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이기자 — 해고 르포르타주

(2) 외딴섬

eunyongyi 2016. 3. 19. 02:31

“그땐 왜 구제 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 2012년 사월 1일. 붓을 빼앗긴 채 마이너 신문사의 출판 쪽으로 쫓겨 간 ‘그때!’가 결국 폐부를 찔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싶었으되 이미 배 지나간 자리.

마음 깊은 속을 찌르고 든 건 지방노동위원회 공익 위원 이진영. 2015년 사월 28일 심문회의에서 그 마이너 신문사의 ‘부당한 인사 발령’으로부터 구제해 달라는 내게, 결국, 물었다.

옳다. 그래. 3년쯤 전인 2011년 사월 26일 논설위원이었던 나를 ‘교육출판센터 부장 대우’로 발령한 게 부당한 전직(轉職) 배치라고 처음 느꼈을 때 노동위원회를 찾아갔어야 했다. 그리하지 않았기에 ‘그땐 아무 말 없다가 왜 이제야 앓는 소릴 해?’ 하는 질문에 시원히 내밀 대답을 찾기 어려웠던 거.

“제가, 심약… 했습니다.”

그랬다. 솔직히. 나는 여리고 약해 그 마이너 신문사와 홀로 맞서지 못했다. 신문사 노동조합의 이치에 맞지 않은 운영규정 때문에 ‘내 뜻과 상관없이 조합원 자격을 잃었을 때거든, 그때가, 그러니 내가 약할 수밖에’ 하는 마음속 구차함까지.

따로 준비해 둔 대답이 있긴 했다. “출판은 17년간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일하며 쌓은 경험을 살릴 만한 분야여서 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는 것. 하지만 “2014년 팔월 24일 부당히 해고된 뒤 지방노동위원회의 복직 판정에 따른 그해 십이월 24일 인사 발령은 ‘사전 협의 없는 일방 통보’였기에 ‘회사 기준의 징벌 연장’으로 느꼈다”는 거. 그러나 ‘그때!’ 끝내 입 다문 터라 이진영의 질문이 폐부에 서늘히 닿을 수밖에. 그 차가운 느낌에 미리 마련한 대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래, 그때. 2012년 사월 1일. 제대로 “부당하다”고 목소리 돋우지 않은 나는… 기어이 외딴섬에 내쳐졌다. 2014년 십이월 24일.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귀양 보내어 진 성싶었다.

마이너 신문사 몇몇의 생각은 물론 달랐다. “수도권 경쟁력을 강화할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한 곳에 나를 보냈다 했다.

그곳 송도. 인천 앞바다 갑(岬). 조석(潮汐) 차가 크고 해수욕장이 유명했던 곳을 메운 땅 어느 건물에 마련한 그 마이너 신문사의 노동자 네댓 규모 경기인천센터. 음. 경쟁력 강화 교두보로 쓸 만했을까.

갸우뚱. 정전(停電). 처음엔 전기가 잠깐 끊겼나 보다 했는데 웬걸 잦았다. 2014년 십이월 24일 경기인천센터로 복직한 뒤 겨우내 잊힐 만하면 전깃불이 나갔다. 건물 관리가 부실한 나머지 온풍기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사무실 한가운데에 기름 태우는 난로를 둬야 했고. 급기야. 단전(斷電). 2015년 사월 16일 오후 두 시 한국전력공사가 전기 공급을 끊었다. 그해 일월부터 삼월까지 건물 전기요금이 체납돼 단전할 수밖에 없다는 게 한국전력 남인천지사 관계자의 말. 나는… 깜깜 어둠 속에 앉아 곰곰 생각했으되 ‘경쟁력 강화 교두보’와 ‘전기 끊김’을 서로 잇대지 못했다.

한국전력이 주는 전기는 여드레 만인 사월 24일 오후 다섯 시에야 다시 들어왔다.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그러나 경기인천센터 “건물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화장실 수도꼭지에선 겨우내 찬물만 나왔다. 4층 건물 안 다섯 업체마다 사무실 한두 개씩만 열어 둔 터라 사람 온기가 드물었다. 건물 여기저기를 청소해 주시는 분도 없었고. 하여 화장실은… 더러웠다.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그러나 경기인천센터 “건물 관리가 잘 되고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경기인천센터는 전기 끊김으로 생기를 잃기 전부터 아닌 게 아니라 유배지로 쓸 만했다. 귀양 보낼 사람이 없을 땐 9개월쯤 문을 닫아걸어도 좋았고.

실제로 2014년 삼월 2일부터 그해 십이월 1일까지 폐쇄했다. 센터를 쉬 없앴다가 9개월 뒤 되살릴 수 있었던 건 ‘임차료 없이 관리비 조로 다달이 30만 원쯤’ 건네면 그만이었기 때문. 임차료는 건물주 회사를 알리는 기사와 광고를 몇 차례 신문에 실어 준 것으로 갈음한 터라 문을 열고 닫기가 손바닥 뒤집는 듯했던 거. 사정이 그렇다 보니 2009년 일월 문을 처음 연 이후 센터로 발령된 노동자 열한 명 가운데 일곱이나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2015년 일월까지 원•김•전•조 아무개가 그랬고, 오•정•오 아무개 기자도 떠났다. 조 아무개는 갑작스런 전직(轉職)과 4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에 시름했고, 오 기자는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불합리하게 유배된 듯하자 미련 없이 마이너 신문사를 등졌다.

나도 귀양으로 느꼈다. 난데없이 광고영업사원으로 한 번 더 전직된 고통을 끌어안은 채. 2014년 팔월 24일 부당 해고된 뒤 4개월 만에 그리 복직•유배된 터라 표적 징계가 이어진 것이라 여겼다.

출퇴근 고통이 상당했다. 2014년 십이월 24일. 그 마이너 신문사 경기인천센터에 복직했다가 처음 퇴근하던 날.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니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잇따라 나타났고, 미처 충전해 두지 않은 ‘하이패스카드’로부터 대체 얼마가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른 채 1시간 30분쯤 달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자동차 통행료를 1만3600원쯤 내야 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통행료 900원을 내야 하는 노선, 800원이 필요한 길, 통행료가 없는 경로. 모두 출근에 1시간 20분 이상, 퇴근에 2시간쯤 걸렸다. 지하철로는 1시간 30분 동안 스물아홉 정거장. 출퇴근에 3시간, 모두 쉰여덟 정거장이었다.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그러나 내가 “평상시 본인 차량을 이용해 출퇴근하고 업무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출퇴근 불편이 거의 없다”고 강변했다.

나는 경기인천센터로 유배되기 전 그 마이너 신문 본사로 일하러 다닐 때 “자동차는 한 달에 서너 번쯤 필요할 때에만 썼고 늘 지하철로 출퇴근했다”고 지방노동위원회에 알려야, 했다. 집에서 “서울지하철 5호선 ○○역까지 걸어서 5분쯤, 그 역에서 ×××××역까지 아홉 정거장을 가느라 17분, ×××××역에서 본사까지 걸어 15분쯤으로 출근에 37분에서 40분 정도면 충분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2009년 일월 3일 갑작스레 그 마이너 신문사 온라인뉴스속보팀에 발령된 뒤 2014년 팔월 24일 해고될 때까지 5년 8개월간 국제팀·논설위원실․교육출판센터‧교육출판팀에서 땀 흘렸다. 모두 본사에 자리가 있었고 거의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1시간 20분쯤이면 넉넉했던 거. 지방노동위원회에 이런 것까지 밝혀야 하니 참으로 구질구질하다 싶었으되 무시할 수 없었다. 경기인천센터에서 자동차를 이용한 출퇴근이 많아진 건 “광고 영업에 차가 필요하다는 센터장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나 좀 구제해 달라’고 지방노동위원회에 내가 요청했으니까.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내 ‘예상’ 출퇴근 시간을 “자동차 이용 시 약 55분, 대중교통 이용 시 약 1시간 35분”이라고 내밀었다. 그 몇몇이 ‘예상’했을 뿐임을 스스로 인정했듯 실측한 게 아니었다. 인터넷 ‘네이버’ 지도로 측정한 결과였다. 특히 ‘아침 7시’를 통상적인 출근 시간으로 보고 측정 기준으로 삼았다 했고. 음. 출근할 때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쯤 걸려도 거리낄 게 없이 괜찮다는 얘기였을까. 그 정도가 “통상적”이라 하니 참으로 기함할 노릇. 통상적이려면, 특별하지 않고 예사로우려면 일반에 두루 들어맞아야 할 터. 유리한 기준을 제 논에 물 대듯 내밀어선 곤란하지 않은가.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퇴근이 3시간을 넘기면 노동자에게 이롭지 않은 것으로 보는 노동위원회의 눈길을 피하려는 꼼수인 줄 잘 알겠으나 억지 춘향이어선 안 된다.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나를 표적 삼아 송도에 유배한 걸 숨기려고 ‘연봉 외 영업 활동비’까지 덧댔다. 내가 교육출판팀에 있을 때엔 활동비가 다달이 20만 원이었는데 경기인천센터에선 “50만 원이나 많은 70만 원을 준다”고 강조한 것.

효과는 얼마간 있었다. 지방노동위원회 사용자 위원 한만진이 2015년 사월 28일 심문회의에서 마이너 신문사 쪽에게 “활동비를 더 많이 지급하는 게 맞죠?”라고 묻자 즐거이 맞장구를 놓았으니까. 음. 하지만 그 마이너 신문사의 몇몇은 노동위원회에 자랑스레 활동비 증액을 내밀 때와 달리 감출 것과 밝히고 싶은 걸 나누고는 했다. 내가 2014년 십이월 24일 경기인천센터로 출근한 날로부터 2015년 일월 25일 거듭 징계한 데 따른 출근 정지(정직)가 시작되기 전날까지 1개월 치 활동비를 지급하지 않은 걸 감췄다. 2015년 일월 26일부터 그해 이월 25일까지 한 달간 ‘정직(停職)’한 뒤 경기인천센터로 되돌아갔을 때에도 삼월 2일 지급했어야 할 활동비를 5일에야 줬다는 것 역시 숨겼다. 그나마 월 활동비를 온전히 지급하지 않고 30만 원으로 시작한 뒤 다달이 조금씩 올려 3개월쯤 지났을 때로부터 70만 원을 다 주겠다며 놀린 것도 가렸다.

나는. 뭐, 그럴 수 있겠거니 — 하고픈 대로 하겠거니 — 하며 너털대고 말았다. 구질구질했으니까. 하물며. 2015년 ‘사월’ 활동비를 손에 쥐고는 조몰락대며 이걸 다 줄까 말까 하던 그 마이너 신문사 몇몇의 파렴치와 ‘오월’엔 아예 지급하지 않은 천연덕스러움까지 지켜본 바에야.

전기 끊김. 겨우내 찬물. 더러운 화장실. 음. 외딴섬. 유배다웠다.

▴2015년 일월 14일 오후 3시 30분 마이너 신문사 경기인천센터 전깃불이 나간 모습. 창 쪽 문을 열어 둬 그나마 빛이 비꼈다. 문이 닫혀 있으면 온통 캄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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