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 지음. 창비 펴냄. 1979년 11월 15일 초판 발행. 2006년 8월 5일 개정1판 발행. 2015년 3월 25일 개정2판 1쇄 발행. 2018년 4월 2일 개정2판 9쇄 발행.
<순이 삼촌>
고향을 외면하여 살아오길 팔년, 그 유맹의 십년 전으로 되찾아가려면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주저주저하며 다가가야 하리라. 기차를 타도 완행을 타서 반도 끝까지 가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밤을 지새우며 밤 항해를 해야 하는 수륙 천오백리 길. 차멀미, 뱃멀미에 시달리며 소주에 젖고 팔년 만에 찾아가는 고향 생각에 젖어서 허위허위 찾아가야 할 고향이었다(43, 44쪽).
잿빛 바다 안으로 날카롭게 먹혀들어간 시커먼 현무암의 갑(岬), 저걸 사투리로 ‘코지’라고 했지(45쪽).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60쪽).
“순이 아지망은 죽어도 발쎄 죽을 사람이여. 밭을 에워싸고 베락같이 총질해댔는디 그 아지망만 살 한점 안 상하고 살아나시니 참 신통한 일이랐쥬(62쪽).”
“맞는 말이라. 그땐 왼 섬이 육지것들 독판이랐쥬” 하고 큰당숙 어른이 혀를 찼다(82쪽).
“아니라.······중략······악독한 것은 그 밑에 있는 육지것들이라(82쪽).”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85쪽).
눈에 띄는 대로 주워냈건만 잔뼈와 납탄환은 삼십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그것들을 밭담 밖의 자갈더미 속에다 묻었다(94쪽).
<도령마루의 까마귀>
나이가 원수인 세상에 어른 되려고 하다니. 이 난세엔 아이는 자라서는 안된다. 나이 먹어서도 안되어. 젊은 나이가 죄요 원수인지라 반드시 총 맞거나 죽창 맞아 죽는 날이 오는 법이다(105쪽).
지척이 천리라던가, 오리 밖에 고향을 두고도 못 가는 신세가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내 것을 내가 못 먹다니! 안으면 미어질 듯 뼈가래가 앙상한 젖아기를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노형 집터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나 온몸이 덜덜 떨리곤 했다(109쪽).
아니, 해변에 내렸어도, 한라산 너머 서귀포에 가 있어도 10월 보름날 붉게 물들여진 하늘 한 귀퉁이를 쳐다보았으리라. 그 무렵 밤하늘은 거의 보름 동안이나 토벌군의 소까이로 중산간 부락들이 타는 불빛으로 노상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132쪽).
<해룡 이야기>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 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이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159쪽).
<초혼굿>
아, 한날한시에 곡성이 터지는 홀어멍 동네. 진호는 밤새도록 병든 과거 속에 빠져들어가 헤어나올 줄 몰랐다(240, 241쪽).
<아버지>
“당장 읍내 형님한테로 이살 가야 한다니깐요. 내 참, 동네가 온통 불 질러진다니깐 그러네(315쪽).”
임규찬 해설.
현실이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행위를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현대사도 그랬다. 우리의 현대문학이 수행해온 가장 큰 기능의 하나가 실제 역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하는, 대체역사의 역할이었다(338쪽).
현기영에게 아름다움이란 확실히 진실이다(3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