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30일(목) 정부과천청사 오명(吳明)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의 집무실. ‘과학기술혁신(科學技術革新)’이라는 큼지막한 글씨를 담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임상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차관) 집무실에 걸려있었는데, 최근 옮겨 온 모양이다. 서예를 모르지만, 낙관까지 ‘세∼게’ 박혀 있다. 공보관에게 누가 쓴 글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임 본부장 고향(전남)의 어느 인사가 쓴 것이란다. 누군지는 밝힐 수 없단다.(--;)
오 부총리의 올해 화두도 ‘과학기술혁신’이다. 그는 “지난해는 (부총리 승격에 따른 과기부) 조직을 갖추는 해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시스템을 정착시켜 국가기술혁신(NIS)체제를 실현할 때”라고 말했다.
오 부총리는 참 화려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 1966년 3월∼79년 1월 육군사관학교 전자공학 교수, 79년 1월∼80년 10월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80년 10월∼81년 5월 대통령 경제과학비서관, 81년 5월∼87년 7월 체신부 차관, 87년 7월∼88년 12월 체신부 장관.
그가 체신부 장·차관을 지낼 때, 나는 대학 1∼2학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87년 6·10 국민항쟁, 88년 2월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서울올림픽… 음, 새삼스레 가슴이 뜨거워진다.
89년 2월∼92년 12월 대통령 교육정책자문회의 및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89년 11월∼93년 12월 대전세계박람회(엑스포) 조직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엑스포 조직위원장 시절에 ‘한국인 첫 우주인’ 배출계획의 싹을 틔웠다.
93년 12월∼94년 12월 교통부 장관, 94년 12월∼95년 12월 건설교통부 장관. 이때 교통부와 건설부가 통합됐다. 오 부총리는 당시를 “짐 싸놓고 인사를 기다렸다. 난 떠날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건설교통부 초대 장관으로 임명됐다. 그리고는 하루 만에 두 부처 인력 50%씩을 섞어버리는 인사를 단행했다. 당시 공무원 사회에서는 적지않은 파격이었다. (오 부총리는 10개 이상의 정부 부처 공무원, 민간 전문가들을 데려다 과학기술혁신본부를 구성할 무렵, 건설교통부 인사 경험을 자주 언급했다.)
96년 6월에는 조금 색다른(?) 자리로 갔다. 동아일보사 사장이다. 2001년 2월엔 동아일보사 회장이 됐고, 같은 해 7월까지 활동했다.
2002년 3월 아주대 총장으로 취임, 2003년 12월까지 있었다. 아주대에 둥지를 틀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의 ‘관직생활’이 마무리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하마평(진통 속에 무산)에 올랐고, 결국 2003년 12월 29일 과학기술부 장관이 됐다. 당시 부총리 승격을 약속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2004년 10월 18일 헌정 사상 첫 과학기술부총리가 탄생했다. 참여 정부 중점 국정과제인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현’을 이끌게 된다. 미래 먹거리,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미시경제 정책들을 총괄한다.
박정희 씨는 ‘하라면 해’가 통하는 사회(?)에서 과학기술진흥정책을 펼쳤다. (※참여 정부의 과학정책을 3공화국 시절과 비교하는 이가 많다.) 참여 정부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더욱 많은 다수가 공감하는 과학기술진흥정책으로 ‘국민이 즐거운 사회’의 밑거름이 만들어지기를 두 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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