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지음. 한길사 펴냄. 1993년 10월 25일 1판 62쇄.
어머니 아버지 사시는 집 — 내 어릴 적 살던 곳 ― 책꽂이에 꽂혀 있던 걸 뽑아 왔다. 이걸 가져오리라 미리 마음 다진 건 아니었고 그저 눈길 따라 손이 닿았을 뿐. 하룻밤 새 몇 쪽 읽다가 덮고는 했으니 당연히 다 삼킬 수 없어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들고 올 생각을 했다. 같이 사는 친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집 안 책을 그나마 줄이려는 때라 눈치 봐 가며 좀 웃었고. (^^;)
1994년 일월 4일. 화요일. 학교 앞 서점에서 샀고, 책값 보니 5500원이었던 듯. 그해 일월 나는 졸업을 한 달쯤 앞둔 맨손. 말이 좋아 ‘신문 기자에 뜻을 둔 사람’이었지 참 먹먹했다. 치른 시험마다 어쩜 그리 똑똑 떨어졌는지. 음. 가슴 답답할 때 읽을거리를 사고는 한 버릇에 1권. 2권. 3권. 돈 없어 4, 5, 6, 7, 8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9권 산 뒤 10권을 도서관에서 빌렸던가. 10권도 사긴 샀는데 책꽂이에서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들고 온 1권. 염상진. 하대치. 소화. 정하섭. 김범우. 염상구. 소설 속 인물 낱낱이 되살아났고. 99쪽 ‘친친’에 동그라미. 여기저기 밑줄. 하, 소설에 밑줄을 긋다니. 111쪽 ‘가피(加被)’를 몰라 뜻 찾아 적어 넣어 둔 내 어릴 적 글씨까지.
좋았다. 다른 것도 보였고. 깊고 넓게. 1994년엔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거 여럿. 특히 거북하게 붙들린 것 하나. “손수 옷고름을 풀었던 지난밤과는 너무나 다른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거부가 강할수록 그의 남성은 더욱 강해졌다. 거부를 포기한 그녀는 울먹였다(201쪽).” 소화를 겁탈하는 정하섭. 흰 꽃 — 소화(素花) ― 짓밟는 강간. 그걸 소화의 ‘부끄러움’으로 어르고, 기어이는 “한 번의 경험도 쉽게 습관이 되는 것(201쪽)”이라며 “그녀는 어제처럼 거부의 몸부림을 하지 않았다. 어제의 부끄러움이 부끄러워질 만큼 부끄러움은 엷어져 있었다”고 잇댄 거. 내 어릴 적엔 생각 얕아 그냥 그렇기도 한가 보다 싶어 쉬 지나친 모양인데 지금은 몹시 거북하다. 이건 강간이잖아. 남성이 벌인 나쁜 짓을 두고 제 눈과 마음에 좋게 꾸민 것 따위일 뿐. 아름답게 꾸밀 이야깃거리가 아니었다. 음.
어머니 아버지 사시는 집에 갈 날 또 언제일지 몰라 2권을 어디선가 빌려야 할 성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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