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규 지음. 알마 펴냄. 2015년 5월 1일 1판 1쇄. 2015년 10월 30일 1판 3쇄.
삼성전자는 1년에 몇 명이나 정년퇴직을 하는지 대외비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평균 근속 연수는 9년, 삼성전자에서 임원이 될 확률은 0.1퍼센트다. 99.9퍼센트의 사무직은 정년은커녕 40대를 넘기기 어렵다. 사무직 노동자는 스스로 자신을 ‘정리해고’한다(25쪽).
1920년 4월 11일 최초의 전국적 노동단체 조선노동공제회가 만들어졌다. 그해 8월 23일 전국에서 여덟 번째로 군산부지회가 생겼고, 1922년 12월 1일 군산정미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20년대 들어 쌀가마를 짊어지는 일을 하던 매갈이꾼과 쌀을 선별하는 일을 하던 미선공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54쪽).
1987년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린 안양 1번가에 노동자·학생·시민 2만 명이 모였다. 밤 10시 30분 안양 4동 민정당 안양지구당사와 맞은 편 경찰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안양시청을 거쳐 안양경찰서로 행진하던 노동자들은 화염병을 던져 노동부 안양출장소를 불태웠다. 다음 날 새벽 2시 안양경찰서 벽돌담이 무너지고 경찰서 관서가 불에 탔다. 6월 19일 시작된 안양권역 6월 민주항쟁이 23일을 거쳐 26일 폭발한 것이다(116쪽).
구미국가산업단지는 1969년 3월에 착동해 1973년 12월에 준공된 섬유단지로 출발했다(103쪽).
2001년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에어컨을 만드는 광주 캐리어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용역깡패와 구사대에 의해 공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구사대 대열에 소수지만 정규직 노조원들이 섞여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경찰은 비정규직을 차에 싣고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
캐리어 사내하청 송영진 씨는 “형님, 동생 하며 같이 일하던 정규직 노동자들이 안정된 고용을 위해 쇠파이프를 들어 우리를 향한 폭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비극의 정점을 이뤘다”고 회상했다(132쪽).
1994년 4월 15일 대전 유성에 있는 생명공학연구소 강당.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화학연구소 등 14개 연구소 3251명이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과기노조)를 결성했다.······중략······기업별 노조를 허물고 초기업단위 노조로 전환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이었다(168쪽).
KBR 노조는 자동차 품질에 심각한 우려를 제기한다. 회사가 밀양에서 만든 미승인 볼을 KBR에서 제작한 것처럼 속여 베어링회사와 자동차부품공장에 납품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박스갈이’다. 품질이 떨어지는 볼을 쓰면 자동차의 품질에도 나쁜 영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 생명보다 이윤이 먼저인 나라, 대한민국 전체가 세월호다(200쪽).
기아차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2007년 8월 23일 ~ 31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도장공장 점거 파업을 벌일 때 농성천막을 불태우고 연대하러 온 노동자들을 폭행했다. 대의원대회에서는 정규직·비정규직 노조 통합안을 부결시키기도 했다. 또한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외면하고 장기근속자 자녀 가산점 혜택을 합의해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207쪽).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은 50퍼센트 휴일근무수당 지급을 삭제한 근로기준법 ‘개악안’을 내놨다(216쪽).
다스. “노동조합이 바뀌면서 제일 좋은 건 노예근성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됐다는 거예요. 중간관리자 눈치 안 보고, 욕 안 얻어먹고, 내 할 일 하고 내 월급 받아가게 됐다는 거죠.” 임도형 지회장이 환히 웃는다(238쪽).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 동원탄좌 광부들이 임금 40퍼센트 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전국 채탄량의 11퍼센트인 230만 톤을 생산하는 최대 민영탄광이었다. 경찰이 지프차로 광부 4명에게 중경상을 입히자 노동자 500여 명이 사북지서를 점거했다. 이튿날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병력 300여 명이 사북으로 들어왔으나 5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경찰을 사북읍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무기고와 화약고를 장악하고 공권력을 무장해제시킨 노동자들은 자치방범대를 뽑아 치안을 유지하며 해방구를 만들었다(288쪽).
한국의 학생운동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과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계급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중략······학생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노동자로 변화시키는 것을 ‘존재 이전’이라 표현했고, 이를 위해 ‘현장이전팀’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330쪽).
(여미지) 식물원 직원이 120명에서 35명으로 줄어든 사이 120만 명이던 관광객은 40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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