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민주노동운동지회 엮음. 학민사 펴냄. 2021년 11월 19일 1판 1쇄. 2022년 7월 8일 특별판 발행.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이런 글을 써도 되나 고민을 했다. 하지만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이야기가 역사에 남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같은 평범한 조합원들이 겁도 없이 열심히 싸웠기 때문이라고 믿기에 어렵게 용기를 냈다(34쪽).
1966년 봄 나는 주인집 언니를 따라 평화시장 삼양사에 시다로 입사했다. 하루 15 ~ 16시간씩 무릎을 꿇고 일을 했다. 첫 월급은 700원, 버스 요금 하루 왕복 20원 빼고 나면 고작 140원 남지만 열세 살 꼬마가 빠져나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41쪽).
1980년 봄 단체협약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청계피복노조는 10인 이상 사업장부터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13일간 평화시장 옥상 농성 결과는 승리였다, 당시 근로기준법에는 15인 이상 사업장에만 퇴직금을 주게 돼 있었다. 노조 탄생 10년 만에 근로기준법 이상을 쟁취한 투쟁이었다(44쪽).
(원풍모방)노조는 1978년 1월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조합원 스스로가 서로 돕는 노동조합 본연의 공제적 기능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신협은 출자조합원에게 퇴직금 한도 내에서 무담보로 대출해 공장 내 사채나 계 등을 일소하고 배당률을 높여 저축을 확대했다. 신협은 한 달도 안 돼 여수신업무를 시작해 조합원들의 경제생활개선에 기여하기 시작했고, 다음 해 8월에는 공동구매조합을 열었다. 설립 당시 300명이었던 회원은 1980년에 1,356명으로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저축액은 같은 기간 동안 4천 850만 원에서 3억 2천 6백만 원으로 7배 반 이상 늘어났다. 신협은 조합원의 상호부조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조직력 강화에도 크게 기여했다(79쪽).
국가보위법이 발동된 상태에서 대규모 파업을 벌인 노조, 광주 항쟁 지원 성금을 공식적으로 모금해 보낸 노조, 블랙리스트 코드 넘버 1호, 한 사업장 559명 해고자 등등의 기록을 안은 채 원풍노조는 70년대 민주 노조 최후 돛을 내렸다(117쪽).
원풍에서 끌려나온 지 벌써 39년, 참으로 머나먼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길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다. 각자가 정신 차리고 가다 보니 길이 됐고, 여러 사람이 같이 가니 더 큰 길로 됐다. 우리가 걸어왔던 이 길이 뒤에 올 사람들이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영원히 녹슬지 않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120쪽).
원풍은 나를 바로 세운 버팀목이자 행복이다(134, 135쪽).
그 시절 인천에서는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이 제일 큰 회사였다. 나는 동일방직에서 일하고 싶었다.······중략······내 나이 열여섯 살에서 열일곱 살로 넘어가던 1970년 겨울이었다. 나이가 적어 내 이름으로 취업을 하지 못하고 옆집에 사는 이희정 언니의 이름으로 입사했다(170쪽).
동일방직은 노무과장이 설치고 다녔다.······중략······이영숙 집행부 때 노무과장은 최종남이었다가 1978년 한옥두로 바뀌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종남 과장은 1973년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조사를 받던 중 7층 인가에서 떨어뜨려 살해당했다는 최종길 서울 법대 교수의 형이었다(184쪽).
(이병국이) 동일방직에 입사한 것은 1962년 봄, 아내의 사돈인 최종남 노무과장에게 부탁해서였다(188쪽).
(콘트롤데이타노동조합이) 가끔 사안별 자문을 위해 따로 만났던 분들로는 신인령, 천영세, 김금수, 인명진 목사 등이 있었고 임금 인상 요구 자료를 작성할 때 장명국의 도움을 받았다(275쪽).
콘트롤데이타는 당시 염창동 김포대로변에 있었고 대형 컴퓨터 기억장치를 만드는 공장이었다(294쪽).
현재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10여 직원들과도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다소간 다툼이 벌어지고 원치 않는 갑과 을 상황이 만들어지며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악덕 기업주인가 하는 생각에 잠도 설치며 고민하기도 한다(501쪽).
그때 (전국금속노동조합 남서울지역지부 한일공업주식회사분회) 교육선전부장인 김문수가 분회장을 하겠다고 나서서 직무 대리를 맡았다. 김문수는 서울대 출신이었지만 아무도 몰랐다. 김문수는 노조 조직 확장에 힘을 들였다. 오픈숍이었기 때문에 직접 조합원을 설득해 가입시켜야 했다(534쪽).
1970년대 광주에 있었던 호남전기주식회사는 1946년 설립된 건전지 제조업체로 1982년 로켓트전기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16년 폐업했다. 호남전기는 광주에 소쟈한 회사 중 규모가 가장 큰 기업이었으며 전남일보라는 언론매체와 한 그룹을 이룸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558쪽).
1971. 09. 30. 서울 문리대 대학 군사 교련 철폐 요구 결의문 채택(대학 군사 훈련 반대 투쟁 전국 대학으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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