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원 지음. 책과함께 펴냄. 2020년 2월 22일 1판 1쇄.
(박성래) 그는 조선의 천문 기관에 근무하던 관원이 열심히 하늘을 관찰해 일식과 월식, 혜성과 가뭄을 관찰하고 기록했지만, 그러한 활동이 오늘날의 과학 활동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해석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 줬습니다(29쪽).
<오행지>는 <천문지>와 함께 온갖 우주와 자연 현상 기록의 저장 창고 구실을 했습니다. <오행지>에는 186번의 가뭄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1002년(목종 5년) 6월 제주도 산의 네 곳에서 구멍이 뚫려 붉은 물이 닷새 동안 솟구쳐 나오더니 멈췄다. 그것이 모두 기와처럼 생긴 돌이 됐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화산 폭발 기록입니다. 5년 후인 1007년에도 제주도에서 화산이 터졌습니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캄캄해지면서 땅이 천둥 때처럼 흔들리기를 이레 동안이나 밤낮 계속됐다. 그러고 나서야 날씨가 개기 시작했는데, 산의 높이는 백여 길이나 됐고 둘레는 사십여 리나 됐다. 초목은 없이 연기만 자욱하게 덮었는데, 쳐다보아서는 석유황 같아서 사람들이 무서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전공지가 바로 그 산 밑까지 가서 그 모양을 그려 바쳤다.
이때 나라에서 전공지라는 관리를 제주도에 보내 관찰하게 했습니다. 이게 한라산 분화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한라산은 고려시대에는 활화산이었고, 그 뒤부터 현재까지는 쉬고 있는 휴화산이죠(85쪽).
그러니 자격루는 ‘자명 장치를 갖춘 물시계’라는 뜻이 됩니다(118쪽).
우리가 지금 쓰는 ‘서기’는 ‘서양 기준’을 뜻합니다. 예수 탄생이 첫해의 기준이죠. 부처와 관련해 ‘불기’를 쓰기도 합니다. 불기는 부처가 돌아가신 해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부처가 예수보다 5백여 년 먼저 살았습니다. 서기에다 544년을 더하면 불기가 됩니다. 단군왕검이 우리나라를 연 해를 기준으로 삼은 ‘단기’도 있죠. 서기에다 2333년을 더하면 단기와 같습니다. 이슬람교는 예수의 탄생보다 622년 늦어서, 서기에서 그만큼 빼 줘야 합니다(147쪽).
숙종 때 서울에서 550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도 경흥에서 봉호를 올리면 대략 6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면 시속 90킬로미터쯤 됩니다(256, 258쪽).
시간이 꽤 지났을 때 ‘한참’이라는 표현을 쓰죠? 원래 ‘한 참’은 하나의 참, 곧 역 하나 사이의 거리를 뜻했습니다. 보통 25 ~ 30리 정도 간격으로 역참을 뒀으니, 이 거리가 한 참인 셈입니다. 그러다 한 참의 거리를 가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뜻이 변했죠(261, 262쪽).
김유정도 내로라하는 황금광이었다고 합니다(271쪽).
단군이 도읍을 세운 기원전 2333년 무렵 우리 땅에는 마늘이 없었습니다.······중략······중국 기록을 보면 기원후 300 ~ 400년 무렵 산, 곧 대산이 서역에서 들어왔다고 합니다(307쪽).
콩은 만주 지역과 우리 땅이 세계 최초의 원산지입니다(313쪽).
삼국시대부터 쌀의 생산량이 늘어 주식이 됐고, 조선시대에는 인구 1천만 명이 1인당 1가마 생산량에 도달했습니다. 공평하게 분배된다면 조선 사람 누구든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생산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식량은 늘 부족했고, 굶어 죽는 사람이 넘쳐났습니다(315쪽).
인류가 소금을 이용하기 시작한 건 기원전 6000년 즈음으로 추정됩니다.······중략······봉급을 뜻하는 샐러리(salary)는 고대 로마에서 생긴 말인데, 매달 소금을 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343쪽).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에 3만 마리 안팎이 있었다고 봐도 될 테니, 만승지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림잡아 우리나라의 옛 인구를 500만 ~ 800만 명으로 치면, 인구 100 ~ 200명에 말 1마리 정도 있었던 셈입니다(387쪽).
그런데 문익점이 붓의 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 들여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붓의 두껍’도 아니고, ‘몰래’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과장한 거라고 밝혀졌습니다(446, 447쪽).
452년 일본은 백제에 훌륭한 의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백제가 일본에 보낸 의사가 백제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고구려 의사 덕래였다는 것입니다. 그 뒤 고구려 의사 덕례는 일본 난바(옛 오사카)에 정착해 살면서 이름을 떨쳤고, 자자손손 의사를 배출해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들을 난바 약사라 부르며 존경했습니다(462, 463쪽).
닭을 이용한 방법도 있었습니다. 찹쌀밥을 시체의 목구멍에 넣었다가 뺀 후 그 밥을 닭에게 먹이는 겁니다. 만약 독살당한 거라면 닭이 죽겠죠. 이는 은비녀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은과 반응을 일으키는 독물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독살을 판정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가짜 은으로 만든 비녀하면 판별이 정확하지 않았거든요(485쪽).
시체를 다루는 ‘오작인’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오작인은 사체 검사를 도맡은 하인을 말합니다(492쪽).
허준은 양반 가문, 그중에서도 무관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정3품을 지냈고, 아버지는 종4품 이상을 지냈습니다.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의 둘째 도련님이었죠. 물론 어머니가 정실부인이 아니어서 서자이기는 했지만 그게 허준의 공부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512쪽).
일본은 16세기 말부터 난학(‘네덜란드에서 온 학문’이란 뜻)이 발달하면서 서양 의학을 받아들였습니다(515쪽).
세종 때는 최고 통치자인 임금부터 이순지 같은 문관, 이천 같은 무관, 장영실 같은 기술자까지 모두 힘을 모아 놀라운 성취를 해냈죠. 이후에는 그런 모습을 거의 보기 힘듭니다. 과학기술이 중인이나 하는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 겁니다(559쪽).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어렵지만, 우리나라 인구는 삼국시대에 삼사백만, 조선 초에 오륙백만, 조선 말에 팔구백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융성했던 신라 서라벌의 인구는 이삼십만 명에 달했고, 조선시대 서울 인구도 이와 비슷했습니다(563쪽).
학질은 추웠다 열났다 벌벌 떨게 하는 지긋지긋한 병이었습니다. 지금도 ‘학을 뗐다’는 말에 흔적이 남아 있죠(564쪽).
우리 역사에서 의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저는 서슴지 않고 1977년 시작돼 1989년에 전 국민에게 확대된 의료보험 제도를 들겠습니다(573쪽).
이처럼 18세기 후반 서울에 약국이 등장했습니다.······중략······서울 종로와 구리개(오늘날 을지로 입구)에는 약방이 많이 생겨나 있었습니다(578쪽).
페이퍼라는 말은 파피루스(papyrus)에서 유래한 겁니다(661쪽).
얼음은 장례를 치를 때 가장 필요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보통 그다음 달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중국의 관례대로 3개월 후에 치르는 경우도 있었고, 왕은 3 ~ 5개월 후에 장사를 치렀습니다(718쪽).
1896년 1월부터는 태양력이 시행됐습니다(811쪽).
노벨상 후보감으로 거론되던 화학자 이태규는 일본과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의 라이벌이자 동료인, 나일론에 이은 두 번째 합성 섬유 비날론을 개발한 화학 공학자 리승기는 일본의 대학에서 주목받았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한 과학자로는 주류 분야가 아닌 나비를 연구했던 석주명만이 겨우 세계적 업적을 나타냈을 뿐입니다(831쪽).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텔레비전은 1966년 8월부터 1968년까지 생산됐습니다. 쌀 한 가마니 값이 4천 원이던 시절, 당시 흑백텔레비전 값은 무려 6만8천 원이나 됐지만 폭발적인 인기로 생산량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835쪽).
우리나라는 카이스트의 오준호 박사가 2001년에 연구를 시작해서 2003년에 KHR-2라는 첫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이 로봇을 더 손보고 개발한 끝에 2004년 카이스트의 휴머노이드 로봇연구센터가 최대 시속 3.6킬로미터로 뛸 수 있는 ‘휴보’를 만들었습니다. 2011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사람과 흡사하게 얼굴 표정도 드러내고 얼굴 인식, 음성 인식 등의 기능을 갖춘 로봇 ‘키보’를 선보였죠(836, 837쪽).
이밖에 지구의 화산 생성 과정과 생태계 연구에 중요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 불교의 전통을 간직한 산사도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입니다(8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