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999년 3월 2일 초판 1쇄. 2015년 7월 30일 초판 27쇄.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專門家’ 37쪽.)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오래된 書籍’ 47쪽.)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흔해빠진 독서’ 59쪽.)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61쪽.)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植木祭’ 85쪽.)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90쪽.)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위험한 家系·1969’ 93쪽.)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우리 동네 목사님’ 129쪽.)
하루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노을’ 146쪽.)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꽃’ 169쪽.)
“눈이 오면 거리가 없어져요.”
(<겨울의 끝> 221쪽.)
네가 바라는 월남전만큼의 절박한 죽음 앞에서의 긴장을 너의 생, 현재에서 처절하게 느낄 수 있는 파국이 너에게 다가오기를 바랄 수밖에 내가 할 일은 없겠군. 그러한 파국이 너에게는 축제일 테니까. 또한 네가 생각하는 그따위 쓸쓸함이나 막막한 차단감 같은 것들은 모든 인간이 괄호 안에 묶어두고 살아가고 있음을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마치 네가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네 의지와는 무관한 한 개 괄호인 것처럼.
(<환상일지> 241쪽.)
제3묘원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탔을 때 50대 후반(혹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파마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초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 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 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앞에 타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한열이 어머니예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 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파마 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한열이 누이의 딸이에요.” 봉고차는 그녀와 나만을 싣고 달렸다.
(<짧은 여행의 기록>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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