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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eunyongyi 2021. 1. 22. 13:05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문학동네 펴냄. 2015년 10월 8일 1판 1쇄. 2015년 10월 22일 1판 4쇄.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25쪽).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는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이 함께한다(28쪽).

 

“우리는 계속 진격해 들어갔고······중략······독일 여자들을 붙잡아 왔소······ 그리고 한 여자를 열 명이 차례로 덮쳤소······ 여자가 부족하니, 결국 병사들이 소비에트 군대를 몰래 빠져나가 어린아이들을 붙잡아 오는 일까지 생겼소. 여자아이들을······ 열두 살에서 열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애들을 말이오······ 아이가 울면 때리고 입안에 아무거나 쑤셔넣었소. 아이는 고통스러워하는데, 우리는 그걸 즐겼지. 이제 와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지식인 집안 출신인 내가······ 하지만 그게 나였소······

 딱 한 가지 두려운 게 있었다면, 그건 나중에라도 여자병사들이 우리가 한 짓을 알게 되는 것이었소. 우리 간호병들 말이오. 그녀들 보기가 부끄러웠소······(49쪽)”

 

“결국 나는 큰 소리로 울고 말았어. 연습하면서 표적을 맞힐 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거기선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인 거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내가 죽인 거야.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죽였어(74쪽).”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 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83쪽)”

 

“한번은 밀밭에 몸을 숨기고 있었어.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지. 독일군의 기관총이 ‘따다다다······’ 한바탕 불을 뿜고는 조용해졌어. 사그락사그락 밀 잎사귀 부딪치는 소리만 귀를 간질였지. 그리고 다시 쏟아지는 독일군의 총소리 ‘따다다다······’ 총소리를 들어며 생각했어. ‘밀 잎사귀의 속삭임을 나는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그 다정한 속삭임을······(126쪽)”

 

“훈련을 받던 어느 날······ 왜 그런지 이 일만 떠올리면 꼭 눈물이 나······ 봄이었어. 사격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제비꽃이 보이더라고. 아주 조그만 제비꽃이. 그래, 그걸 꺾어서 총부리에 매달고는 계속 길을 갔어(134, 135쪽).”

 

“무엇이 기억나느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정적이야. 중상자들이 입원해 있던 중환자실의 그 죽음 같은 고요함이 가장 기억에 남아(246, 247쪽).”

 

“우리는 형을 집행했어······ 쏘고 나니까 두려움이 밀려오더군. 그 두 병사에게 다가갔어······ 죽어서 누워 있는데······ 한 사람 얼굴에 살아 있는 것처럼 미소가 번져 있더군······(264쪽)”

 

“반년이 지나자······ 우리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었어······ 매달 하는 그것도 끊기고······ 여자 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하다 보니 생체리듬이 망가진 거야······ 이해가 돼?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여자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더라고······(356쪽)”

 

“아직도 갓난아이의 비명소리가 내 귓전에 울리곤 해. 우물에 던져진 아이의 비명. 혹시 그런 소리 들어 본 적 있어? 아이가 우물 속으로 떨어지면서 소리소리 지르며 우는데, 마치 저 깊은 땅 밑에서, 저세상에서 울려오는 소리 같았어. 그건 아이의 울음이 아니었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지······(439쪽)”

 

“어떻게 잊어······ 부상병들이 숟가락으로 소금을 퍼먹고······ 병사들이 정렬하고 있다가 이름이 불려 앞으로 나오면 힘없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거야. 소총을 든 채로. 그게 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거였어(447쪽).”

 

“어떤 집 옆에 웬 여자가 서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게 보였어. 그러자 어찌 된 일인지······중략······아무도 그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어. 지휘관이 그 광경을 보고는······ 여자한테로 달려가 아이를 휙 낚아채더니······ 거기 물 펌프가 있었거든.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였는데, 거기에다 대고 아이를 냅다 내리찍는 거야. 아이의 머리가 터져 골수가 쏟아지고······ 젖이 사방으로 튀고······ 아이의 엄마가 쓰러졌어. 나는 알 수 있었어. 사실 나는 의사였으니까······ 그 여인의 심장이 터져버린 걸······(496쪽)”

 

“그건 민중이 쟁취한 승리였어! 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민중을 믿지 않았어. 그게 우리에게 주는 고국의 보답이었어. 우리의 사랑과 우리가 흘린 피에 대한 보답······(498쪽)”

 

“사람들이 차창을 통해 아이들을 기차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어. 다 서너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이었어. 마침 기차역 근처에 숲이 하나 있어서 아이들은 그 숲을 향해 뛰었어. 아,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 탱크들이 나타나더니······ 아이들을 그대로 깔고 지나간 거야. 아이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지(5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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