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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 이태준 단편선

eunyongyi 2021. 5. 22. 16:06

이태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6년 2월 1일 초판 1쇄. 2009년 12월 14일 초판 4쇄.

 

<달밤>

 

 나는 그 다섯 송이의 포도를 탁자 위에 얹어놓고 오래 바라보며 아껴 먹었다. 그의 은근한 순정의 열매를 먹듯 한 알을 가지고도 오래 입 안에 굴려보며 먹었다(32쪽).

 

<까마귀>

 

 저녁마다 그는 남포에 새 석유를 붓고 등피를 닦고 그리고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서 어둠을 기다리었다. 방 구석구석에서 밤의 신비가 소곤거려 나올 때 살며시 무릎을 꿇고 귀한 손님의 의관처럼 공손히 남포갓을 들어올리고 불을 켜는 것이며 펄럭거리던 불방울이 가만히 자리 잡는 것을 보고야 아랫목으로 물러나 그제는 눕든지 앉든지 마음대로 하며 혼자 밤이 깊도록 무얼 읽고 무얼 생각하고 무얼 쓰고 하는 것이다(39쪽).

 

 까마귀들은 이날 저녁에도 별다른 소리는 없이 그저 까악까악거리다가 이따금씩 까르르 하고 그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곤 하였다(54쪽).

 

<장마>

 

 “가만히 눴느니 반침이나 좀 열어보구려.”

 “건 또 무슨 소리야?”

 “책이 모두 썩어두 몰루?”

하고 아내는 몰래 감추어두고 쓰는 전기다리미 줄을 내다가 곰팡을 턴다.

 “책두 본 사람이 좀 내다 그렇게 털구려.”

 “일이 없어 그런 거꺼정 하겠군! 좀 당신 건 당신이 해봐요. 또 남보구만 그런 것두 못 보구 집에서 뭘 했냐 마냐 하지 말구······(55쪽).”

 

나 혼자밖에 쓰는 사람이 없는 면도칼이라, 녹이 슨 것은 틀림없이 내가 물기를 잘 닦지 못하고 둔 때문이다. 녹을 벗기려면 한참 갈아야 되겠다. 물을 떠오너라, 비누를 좀 내다 다우, 다 귀찮은 노릇이다. 링컨과 같은 구레나룻을 가진 이상의 생각이 난다. 사내 얼굴에는 수염이 좀 거칠어서 야성미를 띠어보는 것도 좋은 화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 수염은 좀 빈약하다. 사진을 보면 우리 아버지는 꽤 긴 구레나룻이셨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그것을 물리지 않으셨다.

 아직 열한점, 그러나 낙랑이나 명치제과쯤 가면 사무적 소속을 갖지 않은 이상이나 구보 같은 이는 혹 나보다 더 무성한 수염으로 커피잔을 앞에 놓고, 무료히 앉았을는지도 모른다(58, 59쪽).

 

할 수 없이 나는 중학 때 원족으로 진관사 가던 길을 생각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앞을 지나 무악재를 넘어서면 저 세검정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모래도 곱고, 물도 맑았다(63쪽).

 

구보도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비는 한결같이 구질구질 내린다. 유성기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누구든지 한 사람 기어이 만나보고만 싶다. 대판옥이나 일한서방쯤 가면 어쩌면 월파나 일석을 만날지도 모른다(74쪽).

 

<농군>

 

 모두 물줄기로 뛰어들었다. 두 손으로들 움켜본다. 물은 생선처럼 찬 것이 펄펄 살았다. 물이다. 만주 와서 처음 들어보는 물 흐르는 소리다. 입술이 조여든 창권은 다시 움쳐 흙물인 채 뻘걱뻘걱 들이켰다(139쪽).

 

<밤길>

 

처음 사날 동안은 품삯을 받는 대로 먹어 없앴다. 처자식 생각이 났으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선 내 입부터 널름널름 집어넣을 수가 있다(142쪽).

 

<토끼 이야기>

 

 ‘술이 좀 늘어야 물맛을 알지······ 흥, 신문사 십 년에 냉수 맛을 알게 된 것밖에 는 게 무언고(160쪽)?’

 

<해방 전후>

 

현은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아무리 유치장이나 감방 속이기로 이다지 좁고 이다지 더러운 공기는 아니리라 싶어 사람이 드나드는 곳치고 용무 이외에 머무르기 힘든 곳은 변소 속이라 느낄 때, 현은 쓴웃음도 나왔다(188쪽).

 

위고 같은 이는 이미 전 세대에 있어 ‘국민보다 인민에게’를 부르짖은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의 이 시대, 이 처지에서 ‘인민에게’란 말이 그다지 새롭거나 위험스럽게 들릴 것도 아무것도 아닌 줄 알면서도, 현은 역시 조심스러웠고, 또 현을 진실로 아끼는 친구나 선배의 대부분이, 현이 이들의 진영 속에 섞인 것을 은근히 염려하는 것이었다(202, 203쪽).

 

그러니까 모처럼 얻은 자유를 완전 독립에까지 국제적으로 보장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왕조의 대한이 독립전쟁을 해서 이긴 것이 아닌 이상, ‘대한’ ‘대한’ 하고 전제 제국 시대의 회고감으로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은 조선 민족을 현실적으로 행복되게 지도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 지금 조선을 남북으로 갈라 진주해 있는 미국과 소련은 무엇으로 보나 세계에서 가장 실제적인 국가들인 만치 조선 민족은 비실제적인 환상이나 감상으로가 아니라 가장 과학적이요 세계사적인 확실한 견해와 준비가 없이는 그들에게 적정한 응수를 할 수 없다는 것, 현은 재주껏 역설해보았으나 해방 이전에는, 현 자신이 기인여옥이라 예찬한 김직원은, 지금에 와서는 돌과 같은 완강한 머리로 조금도 현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다만 같은 조선 사람인데 ‘대한’을 비판하는 것만 탐탁치 않았고, 그것은 반드시 공산주의의 농간이라 자가류의 해석을 고집할 뿐이었다(217, 218쪽).

 

(김윤식) 구인회란, 문학사적으로는 정지용·김기림·이태준·이효석·박태원·이상·박팔양·김유정·김환태 등 9인의 모임이며 친목단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겉으로 내건 명분은 계급주의의 공리주의적 문학관에 반대하여 순수 문학관을 표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232,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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