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엮음. 강이현 옮김. 그물코 펴냄. 2018년 9월 20일 1판 1쇄.
성장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행복을 증진하지 않는다. 이는 기본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면 추가 수입은 위치재(이웃보다 더 큰 집 등)에 점점 더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중략······모든 이의 지위가 올라가면 누구도 남들보다 더 잘살 수 없다. 이는 ‘제로섬’ 게임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장이 위치재의 가격을 올린다는 점이다. 이것이 성장의 사회적 한계이다. 성장은 지위 경쟁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고 오로지 악화시킨다. 따라서 모든 이를 위해 충분히 생산하는 성장은 불가능하다(33쪽).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경제의 특징은 사회적 잉여의 상당 부분을 새로운 생산에 제도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이다(40쪽).
탈성장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전환을 의미한다(43쪽).
환경 정의 운동은 더 적게 소비하고 생산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 ‘더 적은’ 생산품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사람들이 생산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보다 평등한 도시와 농촌 관계를 이뤄야 한다(80쪽).
심리분석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은 유럽에서 나치주의가 퍼지고, 히틀러의 선동에 위협받았던 타성을 돌이켜 보며 사람들이 자신의 물건을 버리기 어려워 늦게 도망갔다는 점을 지적했다(111쪽).
제임스 오코너가 주장했듯, 끝없는 확장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을 만들어 낸다. 즉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을 더욱 상품화함에 따라 체계 재생산의 기초 조건이 약화된다(122쪽).
경제 성장은 소득 증가를 통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약속하지만, 그 행복을 지속할 수 없다. 에스테린의 역설은 사회가 부유해져도 개개인이 반드시 행복해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생산과 시장은 꾸준히 팽창하며 돌봄, 사회적 삶, 호혜의 영역을 침범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해체하고 좋은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126쪽).
폴라니(1957)는 모스의 가설을 이어받아 시장 사회에서 상품화는 모든 사회관계를 화폐 교환으로 와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주의 바람 속에 이뤄지던 토지, 노동, 돈의 상품화를 비판했다. 또한 전통 상품과 달리, 이들 토지, 노동, 돈 등의 허구적인 상품은 사람이 먼저 만들지 않고, 판매를 위한 것도 아님을 지적했다(131쪽).
공유물 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활동가와 학자들은 지난 몇 년간 함께 공유물을 정치 철학과 정책 의제로서 다루는 담론을 개발해 왔다. 이 네트워크는 오늘날 민족 식물학적 지식, 유전자, 생물 형태, 합성 나노 물질 등에 대한 개인(기업)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엔클로저의 도덕적, 정치적 합리화에 맞서 싸운다(146, 147쪽).
평등을 사회학적으로 검증되는 개념이나 관찰되는 불평등을 치유할 정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명하게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조건으로 여겨야 한다(174쪽).
국내총생산은 ‘더하기’ 버튼은 크게 달려 있지만, ‘빼기’ 버튼은 없는 계산기이다.
이와 동시에 국내총생산은 집안일이나 자원 활동처럼 돈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 많은 유익한 활동을 계산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스스로 빨래를 한다면 이는 국내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10달러를 주고 세탁을 맡기고, 당신이 나에게 10달러를 주고 세탁을 맡긴다면, 국내총생산은 20달러 상승한다. 이는 세탁된 셔츠 숫자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195쪽).
스미스와 리카도의 현대판인 맬서스는 인구 증가가 필연적으로 식량 생산 증가 속도를 초과할 것이며, 이에 따라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맬서스의 주장을 거부했지만, 그가 자연 체계의 역량이 계속 확장하는 경제를 받쳐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데 주목한 것은 오늘날까지 경제 성장에 대한 비판의 핵심 내용으로 남아 있다(203쪽).
경제 성장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유의미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경제 성장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음으로써 국가는 완전 고용, 여가 증대, 풍족한 삶, 더 높은 민주 참여, 환경 회복력 등 좋은 삶과 번영에 보다 직접 기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둘째, 생태자원적으로 제약받는 상황에서 부유한 국가가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개발도상국의 경제 성장을 희생시켜야 할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이유를 감안하면, 이제 선진국은 성장 없는 관리 또는 탈성장을 고려해야 할 때다(205쪽).
스스로의 시간과 삶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자유는 건강, 고용, 소득, 결혼, 종교보다 삶의 만족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209쪽).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는······중략······자원을 이용해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변화는 자원 소비율을 낮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인다고 결론지었다(219, 220쪽).
많은 사람들은 제본스가 살던 시대처럼 자원 소비를 물리적으로 제한하는 대신 더 효율적으로 자원을 사용해 자원을 절약하겠다는 불확실한 전략에 기대고 있다(224쪽).
기본소득 체계의 실현 가능성에는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피츠 패트릭, 1999). 첫 번째는 기본소득을 노동 성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주면 ‘무임승차’ 사회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경제 파탄을 불러온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간 존재의 이해에 바탕을 둔다. 어느 정도 ‘무임승차’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 고립되고 게으른 존재가 되는 것보다 더 보람차고 의미 있다고 느낀다. 더군다나 생산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소수가 있다고 해도, 이는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부담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존재하는 빈곤보다 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일지 모른다(269쪽).
기본소득은 무급 노동과 다른 형태의 사회적 기여의 가치를 인식하게 해 주며, 전통적인 노동 시장이나 ‘공식 경제’ 참여자가 아니더라도 경제 시민권을 가지도록 돕는다(270쪽).
현재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금융 자본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부패한 ‘금권 정치’ 또는 ‘기업형 정당 체계’로서 일반 대중의 의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비난받는다(307쪽).
성장에 집착하고 자원 집약적인 소비 경제 중심에서 우리는 위태롭게 미쳐 가고 있다. 의미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공동체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물질적으로 가벼워질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이들 활동은 실제로 사람을 고용하는 노동 집약적 분야라는 이유로 가치가 없다고 폄하된다(325쪽).
시장 사회에서 무시되거나 평가 절하되는 중요한 일들에 예술적으로 접근하는 즉흥적인 영혼을 가진 이들, 땜장이, 발명가들을 나는 나우토피아인이라고 부른다. 실천에 뿌리를 둔 나우토피아인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는 임금 노동을 넘어선 자기 해방적 계급 정치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 준다(327쪽).
임금 노동과 임의적 계층의 강압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다. 이들은 낭비의 흐름에서 땜장이이자 대장장이이며,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장을 열고 삶의 목적을 재정의하며, 새로운 실천을 보여 준다(329쪽).
탈정상 과학의 인신론적 상정은 제롬 라베츠(1971)의 책 <과학 지식과 그것의 사회 문제들>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많은 탈성장주의자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상가인 자크 엘륄처럼 라베츠(2011)는 ‘기업가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기술’을 생산하는 ‘산업화된 과학’을 비판했다(334쪽).
신디칼리즘. 각주 1. 생디칼리즘이라고도 하며, 정당 정치를 불신하고 노동자 계급의 직접 활동을 통해 자본가 사회를 붕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339쪽).
긴 노동 시간은 사회 연결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TV 시청 시간을 늘리며, 피로를 낳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짧은 노동 시간은 민주 거버넌스에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데 필수적이다(352, 353쪽).
부엔 비비르는 서구 전통의 비판적 사고에 기초한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천은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는 환경주의와 가부장적 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돌봄의 윤리를 주장하는 신페미니즘이다.······중략······부엔 비비르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미래의 눈으로 직면하는 것이다(360쪽).
자본주의는 위험하고, 본질적으로 파괴적인 체계이다. 대체로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노동자의 좋은 삶과 이윤 간 갈등과 진짜 생산비용을 감추고, 사회의 책임들을 무시하기 위해 환경을 착취하기 때문이다(371쪽).
경제학자들은 이제 거품은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성장에 필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387쪽).
스타하노프. 각주 3. 소비에트연합에서 생산 목표량을 초과한 노동자들을 일컬었으며, 소비에트연합 정부는 이들을 기려 노동 생산력 증가를 유도하는 운동을 진행했다(388쪽).
부자인 개인들이 모든 것을 가진 이후에 우울증을 앓거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혼자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모든 이를 위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생태적으로 유해하며, 사회적으로 부당한 결과를 이끌 수 있다(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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