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와 서병조: 한국 관가 표지
2009년 6월 8일 블로그<시우아빠 감언 고언(www.cyworld.com/siufather1)>에 올린<방통위 6월 인사 관전記 ① 이기주와 서병조>편 조횟수가 2013년 1월 2100건을 넘어섰습니다. 하루에 수십만 명씩 다녀간다는 몇몇 인기 블로그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죠.
하루가 뭡니까. 2100건을 넘어서는 데 삼 년 팔 개월쯤 걸렸습니다. 한마디로 하품 나는 건수네요. 허나 제겐 매우 귀중하고 요긴한 ‘2100건’입니다. 블로그를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행사(이벤트)를 벌여 독자를 꾀지 않았거든요. 널리 알리지 않았다는 얘기죠. 그저 일기처럼 블로그에 글을 쌓기 시작했고, 글이 쌓이다 보니 개인 창고(데이터베이스)처럼 쓰게 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헌데 ‘2100번’이나 읽어 주신 분이 계시니 어찌 기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색달라 놀라운 데다 고마운 마음에 ‘글을 더욱 잘 다듬어야 하리라’ 생각했어요. 특히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은 ‘한국 관료 사회 생태 조감’을 정리해 볼 때가 됐다고 여깁니다.<방통위 6월 인사 관전記 ① 이기주와 서병조>편 조횟수가 저를 북돋운 거죠.
한국 관가에서 ‘이기주와 서병조’는 일종의 표지(標識)입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표지. 보는 이에 따라 무겁거나 가벼운 표지죠. 장차관쯤을 지낸 사람이라면 그깟 ‘이기주와 서병조’일 수 있겠습니다만, 관가에서 ‘이기주와 서병조’처럼 1급 상당직(차관보급)에 오르기가 녹록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공무원과 비교할 때 너무 높은 수준의 표지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은 ‘고위’ 공무원이었죠. 하여 저의 눈엔 두 사람이 표지로 보였습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을 나와 같은 해에 공직에 발을 들였고, 같은 기관에서 함께 일했어요. 친구로 동행하고, 때론 경쟁하는 관계였죠. 흥미로운 소재일 뿐만 아니라 한국 관료 사회를 조감하는 데 딱 들어맞아 보였습니다. 자, 함께 조감해 보실까요.
■동행(同行) 또는 경주(競走)
이기주 제3대 한국인터넷진흥원장(2012년 9월~ )과 서병조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운영지원단장(2011년 2월~ )은 2009년 6월 8일 나란히 1급 상당 공직에 올랐다. 당시의 방송통신위원회 기획조정실장과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을 각각 맡았다.
두 사람은 1959년생 동갑내기며 1982년 고려대 행정학과를 나란히 졸업했다. 그해 3월 21일 행정고등고시 제25회 수습 사무관으로 함께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되 이기주 원장이 1992년 12월 먼저 서기관으로 승진하면서 앞서 내달렸다. 서 단장이 서기관이 된 것은 3년 7개월 뒤인 1996년 7월이었다. 이후 이 원장이 2000년 8월, 서 단장은 2004년 5월 부이사관이 됐다. 여전히 3년 이상 벌어졌다. 그나마 3급 상당직 이상 ‘고위 공무원’으로 승진할 때에는 격차를 크게 줄였다. 이 원장이 2006년 1월, 서 단장이 그해 7월에 고위 공무원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어 3년 5개월여 만인 2009년 6월 8일, 드디어 같은 날 함께 ‘1급 공무원’이 됐다. 1급 상당직은 ‘차관보’에 해당하는 자리. 장차관을 보좌하며 자기 전담 사무를 맡아본다. 두 사람이 일한 기관이 방송통신위원회였으니 위원장(장관급)과 위원 넷(차관급)을 도왔다. 각각 방송통신위원회 살림과 정책의 꼭짓점에 앉아 사무를 총괄했다.
서병조 단장은 1996년 8월 재정경제원에서 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전신)로 자리를 옮겼다. “경제기획원(재정경제원 전신)에 근무하던 공무원 가운데 행정고등고시 기수별로 한 사람씩을 정보통신부로 옮겨오는 계획을 짰다”던 노준형 전 정보통신부 장관(2006년 3월~2007년 8월)이 그를 유인한 것으로 보였다. 서 단장은 그러나 체신부(정보통신부 전신)에서 잔뼈가 굵은 이기주 고문보다 늘 한두 걸음 뒤처졌다. 맡았던 일도 이 원장이 ‘아주 조금’ 더 화려했다. 이 원장은 공보관, 전파방송기획단장, 통신전파방송정책본부장(이상 정보통신부), 이용자네트워크국장 등 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서 단장은 공보관, 정보기반보호심의관, 정보보호기획단장(이상 정보통신부), 융합정책관 등 예산 규모와 정책 범주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한 보직을 맡았다. 사실 같은 날 1급 상당직에 올랐으되 ‘직책상’ 이기주 당시 기획조정실장이 서병조 당시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보다 ‘아주 조금’ 앞서있기는 했다. 종이 한두 장 차이였으되 선후가 미묘했다고 해 두자.
2010년 6월. 두 사람은 방송통신위원회 1급 상당직에서 나란히 물러났다. 한 달 뒤인 그해 7월. 둘은 법무법인 김앤장에 들어가 방송통신 분야 고문직을 맡았다.
■별리 또는 경주(競走)
2011년 1월. 서병조 고문이 김앤장을 떠났다. 국가 정보화 정책을 총괄·조정하는 대통령 소속기관인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로 갔다. 그곳 운영지원단장을 맡았다.
2011년 7월. 김앤장에 남았던 이기주 고문은 제10대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 공개모집에 응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방송·정보통신 분야 정부 정책을 짜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받침대 구실을 하는 곳. 기관 무게가 상당하다. 허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동욱 당시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에게 밀렸다. 이기주 고문은 1년여 만인 2012년 9월 제3대 한국인터넷진흥원장에 도전해 뜻을 이루었다.
하여 두 사람은 2013년 1월 현재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운영지원단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으로 있다. 서 단장이 1996년 8월 정보통신부에 합류한 뒤로 15년여 만에, 1982년 나란히 공직에 든 뒤로는 29년여 만에 서로 갈리어 떨어진 이후로 이 년쯤 지낸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이 생이별하듯 애절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다시 열심히 뛰었다. 특히 두 사람이 그리는 새 미래에 ‘정무직’이 포함됐을 개연성이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공직을 경험한 사람 대부분은 선거에 뽑혀 취임하거나 임명에 국회 동의가 필요한 자리, 이른바 ‘정무직’을 거의 숙명적 목표로 삼는 태도가 워낙 뚜렷하기 때문이다.
2006년 11월.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기주 원장과 서병조 단장을 처음 만났다. 이기주 당시 정보통신부 홍보관리관 겸 통신방송융합기획단장은 소주 한두 잔에도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었다. 술을 부담스러워 했다. 술을 회피하던 이가 홍보관리관으로서 반주와 폭음을 달고 사는 기자(記者) 집단을 겪어 내느라 땀깨나 흘렸다.
그가 겸직한 통신방송융합기획단장은 당시 방송위원회와 맞서야 했던 직위. 정보통신부를 잘 보전한 채 옛 방송위원회를 얼마나 잘 포괄하느냐를 과제로 삼는 자리였다. 2007년 1월 홍보관리관에서 전파방송기획단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도 그는 통신방송융합기획단장직을 계속 맡았다. 이를 노준형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의 신임이 두터웠던 결과로 해석한 이도 있었다.
서병조 당시 정보통신부 정보보호기획단장(2006년 3월~2008년 2월)은 두주불사였다. 말술도 사양하지 않은 만큼 단숨에 관계를 틀 수 있으되 깊게 사귀려면 미세한 편차 조정이 필요했다. 그 무렵 정보통신부는 정보보호기획단·전파방송기획단·소프트웨어진흥단 등 ‘국(局)’으로 규모를 늘릴 ‘단’ 세 개를 운영했다. ‘단’ 밑에 서너 개 ‘팀(과)’를 두고 업무·예산·인력을 늘려 ‘국’으로 승격하는 걸 꾀했다. 이런 움직임은 거의 모든 중앙행정기관의 생리였다. 더구나 2006년 11월은 제17대 대통령 선거(2007년 12월 19일)를 일 년쯤 앞둔 때였던 터라 기관별 몸집 불리기 경쟁이 심했다. 몸집을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중앙행정기관의 일을 빼앗으려 들거나 업무가 같되 이름만 다른 사업기획이 난무하게 마련. 때론 기관 사이에 사활을 건 다툼이 벌어졌다. 여하튼 서 단장은 정보보호정책팀·정보윤리팀·개인정보보호팀·정보문화팀을 품고 세 ‘단’ 가운데 가장 앞에 섰다.
그는 노준형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처럼 ‘재경(재정·경제) 직렬’ 공무원이었다. 앞서 말했듯 ‘경제기획원’을 통해 서로 맥이 닿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1년에 만든 경제기획원은 국가 경제정책을 총괄한 기관. 1970,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정부 내 위치와 상태가 조금씩 약화한 뒤 1994년 12월 재무부와 한 꾸러미(재정경제원)로 묶였다. 간판을 내린 것. 그 무렵 경제기획원 공무원 가운데 제법 많은 이가 재정경제원에 머무르지 않고 중앙행정기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이 흐름을 타고 노준형 장관이 먼저(1994년), 서병조 단장이 나중에(1996년) 정보통신부에 새 둥지를 틀었다. 10년 이상 경제기획원에서 함께 일한 데 이어 정보통신부 동료로 지낸 터라 인연이 깊을 수밖에. 하여 노 장관과 서 단장은 상하를 잊고 탁구로 진짜 승부를 겨루는 관계였다.
■표지(標識) 또는 일률(一律)
한국 관가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이 참 많다. 그 많은 사연 가운데 ‘이기주와 서병조’의 앞뒤 사정과 까닭에 초점을 맞춘 이유?
표지(標識)여서다. 두 사람 자체, 둘의 관계, 둘을 둘러싸고 상하좌우로 얽힌 관료 사회의 욕망과 질서에 어린 특징이 상대적으로 뚜렷해서다. 다른 이와 쉬 구별할 수 있고, 쉬 얽을 수도 있어서다. 더구나 두 사람은 같은 대학, 같은 과, 같은 행정기관, 같은 회사(김앤장)를 다녔으니 어찌 아니 흥미로울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이기주와 서병조’로부터 흐르는 갈래가 여럿이다. 갈라져 나간 낱낱엔 또 다른 사연이 깊고 무겁게 얽혔다.
큰 갈래 하나, 행정고등고시와 기술고등고시. 2010년 1월 말. 추위가 조금 풀린 탓이었나. 유명을 달리한 어르신이 많았다. 고인이 된 임상규 전 농림부 장관(2007년 8월~2008년 2월)이 그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해 그달 25일 문상을 간 곳에서 오랜만에 기술고등고시 17회 출신 고위공무원 A를 만났다.
“교육 다녀왔는데……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 명함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무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A가 애초 공직생활을 시작한 중앙행정기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본부 외곽과 다른 부처로 옮겨 다닌 터라 섣부른 위로를 전하기 어려웠던 것.
그해 그달 27일엔 빙모를 여읜 박영일 전 과학기술부 차관(2006년 2월~2007년 7월)을 조문했다. 반가운 여러 얼굴과 해후한 가운데 또 다른 기술고등고시 17회 출신 고위 공무원 B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시 이명박 정부 조직개편 과정에서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고용 휴직 상태였다.
기술고등고시 17회 출신은 1982년 임용돼 그 무렵까지 28년째 공직에 있었다. 허나 1급 상당직에 오른 고위 공무원이 드물었다. 밝음과 어두움은 교차하게 마련인가. 기술고등고시 17회와 같은 해에 공직에 발을 들인 행정고등고시 25회 출신의 상황을 손가락에 꼽아보았더니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이명박 정부에서 ‘행정고등고시 25회’의 무게가 상당했다. 주요 중앙행정기관 15부 3위원회(국민권익위원회는 중앙행정기관이 아니었음) 가운데 1급 상당 기획조정실장이나 사무처장을 맡은 이가 7명이나 됐다. 김차동(교육과학기술부), 김호년(통일부), 곽영진(문화체육관광부), 최형규(농림수산식품부), 이채필(노동부), 이기주(방송통신위원회), 김주현(금융위원회) 등이었다.
장·차관과 정무직 위원을 뺀 국가 주요 중앙행정기관의 맏형 열에 서넛(38.8%)이 행정고등고시 25회였다는 얘기. 외교통상부(외무고시)·법무부(사법시험)·국방부(군인)를 빼면 무려 열에 네댓(46.6%)에 달했다. 이들의 책상 위에 기관별 기획재정·행정관리·규제개혁법무·국제협력 관련 업무가 올랐다. 정무직(장·차관급)은 아니나 ‘시장 경쟁 정책을 수립하고 기업을 규제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최고 의결회의’에 참여하는 김학현 당시 상임위원도 행정고등고시 25회였다. 정부 입법·예산 작업은 물론이고 중요 의사결정에 그들의 입김이 닿고, 손길이 머물렀다.
기획조정실장과 어깨를 견주는 중앙행정기관별 정책실로 시선을 옮겼더니 그들의 힘을 더욱 절감할 수 있었다. 박현출 농림부 식품산업정책실장, 안현호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실장, 조석 지경부 성장동력실장, 장옥주 복지부 아동청소년가족정책실장, 서병조 방통위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이상 2010년 1월 말 기준) 등 국가 주요 산업 규제·진흥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행정고등고시 25회가 포진했던 것.
이처럼 기술고등고시 17회와 행정고등고시 25회 형편이 사뭇 달랐다. 지금(2012년 5월 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행정고등고시 25회가 모두 흥하고, 기술고등고시 17회 전체가 쇠퇴한 건 아니되 ‘단단한 행정고등고시 순혈주의’를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2009년 6월. 이기주·서병조의 1급 상당직 승진에 가려 그늘이 드리운 곳에도 기술고등고시 출신이 있었다. 두 사람보다 일 년 앞서 공직에 들어선 신용섭 당시 정보통신부 통신정책국장이었다. 흡사 ‘복마전’ 같은 통신시장 규제 정책을 맡아 고생(?)했으되 자신을 제치고 1급 공무원이 된 두 후배를 올려다봐야 했다. 신 국장이 행정고등고시가 아닌 기술고등고시(16회) 출신이어서 승진이 힘에 부쳤을 것으로 보였다.
둘, 고시 동지(同志). 행정고등고시와 기술고등고시 간 경쟁이 뜨거운 나머지 척질 일 많았더라도 ‘고시 동지회(會)’까지 걷어차지는 않는다. 처지와 시점에 따라 단단히 결속해 서로 밀고 끌어주며 정무직을 향해 함께 정연히 나아간다. 물론 결정적 시점에 닿으면 밑에서 추월하려거나 위에서 내리누르려는 꾀가 분출한다. 시쳇말로는 ‘선의의 경쟁’이겠고. ‘이기주와 서병조’는 고시 동지이되 세력이 월등한 행정고등고시 출신이었다. 행정고등고시 동기로서 동행할 이유가 충분했다.
큰 갈래 하나 더, 지연(地緣). 한국 역사의 질곡. 특히 영호남.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가에 앙갚음 인사가 판치는 이유다. 오죽하면 본적을 서울로 옮기는 호남 출신 관료가 있었겠는가. 영남 정권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절의 이야기로 묻힌 게 아닌, 여전한 차꼬다. 이명박 정부에서 기세등등했던 이른바 ‘영(일)포(항) 라인’이 좋은 사례일 터.
상대적으로 작되 큰 갈래와 얽혀 큰 힘을 발휘하는 것 하나, 학연(學緣). 관가에선 특히 서울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학연이다. 한국 사회가 얼마간 민주화했다 하나 관가에 흐르는 학연 관계는 여전히 두텁다. 이 관계에 지연까지 맥이 닿았다면? 더 굳고 깊어지게 마련. 그야말로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찰싹! ‘이기주와 서병조’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다. 둘은 오랜 친구였으되 관가의 특정 자리를 겨냥해 지연·학연을 내세워 세력화를 꾀하거나 따로 음성적인 조직을 꾸리지는 않았다.
둘, 부처(部處)의 연. 어느 기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느냐는 거. 심할 경우 ‘이피비(EPB·경제기획원) 자부심’ 같은 것. 예를 들어 옛 정보통신부 공무원은 노준형·유영환 전 장관을 비롯한 여러 경제기획원 출신을 ‘점령군’으로 여겼다. 1990년대 초·중반 경제기획원에서 정보통신부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이 고위직과 요직을 차지해 피해를 입었다는 거다. 옛 재무부를 포괄하는 범 경제기획원 출신 고위 공무원들의 위세는 사실 등등했다. 경제기획원 간판을 내리고 재무부와 함께 재정경제원(1994년)이 된 뒤 재정경제부(1998년), 기획예산처(1999년), 기획재정부(2008년)로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경제·산업 관련 중앙행정기관 내 주도권을 유지했다. 체신부와 정보통신부(체신부 후신)에서 공직 생활을 한 이기주 한국인터넷진흥원장도 경제기획원 출신을 점령군의 하나로 인식했을 개연성이 크다. 재정경제원(경제기획원 후신)에서 정보통신부로 옮겨 간 서병조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운영지원단장도 점령군에 속했다. 서 단장이 점령군의 자세를 취했든 취하지 않았든 구조적으로 그랬다. 친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됐음 직하다.
‘이기주와 서병조’로부터 갈라져 나간 낱낱은 나름의 새로운 ‘표지’다. 따로 특징지을 수 있고, 표시해 구별할 수 있다. 관가엔 이런 ‘표지’가 많다. 여기저기 널렸다. 때와 처지에 따라 온갖 표지 아래 끼리끼리 모여 “잘해 보자”고 서로 다독이며 힘을 돋운다. 표지 기세가 시들해지면? 소원하다. 표지 아래 모여도 두텁던 옛정은 그저 지난날 정에 불과하게 마련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관가 안 여러 ‘표지’가 ‘일률적’이라는 점. 뭉치고 흩어지는 태도와 방식 따위가 한결같다. 아래 품어 주고 위 떠받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가락이 같다. 이런 구조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 크게는 권력욕이요, 조금 작게는 승진 욕심이다. 욕심이 모이는 ‘표지’ 규모와 위치에 따라 목표가 1급 상당직쯤에 머물 수 있고, 그 아래일 수도 있겠다. 허나 관료 대부분의 마음엔 처지가 어떻든 늘 1급 이상 ‘정무직’이 무르익는다. 그보다 더 큰 꿈을 품는 이도 적지 않을 거다. 분명히. 생태가 그렇다. 아니라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손 한번 번쩍 들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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