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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사 ㅡ 한성순보에서 유튜브까지

eunyongyi 2020. 4. 4. 13:17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9년 2월 28일 초판 1쇄.


(베델)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75쪽).


(최민지.) “총독부 당국은 1924년부터 김성수의 경성방직에 사업 보조비라는 명목으로 해마다 막대한 보조금을 줬고, 그 결과 기업적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됐다(104쪽).”


(정진석.) 김성수는 동생인 김연수가 경영한 해동은행, 고무신 제조와 무역업을 하는 경성상공회사 등을 합쳐 1930년에는 500만 원의 재산을 소유했으며, 그의 인척들의 재산까지 합치면 약 1000만 원을 동원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다. 1931년 12월에는 경영난에 빠져 있던 보성전문학교까지 인수했다(134쪽).


방응모의 공격적인 경영은 두 신문사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켜 ‘기생 관광’이라는 희한한 수법까지 등장하게 만들었다. 1933년 11월 방응모는 이광수와 함께 2주간에 걸쳐 일본을 방문해 일본 광고주들을 접촉했다. 이에 질세라 1934년 <동아일보>는 광고주인 일본의 제약, 제과, 화장품 회사의 간부 20여 명을 초청해 기생 관광을 시켜 줬는데, 나중엔 <조선일보>까지 이 수법을 동원해 두 신문 간의 경쟁은 그야말로 ‘이전투구’를 방불케 했다(138, 139쪽).


(미디어오늘 1995. 7. 12.)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체육부 기자 이길용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단순히 충동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장기를 지웠다”고 고백했다. 사건이 터지자 사장 송진우는 이길용을 불러놓고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 버렸다”고 큰 호통을 쳤으며, 이 소식을 들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도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면서 노여워했다. 그 후 송진우는 무기 정간 해제를 위해 총독부 고관들에게 이 사건은 일개 기자의 독단에 의해 저질러진 몰지각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소연했으며 급기야 이길용 등 13명의 사원을 해고했다(148쪽).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촉구한 신문은 한민당의 대변지인 <동아일보>였다(199쪽).


1953년엔 전북 이리에서 발행되던 <삼남일보> 7월 11일 자 기사 제목과 충북 청주에서 발행되던 <국민일보> 7월 23일 자 기사가 ‘대통령’을 ‘견통령’으로 오식해 두 신문은 8월 12일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으며 담당자들이 구속돼 구류 처분을 받았다(223쪽).


1957년 1월 11일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이 결성됐다. 관훈클럽은 ‘풀브라이트 동창생’들이 조직한 단체였다(236쪽).······중략······’풀브라이트 계획’······중략······이는 세계 개발도상국가들의 엘리트들을 “초청해 미국이라는 사회를 구경시켜 혼을 빼 미국 혼을 그 두뇌 속에 심어 주는 교육 사업”이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미국을 다녀온 기자들이 관훈동에 있는 김인호의 하숙집에서 창립 모임을 가져 ‘관훈클럽’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237쪽).


<동아일보>는 1961년 5월 26일 자 ‘혁명 완수로 총진군하자’는 제목의 사설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다소간 ‘비민주적인 방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피할 수 있는 도리는 없을 것이다”고 주장했다(266쪽).


1963년 4월 25일 민영 동아방송(DBS)이 개국했다. 동아방송은 모기업인 <동아일보>를 등에 없고 보도 방송에 많은 힘을 쏟아 라디오 저널리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라디오 광고를 활성화시키는 데에도 일조했다(277쪽).


(김재길.) 정부가 DTV의 부산국 개국을 허가한 것은 당시 부산에서 유행하던 일본 TV 시청에 대응하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부산에서는 지역에 따라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 TV의 시청이 가능했으며 1961년 NHK가 쓰시마섬에 중계탑을 세우면서 부산 일대에 일본 TV 시청이 유행했던 것이다(284쪽).


<조선일보>는 1968년 박 정권이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서 4000만 달러 상당의 차관을 들여왔다(302쪽).


(정진석.) 장기영은 1960년 7월 17일 <소년한국일보> 창간을 시초로 해 1960년 8월 1일에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했고, 경제부총리직(1964년 5월 ~ 1967년 10월)을 끝내고 돌아온 후 1969년 1월 1일에 <주간여성>, 1969년 9월 26일에 <일간스포츠>를 창간했다(306쪽).


1966년 정부는 전자산업을 수출육성산업으로 지정해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면세 혜택을 줬다. 박정희는 1967년 1월 17일 연두교서에서 “전자공업 발전과······국산화 개발에도 힘쓸 것”이라고 언급했다. 1968년부터는 텔레비전 수상기의 국내 조립 생산이 가능해졌다. 정부는 1969년엔 전자산업육성법을 공포해 전자산업 지원에 박차를 가했다(311쪽).


1980년 11월 10일 문공부 장관 이광표는 12월 1일부터 컬러 시험 방송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중략······이 무렵 컬러 TV를 생산하고 있던 전자업계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주요 수출국이던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수입 규제 조치를 취해 수출 시장이 막히기 시작했고, 국내 흑백 TV의 보급률은 90퍼센트대를 웃돌고 있던 상황이다. 컬러 TV 수상기의 국내 시판은 이런 상황에서 가전업계의 숨통을 틔워주고자 한 정부의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380, 381쪽).


미네르바는 2009년 1월 9일 허위 사실 유포죄 혐의로 긴급 체포됐지만, 법원은 4월 20일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통하던 박대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유영현 판사는 “구체적 표현 방식에서 과장되거나 정제되지 않은 서술이 있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허위의 사실’이라고 인식하면서 글을 게재했다고 보기 어렵고 ‘공익을 해할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539쪽).


‘PC충’은 PC, 즉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강조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인기를 누리는 인터넷 유행어의 자리에 올랐다(5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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