공전한 것을 다수결로 밀어붙였으니 방통위가 두고두고 비난을 살 여지가 있엇다.
방통위는 방송의 자유와 공공성·공익성을 높여 시민 권익을 보호하고 공공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됐다. 위원회의 독립적 운영을 보장받는 이유다. 당파적 이해에서 벗어난 ‘합의 정신’이 아쉬웠다. 제발 이제 그만……, 그만 좀 밀어붙이라.
아홉. ‘속 보이는’ 방송사업자 간 소유·겸영 규제 완화.
2011년 팔월.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사업자 간 소유·겸영 규제’를 전면적으로 개선하겠다며 팔 걷고 나섰다. 방송이 차세대 신성장 동력으로서 부가가치 창출능력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자 간 소유·겸영 규제가 지나치게 많아 산업 활성화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유가 그럴싸하나 내면은 좀 달랐다. 덩치 큰 방송사업자가 등장할 환경을 마련하겠다는 얘기로 들렸다. 당장 CJ의 케이블TV 계열사가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기에 유리할 것으로 보였다. 2012년에 사업을 본격화할 동아·중앙·조선일보 등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도 제한(규제) 없이 자기 매체를 살찌울 욕심이 나는 터라 환경 변화가 즐거울 것이었다. 팔짱 끼고 한발 비켜선 채 은근히 웃는 지상파 방송사업자도 있었다.
오호통재라. 한나라당과 정부(방통위)가 또다시 ‘산업 논리’를 앞세워 방송 공공성과 공익성을 뒤흔들었다. 덩치를 키우고 시장 지배력을 넓혀 수익을 높이려고 도청도 마다하지 않는 ‘사기업형 미디어’가 판치는 구렁텅이로 시청자를 몰아넣겠다는 얘기였다. 그 속이 빤히 보였다.
2011년 팔월 삼십일. 이상학 당시 방통위 방송정책기획과장이 그날 오후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방송사업자 간 소유·겸영 규제 개선 방안 공청회’에 나와 정책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뜻으로 보였는데, 열심히 듣다 보니 말장난 같았다.
이 과장은 “방송 규제 이유와 목표가 세 가지다. 여론 다양성을 보장하고, 지역성과 공정성을 높이려는 것인데……, 규제를 하다 보면 반대로 ‘트레이드-오프(trade off)’가 나오는 게 시장 경쟁력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쉽게 알아듣기 어려운 ‘트레이드-오프’는 두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게 희생되는 상황을 말한다. 말의 앞뒤를 따져 보면 ‘여론 다양성과 공정성을 확립하기 위한 규제가 방송의 시장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주장으로 풀이됐다. 때문에 그는 “규제를 최소화하고 개별화해서 원래 목표였던 규제의 세 가지 목적을 보장하면서도 (방송의 시장) 경쟁력을 키워가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송의 산업적 경쟁력을 높이고 규제 목표도 이루겠다는 뜻이었다. 즉 방통위가 토끼 두 마리를 한꺼번에 사냥할 태세였다.
원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쯧쯧 이율배반이다. ‘트레이드-오프’라는 게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을 버리는 것 아닌가. 애초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 공정한 방송을 구현하는 규제와 방송의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도 양립할 수 없는 명제다. 구태여 ‘트레이드-오프’라는 단어를 쓴 걸 보면 서로 모순되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을 터다. 그 논리가 자꾸 말장난으로 들린 까닭이다. 거참, 딱했다. 좀 더 솔직하면 안 될까.
열. ‘트루맛쇼’ 효과.
티브이. 음…, 애물단지. 2011년 팔월, 텔레비전 앞에 앉는 게 잦았다. ‘짝’과 ‘나는 가수다’에 푹 빠졌다. 아내와 아이에게 채널 선택권을 양보(?)하고 사는 터라 주말 심야에 인터넷(IP)TV로 프로그램을 불러냈다. 새벽 서너 시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내상이 깊더니만 기어이 ‘본방사수’를 감행했다. 아내와 아이 서슬을 딛고 주문형 비디오(VoD: Video on Demand)가 아닌 ‘본 방송을 꼭 보겠다’니 사실 언감생심이었다. ‘짝’을 실시간으로 보려다가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수다’ 경연 결과가 어찌나 궁금하던지!
본 방송에 유인된 것은 가수 김건모 때문이었다. ‘나는 가수다’에 나온 그가 ‘불공정한 재도전 논란’에 휩싸인 끝에 명예를 회복하려고 손 떨며 노래하는 장면에 노출된 뒤부터다. 논쟁이 뜨거운 이유를 알아보려 했던 것인데 그만 프로그램에 매이고 말았다.
방송이 새삼 두려웠다. 여러 쟁점과 새 소식을 그야말로 흩뿌리지(브로드캐스트) 않는가. 특히 구조적으로 소유주 이해에 치우칠 개연성이 큰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네 개나 새로 등장할 터였던지라 무섭고 불안했다. 종편 PP가 살아남기 위해 더 자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유혹할 것 같아 걱정이 태산처럼 컸다.
실낱 희망은 있었다. ‘트루맛쇼’ 같은 호루라기다. ‘여기 조작된 방송이 있노라’며 호루라기를 분 김재환 감독에게 찬사를 보낸다. 한국 방송계의 자기 정화 능력을 온몸으로 입증했다. 가짜 손님, 스타의 가짜 단골집, 팔지도 않는 음식 메뉴가 방송을 통해 어찌 포장되는지 내보였다. 음식점과 프로그램 외주 제작사와 방송사가 어떻게 한통속이 되는지 잘 드러냈다. 급기야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뒷돈을 주고받는 장면까지 노출했다.
‘트루맛쇼’ 효과에 주목하자. KBS 2TV<생생정보통>같은 생활정보 프로그램이 스스로 변하게 자극했다. 지역 택시 운전사와 함께 진짜 맛집을 찾아가는 게 나왔다. 가짜 손님이 “맛있어요”를 연발하는 천편일률적 맛집 소개로부터 얼마간 벗어난 것이다. 돈으로 흥정하는 거간꾼이 낄 여지를 줄였다. 매우 반가운 자기 정화 노력인지라 기꺼웠다.
더 깊고 넓은 효과도 났다. 프로그램 외주 제작 환경을 개선할 실마리가 됐다. 방송 밑 도급 구조를 온전히 드러낸 까닭이다. 예를 들면 독립 프로듀서(PD)인 A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4부작 프로그램 제작비로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외주(도급)를 준 지상파 방송사업자가 50%를 ‘그냥’ 뗐다. 그냥 떼는 게 관례란다. 나머지로 프로그램을 만드니 성에 찰리가 없다. 당연히 프로그램 질도 떨어졌다. A는 “지상파 방송사업자를 위해 앵벌이를 해준 느낌”이라고 자괴했다.
종편 PP가 이런 구조를 주시하며 밑 도급 능력이 좋은 프로듀서를 노렸다. ‘트루맛쇼’ 같은 호루라기 씨를 말리지나 않을까. 속이 탔다.
열하나. 불길한 방송 포맷 수입 경쟁.
2011년 시월. 한 회 방송분에 2000~5000달러 정도였던 해외 TV 프로그램 포맷(Format) 이용 가격이 1만 달러로 치솟았다. 시청률 경쟁이 인기 프로그램 포맷 수입을 부추긴 결과였다. 당시 포맷 가격 전반이 오른 것은 아니나 새 지표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TV 프로그램 전체 구성(포맷)을 그대로 들여다 쓰는 것은 실패가 두려워서다. 영국 BBC가 만든 ‘스트릭틀리 컴 댄싱’ 포맷이 미국 ABC ‘댄싱 위드 더 스타스’를 비롯한 39개국에 수출돼 인기를 모았으니 MBC ‘댄싱 위드 더 스타’도 웬만하리라는 기대였을 터다. MBC는 이 포맷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두 번째 시즌을 예고할 정도로 미련이 남았다. 한 번쯤 크게 될 것 같은 느낌인 모양. 비슷한 현상은 BBC ‘브리튼스 갓 탤런트’ 포맷을 들여온 ‘코리아 갓 탤런트’ 같은 경연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계속 확산할 조짐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TV 프로그램 포맷 가격이 더 오르겠다. 특히 2011년 십이월 일일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 넷이 한꺼번에 시장에 등장하면서 포맷 수입 경쟁에 기름을 부을 개연성이 컸다. 수입 비용을 많이 들인 만큼 시청률 경쟁도 더 뜨거워지게 마련이었다. 시청률 경쟁이 지나치면 방송 편성까지 천편일률적일 수 있다. 궁극적으로 몇몇 인기 배우·진행자·가수만 기꺼운 방송시장이 형성될 게 분명해 보였다.
뭔가 잘못됐다. 한창이라는 세계 연예·오락계의 ‘한류’를 이용해 한국형 포맷을 수출하지는 못할지언정 수입 경쟁에 불이 붙고 말았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이러자고 기업의 방송 진출을 완화하고, 새로운 종합편성 PP를 허용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바로잡으라. 방송계는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기본 의지마저 꺾은 것인가. 방송이 중요한 공공 서비스인 이유를 되새기라.
열둘. 광고 때문에 난장판 된 방송계.
2011년 십일월. 방송계가 난장판이었다. 그해 12월쯤 등장할 종합편성(종편)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가 광고판매대행(미디어렙) 관련법이 국회에 계류한 틈을 비집고 광고를 직접 팔 태세였다. 종편 PP가 준동하자 지상파 방송사 SBS는 옳다구나 하고 자체 미디어렙을 설립하겠다며 나섰다. SBS 지주회사인 SBS홀딩스가 그달에 미디어렙 설명회를 열었다.
핑계 핑계 도라지 캐러 간다더니 SBS에 이어 MBC도 광고 직접 영업을 서둘렀다. 역할(종합편성)이 비슷한 4개 유료 PP가 방송광고 시장을 잠식할 텐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방송의 공적 책임을 짊어지고 무료 보편적 서비스를 지향했으되 사주가 따로 있는 탓에 내부 진통을 겪는 SBS야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MBC까지 그래야 했을까. 자칭 공영방송이라더니 너무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코에 걸고 귀에 걸듯 ‘공영방송 문패’를 편의에 따라 내걸었다 뗐다 할 모양이었다.
시민 사회와 정부가 이러라고 사용료조차 받지 않은 채 방송용 전파(지상파)를 내준 것 아니었다. 공정하게 여론에 귀 기울여 믿을 만한 방송이 되어 달라고 맡겼다. 광고를 직접 팔아 이익을 증대할 요량이라면 방송 전파 이용 면허를 내놓으라. 전국 곳곳에 닿는 지상파 대신 돈을 더 많이 낼 만한 시청자를 찾아 케이블을 연결하는 게 이익 창출에도 훨씬 낫다.
혹시 MBC·SBS 임직원이 광고 직접 영업을 바라는 것인가. 아니, 보편적 공정 방송 체계를 지키려는 구성원이 더 많은 것으로 안다. 경영진의 성찰을 바란다. 수십 년간 보편적 방송 전파를 수탁한 이유를 되새기라.
열셋. 백 자 장대에 선 방통위.
2012년 일월. 방송통신위원회가 백척간두에 섰다. 2011년 구월 황철증 당시 통신정책국장이 정보기술 컨설팅 사업자로부터 수천만 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불려간 지 4개월여 만에 최시중 위원장이 다른 수뢰 의혹을 해명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수억 원을 받고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이사 선임과정에 개입한 의혹을 샀다.
정보통신기술(ICT) 정책 꼭짓점에 있는 관료가 업자를 스폰서로 두려 했다는 의혹만으로도 크게 흔들려 엎친 방통위에 불신이 덮쳤다. 최 위원장이 그 까닭과 내용을 명확히 풀어서 밝혔어야 했다. 해명의 진실 여부가 방통위 존립 갈림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통위는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금품 제공 혐의를 산 김아무개 EBS 이사를 “적합한 공모절차와 방통위 의결을 거쳐 뽑았다”고 밝혔다. 선임 과정에서 “금품 수수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며,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열쇠는 2008년 칠월 방통위원장 정책보좌역(4급 상당)으로 방통위에 합류했던 정아무개 씨가 쥐었다. 그가 김아무개 EBS 이사가 제공한 금품을 최 위원장에 전달한 ‘통로’였다는 의혹이 불거져서다. 방통위도 “정모 정책보좌역의 금품수수 여부에 대해서는 검찰 수사에서 시비가 가려질 것”이라고 했다.
정 정책보좌역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주자 경선에서 이명박·박근혜 후보 간 차이를 ‘감각적으로 정확히 내다본’ 것으로 유명했다. 최시중 위원장을 20년 가까이 보좌하며 이명박 정부 출범에 적잖이 기여했다. 애초 3급 상당 고위 공무원으로 방통위에 합류하려다 4급으로 내려앉았음에도 정권과 최 위원장을 위해 감내했다. “어른 모시는 일에 직급이 뭐 그리 중요하느냐”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검찰 조사를 피해 해외에 체류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갑작스레 해외로 간 ‘의혹의 핵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전에도 많이 보았다. 최 위원장이 더욱 적극적으로 소명해야 할 이유다.
열넷. 미디어법 또 밀어붙인 한나라당.
2012년 일월. 한나라당이 방송광고판매대행(미디어렙) 관련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했다. 종합편성방송채널사용사업자(종편)의 미디어렙 적용을 3년간 유예했고, 방송사업자 1인의 미디어렙 최대 지분을 40%까지 허용하는 등 한나라당이 바랐던 대로 밀어붙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여론을 듣지 않은 채 KBS 수신료 인상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안까지 덧붙였다.
또다시 불통. 주요 미디어 관련법마다 한나라당의 밀어붙이기가 재연됐다. 이런 흐름이라면 그해 그달 10일쯤 열릴 예전이던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충돌을 빚을 게 당연해 보였다. ‘날치기 논란’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합의할 줄 모르고 힘만 쓰는 정치’를 할 건가. 새로운 미디어렙 체계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6개월이나 묵은 KBS 수신료 문제까지 끼워 넣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정파적 이해로 버무린 법안을 은근슬쩍 끼워 넣을’ 건가.
대단히 실망스럽다. 공공성을 외면한 채 약육강식하는 미디어판을 걱정하는 여론을 외면했다. 시민이 이러라고 세금과 수신료를 냈던가. 아니, 정치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방송을 구현해 주기를 바랐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의정치제도를 뿌리째 흔들었다. 종편 4사와 SBS 등으로 혜택이 몰릴 법안을 밀어붙이면서 태연히 ‘공정 방송 구현’을 강변한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유권자는 영민하다. 속아 주는 척에도 한계가 있다.
제1 야당은 너무 무력했던 것 아닌가. 새 미디어렙 체계, KBS 수신료 등 뭐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한나라당에 실망한 유권자가 당연히 자기 품에 안길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말로만 ‘결사’할 텐가.
열다섯. 최시중.
2012년 사월 이십오일 오전 10시 40분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나타났다. 검찰 조사를 받으러 나선 길. 뒷돈을 받고 서울 양재동 화물터미널을 복합물류센터(파이시티)로 재개발하는 인허가 로비에 힘쓴 혐의를 샀다. 그는 뒷돈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 돈을 “2007년 대선 여론조사 등에 썼다”고 말했다.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위해 돈을 썼으니 여권에 ‘나를 보호하라’는 신호를 준 것으로 읽혔다. 이런 해석이 일자 그는 말을 바꿨다. 돈을 받았으되 대가성이 없었다고.
이튿날인 사월 이십육일 새벽 1시 15분께.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그. “저 아니라도 지금 (이명박) 대통령께서 해결할 과제가 많은데 제 짐이 또 하나 얹혔다고 생각하면 죄송합니다.……중략……정말 본의 아니게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해 한없는 죄책감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나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게 다는 아니리라는, 더 있을 것이라는 확신!
사월 삼십일. 최시중 구속. 그는 그날 밤 11시께 대검찰청을 나서 서울구치소를 향하며 “뭐가 많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뭔가 큰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이 시련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자중자애하겠다”고 말했다. 허나 이미 자중자애로 마무리할 수 없는 단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