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지음. 자유언론실천재단 펴냄. 2021년 3월 22일 초판 1쇄.
공정은 공평과 올바름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공평에 머물고 있는 보도나 논평을 소극적 공정으로, 공평에 더해 올바름까지 숙의한 보도나 논평을 적극적 공정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30쪽).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소통권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누군가 담아내야 한다.······중략······바로 그 임무를 맡은 사회적 제도가 언론이고 저널리즘이다.······중략······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궈낸 가치가 공정이다(32쪽).
언론사적 의미를 짚을 때 “3·1운동의 정신이 그대로 이어진” 신문은 동아일보가 아니라 조선독립신문이었다(41쪽).
총독부가 선택한 발행인은 세 명이었다. 노골적인 친일세력에게 먼저 발행을 허가하기보다 상대적으로 친일색채가 옅은 조선인을 골라 1920년 1월 4일 동아일보를 허가해주었다. 호남지주 김성수는 ‘총독부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이른바 ‘한일합방 공로’로 일본의 귀족이 된 박영효 후작을 사장으로 내세워 신청 서류를 제출했다.
바로 다음날 내놓고 조일동화주의를 표방한 대정친목회 예종석 명의의 조선일보가 발행 허가를 받았다.······중략······김성수는 총독부에 신문허가 신청을 하면서 ‘주식회사 조직’에 나섰다. 전국적으로 발기인을 망라해야 한다며 78명을 모았다(45쪽).
동아일보 광고국에서 일했던 위기봉은 1991년에 출간한 <다시 쓰는 동아일보사>에서 “동아일보의 1천억 재산은 김 씨 일문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고발했다. 조선일보 방응모가 늘그막에 얻은 친아들을 남긴 채 돌연 사망하며 이미 장성한 양자의 핏줄로 세습해온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46쪽).
속간하고 열흘이 지날 무렵에 동아는 “일본 친구여” 표제(1921년 3월 4일 자)의 사설에서 “아! 일본 친구여, 우리로 하여금 속에 서리고 서린 설화와 가슴에 아프고 쓰린 심정을 충분히 토로케 하라. 그대가 우리의 적이뇨 아니라. 그대가 흉악한 사람이뇨 아니라. 우리는 그대의 가슴에도 따뜻한 정의 불이 붙고 그대의 눈에도 아름다운 눈물이 있는 줄을 확실히 믿노라”고 썼다(56쪽).
편집국장 춘원 이광수가 집필한 연속 사설은 작심한 듯 조선 민족은 독립을 할 능력이 없으므로 일제로부터 자치를 허용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59쪽).
이광수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선 “조선 사람의 이마를 바늘로 찌르거든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정신을 몸속에 넣어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글을 쓸 정도로 반민족행위에 앞장섰다(66쪽).
2면 맨 밑에 1단으로 “리완용이 그간 병이 중하여 자리에 누워 앓았던 바 11일 오후 1시경 옥인동 19번지 세상을 떠났는데”라며 간략하게 전했다(70쪽).
한민당 대표(수석총무)가 신문사 사장을 겸했듯이 복간된 동아일보는 자타가 공인한 ‘한민당 기관지’였다. 민족의 표현기관에서 대일본제국의 표현기관으로 다시 미군정과 한민당의 표현기관으로 전환한 셈이다(110쪽).
바로 그 악명 높던 서북청년회의 사무실이 한민당 당사에 있었다. 서울 광화문에 자리한 동아일보사 사옥이다. 서청은 나중에 이승만의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고 일부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5기와 8기로 입학해 훗날 5·16 군사쿠데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중앙정보부 창설에도 가담했다(129쪽).
김병관은 명칼럼으로 신문의 지가를 높인 논설위원 김중배를 전격적으로 편집국장에 임명했다. 김병관과 김중배는 동갑으로 각각 광고국과 편집국에 몸담고 있을 때부터 종종 술잔을 나누던 사이였다(240쪽).
이윽고 김병관 사장은 1991년 8월 1일 김중배 편집국장을 돌연 경질하고 조사연구실로 발령 냈다(243쪽).
편집권을 유린한 동아일보사 사주를 ‘숨은 권력’으로 비판했던 기자 손석춘도 같은 날 사표를 던졌다(247쪽).
“우리는 결코 불행했던 우리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동아일보사의 후배입니다(253쪽).”
김병관은 세무조사 결과 43억여 원의 세금을 포탈하고 회사자금 18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로 2001년 8월 구속기소됐다. 건강상의 이유로 10월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풀려났다. 2002년 2월 1심에서 징역 3년 6월 및 벌금 45억 원을 선고한 재판부는 ‘횡령 금액을 모두 채웠고,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법인 회계를 정상화한 점, 고령의 나이에 이 사건과 관련해 아내의 자살로 아픔을 겪은 점’을 내세워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김병관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30억 원이 선고됐고 상고심에서 원심이 확정됐다. 동아일보사는 그 뒤 김병관 맏아들인 김재호로 세습 절차를 밟았다(263쪽).
삼성과 이병철에 대한 동아일보의 찬가에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나 ‘무노조 경영’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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