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이기자 — 해고 르포르타주

(3) 눈가림

eunyongyi 2016. 3. 27. 03:57

“광고 영업자보다 우린 기자가 필요하다.”

마이너 신문사 경기인천센터장인 E에겐 기자가 필요했다. E가 신문 광고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데다 직접 뽑은 사원까지 한 명 있었기 때문. 센터는 늘 두 명이 광고 영업을 하는 구조였다. 하여 E는 2015년 일월 어느 날 마이너 신문 사장에게 전화해 나를 “기자로, 아예 우리 쪽으로, 경기인천센터 쪽으로 (배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나는 좋겠다고 말씀 한번 드렸다”고 그달 14일 내게 전했다. 광고 영업 사원보다 “기자가 필요하다”고 거듭 말했단다.

……. 1995년 사월 1일 내가 그 마이너 신문사에 어찌 들어갔고, 20년쯤 무엇을 하며 땀 흘렸는지 잘 보여 줬기에. 나는. 대답. 경기인천센터에서 기자로서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물론 생각이 달랐다. 나를 기자로 발령할 생각이 없음을 여러 때 여러 곳에 내보였다. 2014년 삼월 24일 내가 그 마이너 신문사의 노사협의회에 노동자 위원으로 나가 이런저런 문제를 내어놓자 사장이 “아직도 기자인 줄 아나 보지”라고 웅얼거리며 비꼬았을 때. 또… 2012년 사월 1일 논설위원이던 나를 교육출판센터로 전직(轉職) 배치했을 때. 들. 여러 때로부터 ‘이기자’를 외면했다. 특히 나를 표적 삼아 외딴섬으로 내친 게 아니었다고 잘 꾸미면 그만이기에 “경기인천센터에 (광고 영업) 중간 관리자의 필요성이 인정돼” 송도에 보냈다고 지방노동위원회에 진술했다. 손쉬웠던 거.

그리 쉬 대답하기 위해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꽤 오랫동안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 2014년 시월 12일 교육출판팀에서 출판 부문을 없앴다. 열여드레 전인 구월 24일 내가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한 ‘부당 해고 구제 신청’이 인정되더라도 돌아갈 자리가 사라지게 한 것. 결국 그 몇몇은, 마이너 신문사에서 출판 부문을 들어낸 덕에 “불가피하게”라는 핑계를 얻은 신바람을 타고 나를 집에서 34나 36이나 때론 38㎞쯤 떨어진 인천 송도 경기인천센터에 간단히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싶었다. 맡아 할 일을 ‘광고 영업’으로 바꾼 것에도 “불가피했음”을 이유로 삼았고.

그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이 출판 부문을 미리 들어낸 게 잘 활용됐다. 2014년 십일월 19일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 해고 구제 신청 심판위원회 결과와 십이월 10일 판정 주문에 따라 마이너 신문사가 그해 십이월 24일 나를 4개월 만에 다시 받아들였으되 ‘본사로부터 40㎞쯤’ 떨어뜨릴 수 있었으니까. 얼굴 보기 싫고, 내가 다시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락이는 걸 막으려는 뜻으로 읽혔다.

복직 발령의 실체에 서린 눈가림 꾀도 엿보였다. 마이너 신문의 몇몇은 지방노동위원회에 “‘교육출판팀’이 폐지됐다”고 말했으나 사실은 출판 부문만 들어낸 거. 교육 부문을 살려 뒀을 뿐만 아니라 없앴다던 출판 사업도 계속했다. 2014년 시월 12일 그 마이너 신문 출판 부문의 마지막 노동자였던 권 아무개를 경영지원실 재무팀으로 발령했으되 출판 업무를 계속 맡게 한 거. 그해 십이월 신간 두 권을 낸 데 이어 2015년 삼월에도 새 책을 출간했다. 마이너 신문에 소개도 했고. 독자의 기존 도서 주문에 계속 응대했음도 물론이다. 일(출판)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출판팀을 살려 둔 채 “폐지했다” 하니 어찌 온전히 믿을 수 있겠나. 출판 사업을 접은 듯 보였으되 언제든 본디 상태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 체계로 보였다. 하여 나는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이 꼼수를 쓴 것으로 여겼다.

눈가림 꾀와 꼼수 따위를 온통 뒤집어쓴 것으로 여겨 시름시름 앓던 나는 또다시 2012년 사월 1일 ‘그때!’를 자책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그리 그냥 스러지면… 마이너 신문사 그 누구든 무참히 짓밟힐 테니까. 몇몇의 뭇칼질 난무할 테니까.

하여 다시 지방노동위원회. 2015년 삼월 4일. 그 마이너 신문사의 ‘부당한 인사 발령’을 밝혀 구제되려고 “출판 업무와 광고 영업은 전혀 다르다”고 나는 주장했다. 1995년 사월 1일 내가 “공채 기자로 입사할 때 ‘수습기자’와 ‘광고 영업 사원’의 전형을 달리”했고, “출판 업무는 기자 업무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구제 신청 이유서에 덧붙였고. “책 여러 권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공저자로 참여하고 교열, 교정 작업도 했다”고 밝혔다.

사실이었다. 나는 마이너 신문에 수습기자로 입사해 16년간 취재 현장에 있었고, 1년간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삼아 출판 기획과 집필도 했다고 지방노동위원회에 내밀었다. 2014년 팔월부터 십일월까지 4개월간 부당 해고 여부를 두고 다툴 때 그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도 ‘기자였던 신청인(나)의 이력을 감안해 출판에 배치했다’고 진술했다고 덧붙였고.

신문사 출판 업무와 광고 영업이 다르다는 거. 나는 이를 상식으로 여겼고, 지방노동위원회에도 잘 통하리라 여겼다. 그 마이너 신문사 몇몇이 나를 집에서 34나 36이나 때론 38㎞쯤 떨어진 곳(송도)에 광고 영업 사원으로 전직해 배치할 때 “사전에 협의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 — 노동위원회에 진짜 그리 진술한 — 걸 두고 부당한 억지춘향 발령으로 해석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랬는데. 부당함을 인정받을 걸로 알았는데 웬걸. 기각됐다. ‘이건 대체 뭘까’ 싶었다. 내가 상식 밖에 섰던가.

음. 2015년 사월 28일 지방노동위원회 심문회의에서 ‘그런데 2012년 사월 1일 말이야. 그땐 왜 전직 배치를 두고 다투지 않았니?’라며 내 마음 깊은 속을 찌른 지방노동위원회 공익 위원 이진영. 그와 나란히 앉은 심문회의 의장 최선애와 또 다른 공익 위원 조성혜. ‘이건 대체 뭘까’ 싶었다. 내가 상식 밖에 섰던가.

나는. 마이너 신문사에서 20년간 일하며 몸으로 알게 된 상식은. 1979년 일월 등록했고 1982년 구월 신문 창간 밑돌이 됐던 출판을 그리 쉬 들어내면 곤란하다는 거. 돈 몇 푼에 — 수익 내려 눈에 독 올린 끝에 — 그리 쉬 들어내어선 안 된다는 거. 책 한 권 한 권이 매체인 터라 ‘신문에 미처 담지 못한 이러고 저러한 걸’ 독자께 드릴 수 있다는 거. 사회 공기(公器)인 신문을 공정히 잘 만들려 노력하듯 출판에도 공적 책임을 느낀다는 거.

그 마이너 신문사 몇몇은. 상식 밖. ‘이건 대체 뭘까’ 싶었다. 내가 상식 밖에 섰던가.

지방노동위원회 공익 위원 몇몇이 상식 밖에 섰을까. 지방노동위원회 그 본래의 바탕? 하여.

나는. 이명박 정권이 ‘노동부’ 앞을 ‘고용’으로 꾸민 게 싫었다. 나는. 박근혜 정권이 ‘고용노동부’ 바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걸 두고 ‘어쩔 수 없는 그게 그거’라 여겼고. 지방노동위원회 공익 위원 몇몇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는 않나. 진정 ‘공익(公益)’을 위하는가.

눈가림은… 닿는 곳마다 폭력. 돈으로 꾸며 속이든. 권력으로 꾸며 속이든. 그 짓이 곧 폭력이라. 나는. 느꼈다. 찔려 보니 그렇더라.

▴2015년 7월 1일 마이너 신문 출판 쪽에 들어간 책 주문 가운데 일부. 그날 ‘신규’ 즉 새로 거래를 튼 곳도 있던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