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 피난

2011.07.14. 18:52 ㅡ 52만 대군을 끌어안은 채 생때같은 우리 젊은이끼리 괴롭히거나 다투게 할 이유가 없다

eunyongyi 2020. 6. 28. 16:17

김 상병과 현빈… 모병제

 

언짢다. 해병대 총기 참사를 두고 “체벌 자체보다도,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이 군에 들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니!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말 그대로 죽어나는데…, 그게 그저 ‘체벌’이라는! 언짢다 못해 서글플 지경이다.
김 상병의 총구가 현빈을 향했거나 현빈이 총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말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나는 1989년 5월 31일 육군에 입대해 2년 3개월만인 1991년 8월 1일 제대했다. 해병대처럼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지는 않았다. 땅바닥 내려놓은 시위 진압용 몽둥이 위에 깍지 낀 채 팔굽혀펴기를 하는 정도였다. 한겨울에 팬티 바람으로 연병장 눈을 녹이는…, 그저 그런 정도(?)였다. ‘바뀐 환경’이 해병대가 아닌 육군이어서, 그 ‘체벌’이라는 게 상대적으로 약해서 내가 만기로 제대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 ‘체벌’이나 ‘바뀐 환경’을 정신적으로 잘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까. 허, 헛웃음만 나온다.
1989년 5월 31일 첫날부터 욕설이 난무했다. ‘머리 땅에 박기’ 같은 고통주기도 예사였고, 사람을 함부로 치고 때리는 것도 보였다. 갓 입대했기에 갈 곳(부대)이 정해지지 않은 채 2박 3일 동안 옷과 신발 같은 기본 보급품과 간단한 건강 검진을 받는데 무에 그리 욕하고 때릴 일이 많았을까. 얼차려가 아니라 그냥 습관처럼 그러고들 있었다.
내가 처음 맞은 것은 부대(사단) 신병 교육대로 줄지어 들어갈 때였다. 씩씩하게 팔을 하늘 높이 추켜올리며 걸어야 했는데, 신병 교육대 조교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팔 더 올려 XX끼야!”라는 말과 함께였다. 신병 전체에 긴장을 조성하려는 뜻으로 보였고, 내가 그의 손바닥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훈련소는 물론이고 자대도 마찬가지였다. 몸과 마음의 유린. 짓밟힘. 이런 것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얘기인가. 2년 이상 이런 상황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는 건가.
나는 내 뒤로 입대한 친구들을 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딱 한 번 한 친구의 따귀를 때렸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지금도 무거운 짐으로 가슴에 남았다.
내가 때리지 않자 몇몇 선임병이 “밑에 애들 제대로 ‘교육’하라”고 재촉했다. ‘교육’은 구타와 얼차려 같은 것을 말한다. ‘자유롭게 자란 아이들’을 끊임없이 치고 때리며 고통을 주는 구조다. 반복된다. 심지어는 ‘많이 맞았으니 나도 많이 때려야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생때같은 우리 젊은이들을 왜 이런 지옥에 몰아넣는가. 왜 죽어나게 하는가.
이제 바꾸자. 모병제로! 근본적으로 바꿀 때가 됐다.
전력은 곧 경제력 아니던가. 52만 대군으로 세계 10위권 전력을 가진 한국보다 일본 군대가 더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일본은 23만여 자위대만으로 세계에서 서너 손가락 안에 드는 전력을 유지한다. 머릿수가 많아야 이기는 시절은 지났다. 좀 더 현명하자는 얘기다.
52만 대군을 끌어안은 채 생때같은 우리 젊은이끼리 괴롭히거나 다투게 할 이유가 없다. 서로 총을 쏘아 죽어나게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