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이기자 — 해고 르포르타주

(1-1) 부당 전직(轉職) 이겨 내려면

eunyongyi 2016. 3. 16. 23:21

2012년 사월 1일. 마이너 신문사가 나를 갑자기 ‘교육출판센터 부장 대우’로 내쳤을 때. 내 맡은 일이 달라졌다. 사설과 칼럼 따위를 쓰는 논설위원에서 ‘출판 지원 담당’ 쯤으로 흐릿하게.

결코 논설위원이나 부장 대우에게 걸맞을 자리가 아니었다. 1995년 사월 1일부터 2012년 삼월 31일까지 17년 동안 그 마이너 신문사에서 기자(16년)와 논설위원(1년)으로 쌓은 내 이력을 마구 내리눌러 찌그러뜨린 것. 사람 사는 이치로는 17년쯤 기자로 뛴 이를 출판팀 보통 직원으로 짓누르려면 적어도 — 그가 아무리 못된 놈이라 하더라도 — ‘그곳에 갈 생각이 혹시 있느냐’고 한 번쯤 물어보는 게 옳겠다.

마이너 신문사는 그러나 내게 미리 묻지 않았다. 인사 발령 방(榜)이 내걸리기 수십 분 전에야 편집국장 C가 “출판 쪽으로 가게 됐다”고 툭 내뱉었을 뿐이다. 나는 C에게 “(회사를) 나가라는 소리로 들린다”고 씁쓸히 말했고, 말 그대로 그때 그냥 떠나고 싶었다. C는 꿩 구워 먹은 양 아랫입술로 윗입술 밀어 올린 채 그저 멀뚱멀뚱했고.

마이너 신문사의 C와 C 위 몇몇은 나를 그리 짓밟는 데 거리낄 게 없다고 본 듯했다. 내가 “마땅한 이유 없이 전직됐으니 제자리로 되돌리라”고 근로기준법 제23조(해고 등의 제한)를 내밀며 퉁겨져 일어날 때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만큼 쉬 밟을 만하다 여겼을까.

C는 나를 출판 쪽에 보내 지르밟는 걸 두고 미리 꾀거나 달래어 권할 자가 아니었다. C가 한때 논설실장이었다고는 하나 2012년 사월 1일엔 — 이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한 달여가 흐른 뒤였기에 — 논설위원(나) 인사 발령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없었던 거. 그때 내가 “이치에 어긋난 출판 쪽 발령으로부터 구제해 달라”고 지방노동위원회에 외쳤다면, 마이너 신문사가 “마땅한 까닭 없이 마구 내 맡은 일을 바꿨다(전직 배치)”는 걸 밝히는 데 ‘말할 자격 없는 C’를 충분히 이용했을 터였다. 노동위원회 심판정에 설 때엔 짚 낱낱을 추슬러야 하기 때문. 함께 가려잡을 짚 낱낱으로는 ‘기자로 입사한 사람에게 출판을 맡으라고 몰아친 것’•‘그리해도 좋을지 내게 미리 뜻을 묻지 않은 거’•‘부장 대우 논설위원을 출판팀 보통 사원으로 낮춰 보낸 것’ 따위가 있었을 테고.

2014년 십이월 24일. 마이너 신문사가 나를 갑자기 ‘광고마케팅국 경기인천센터’로 내쳤을 때. 내 맡은 일이 또다시 달라졌다. 출판 기획•편집•영업을 뭉뚱그려 지원하던 이에서 ‘광고영업 보통 사원’ 쯤으로 터무니없게.

결코 기자와 논설위원이었다가 출판 쪽에 내쳐졌던 부장 대우에게 걸맞을 자리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해 팔월 24일 마이너 신문사로부터 해고됐다가 십일월 19일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한 해고였음’을 인정받아 4개월 만에 복직하게 된 나를 더욱더 내리눌러 찌그러뜨린 것. 사람 사는 이치로는 부당 해고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이를 생뚱맞은 광고영업 보통 직원으로 짓누르려면 — 그가 아무리 눈엣가시라 하더라도 — ‘그곳에 갈 생각이 혹시 있느냐’고 한 번쯤 물어보는 게 옳겠다.

마이너 신문사는 그러나 내게 미리 묻지 않았다. 인사 발령 방 같은 건 아예 내걸리지 않았고, 2014년 십이월 22일 늦은 오후에야 총무 쪽 심부름꾼 D가 복직 통보랍시고 ‘24일 광고마케팅국 경기인천센터로 가라’는 걸 이메일에 담아 보냈다며 전화했을 뿐이다. 나는 헛웃음 한 번 쳤고, 그때 그냥 떠나고 싶었다. D와는 그날 전화로 처음 맞닿았으되 말 섞을 까닭이 없었고.

마이너 신문사에서 교육출판센터와 사업팀을 함께 맡다가 광고마케팅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A와 A 위 몇몇은 나를 또다시 짓밟는 데 거리낄 게 없다고 본 듯했다. 내가 “마땅한 이유 없이 한 번 더 전직됐으니 제자리로 되돌리라”고 근로기준법 제23조(해고 등의 제한)를 내밀며 퉁겨져 일어날 때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만큼 쉬 밟을 만하다 여겼을까.

2014년 십이월 24일 아침 마이너 신문사 경기인천센터가 아닌 본사 광고마케팅국장실에서. A는 내게 “(경기인천센터장인) ○○○를 잘 도우라”는 듯 아닌 듯 대충 웅얼거렸고, 나는 “회사가 인사위원회를 열어 (나를) 다시 징계할 걸로 안다”고 대답해 줬다. 내가 경기인천센터로 복직하는 걸 고맙게 여길 리 없어 다시 퉁겨져 일어날 테니 맘에 없는 소리로 네놈과 아옹거릴 까닭이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A가 제대로 알아들었을지 모르겠지만.

A에게 등을 보인 뒤 경기인천센터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마이너 신문사의 두 번째 징계 정도에 따라 ‘부당한 인사 발령(출판 ☞ 광고영업)’을 덧붙여 다시 지방노동위원회를 찾아갈 마음을 거듭 다졌다. 이 또한 전직 배치를 둘러싼 다툼이었기에 나는 ‘기자와 논설위원과 출판 담당’과 ‘광고영업사원’ 사이에 들어 있음 직한 그 무엇을 더듬었다. 하여 찾아낸 게 입사 자격 차이. 내가 마이너 신문사에 기자로 들어갈 때(1995년) ‘4년제 대학 졸업’을 증빙한 뒤 국어•영어•상식•논문 시험과 면접을 치렀는데, 그해 입사한 광고영업사원은 ‘전문대 이상 졸업’에 면접만 겪었던 것.

나는 1995년 1월 18일 자 마이너 신문 1면에 난 ‘수습기자’ 모집 알림과 그해 6월 8일 자 2면에 실린 ‘광고영업사원’ 구함 공고를 얻었다. 응모 자격과 여러 노동 조건이 같지 않았던 만큼 신문사 안에서 기자와 광고영업사원의 맡은 일이 달랐던 거. 나는 이런 차이를 한눈에 밝혀 줄 두 알림을 지방노동위원회에 내밀지 않았다. 그게 아니어도 17년간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뛴 게 덮일 수 없는 데다 내 뜻과 달리 출판팀 보통 직원으로 내쳐진 흐름만으로도 마이너 신문사의 괴롭힘(표적 징계)이 잘 드러나리라 여겼기 때문. 물론 노동위원회나 법원 따위의 판단을 지레 어림잡아 헤아릴 건 아닐 터. 부당히 전직된 이는 마땅히 ‘그따위 인사가 이치에 맞지 않음’을 드러낼 모든 걸 더듬어 낼 일이다. 짚어 본 것 가운데 무엇을 증거로 내밀지는 그다음에 굳혀도 넉넉하니까.

음. 마이너 신문사가 내 맡은 일을 두고 함부로 지르밟을 수 있었던 건 내가 2011년 사월 26일 ‘부장 대우 논설위원’이 됐을 때 노동조합 운영규정에 따라 조합원 자격을 잃은 걸 잘 알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나는 천생 기자요 죽을 때까지 그리 살겠다”고 떠벌리던 녀석의 붓을 빼앗고 “당분간 출판 쪽을 지원해”라고 슬쩍 눙친 것만으로 깊이 벨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테고. ‘요놈 어디 한번 견뎌 봐라’ 하는.

그렇다 하여 그런 때 그런 자리에서 벌컥 하면 안 될 말. 홀로 맞설 게 아니라 노동조합부터 찾아갈 일이다. 노조가 없다면 만들어야 하겠고. 이미 있다면 ‘전직 배치’에 관한 단체협약을 잘 가다듬어야 하리라. 그 마이너 신문 노사는 조합원을 전직시킬 때 그 조합원은 물론이고 노동조합과도 ‘미리 협의’하기로 협약했다. 이런 약속이 없다면 꼭 만들어야 할 일. 이미 있다면 ‘협의(協議)’를 ‘합의(合議 아닌 合意)’로 바꾸어야 할 터.

누구나 쉬 헤아릴 수 있듯 혼자서는 힘겹게 마련. “여럿이 한데 뭉친 곳, 노동조합 문을 여세요. 없으면 빨리 만드시고.”


▴1995년 1월 마이너 신문에 실린 '기자' 모집 알림(왼쪽). 오른쪽은 그해 6월 ‘광고영업사원’ 모집 알림이다. 응시 자격이 달랐다. 


덧붙여 하나. 그 마이너 신문사는 나를 광고마케팅국 경기인천센터에 보낸 걸 두고 단순히 ‘출판영업’에서 ‘광고영업’으로 바꾼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영업’ 행위는 그게 그거라는 말. 하지만 내 맡은 일의 참모습은 크게 달랐다. 나는 ‘출판 속살을 살펴보자’는 생각에 2012년 사월 1일부터 책 기획•편집•교열에 모두 참여했다. 물론 갓 걸음마에 지나지 않았지만 적잖이 땀 흘렸다. 기자와 논설위원으로서 취재하며 기사와 칼럼 따위를 썼듯 출판팀에서도 책 두 권을 기획해 취재하고 썼다. ‘광고영업’처럼 신문광고 판촉 활동만 하는 것과 사뭇 달랐던 거. 2014년 팔월부터 십일월까지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를 두고 다툴 때 마이너 신문사 스스로도 “기자였던 (내) 이력을 감안해 출판에 배치했다”고 진술했다. 기자•논설위원•출판팀원과 광고영업사원의 할 일이 서로 다르다는 걸 마이너 신문사가 인정한 꼴.

둘. 한국 신문쟁이에게 “어느 기자가 광고 쪽에 내쳐졌다”고 들려주면 그가 업신여김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 굴욕. 그의 몸과 마음이 모두 괴롭고 아프리라는 걸 서로들 잘 안다. 마이너 신문사가 나를 욕보였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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