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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동아 100년을 말한다

eunyongyi 2021. 7. 17. 12:42

김동현 박래부 박종만 신홍범 원희복 이명재 이부영 이완기 조성호 정철운 최병선 한홍구 지음. 자유언론실천재단 펴냄. 2020년 8월 15일 초판 1쇄.

 

 지금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1920년대 중반 두 신문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근대 문화예술, 학술,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양대 신문의 기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7쪽).

 

그 중 동아 조선의 또 다른 ‘기형아’인 TV조선과 채널A의 2013년 5·18 광주항쟁에 북한국 개입 보도는 민주화 역사 왜곡과 남북 갈등을 동시에 의도한 대표적 악의적 보도였다. 이는 처음 광주 현장을 보도하지 않은 잘못, 폭동으로 매도한 잘못에 이은 광주시민을 세 번이나 죽인 악의적 보도라 판단했다(35쪽).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술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해 징병제와 학병제 찬양을 시작했다.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이 논설은 징병제는 조선반도 청년의 영예이며, 조선인의 단점인 문약과 단결하지 못함을 치료할 양약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힘써 노력하여 위대한 황국신민이 돼야 할 것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성전’에 참여토록 했다(60쪽).

 

 김성수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심판은 결국 2000년대 들어와서야 뒤늦게 이뤄지고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사실이 드러났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해 서훈을 박탈한 20명에 포함돼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1962년 서훈됐던 건국훈장이 취소됐다. 아울러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아직도 김성수의 친일행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60, 61쪽).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8일에 열린 3상회의 결과를 발표 이전에 미리 가짜뉴스로 보도했다. 사실과 정반대로 보도한 것이다. 실제는 소련이 신탁 통치할 이유가 없으니 즉시 독립시키자는 것인데 반해 미국은 5년 이상 신탁 통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97쪽).

 

“적의 도발을 막고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데 있어 박정희 대통령의 계속 집권이 필요하다는 우국충정을 결코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140쪽).”

-동아일보 1969년 8월 8일 자 통단 사설

 

전두환 전역 때 동아는 ‘새 시대가 바라는 새 지도자상’이라고 칭송했고, 대통령 취임에 즈음해서는 “사치를 모르고 물욕을 초월한 청렴결백한 생활로 일관했다”며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157쪽).

 

1989년 대법원은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후일 이 사건 관련해 촌지 수수까지 드러나자 기자협회는 1989년 1월 “저는 기자도 인간도 아니었습니다”는 기자의 증언과 함께 ‘촌지로 얼룩진 언론 왜곡의 전형’으로 규정했다(162쪽).

 

 2013년 5월 13일 TV조선은 ‘장성민의 시사탱크’ 프로그램에서 탈북 장교 출신을 출연시켜 “5·18은 북한군 600명이 침투해 벌인 전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 이틀 뒤 채널A도 북한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다는 탈북 인사의 주장을 방송했다(217쪽).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던 이광수가 1933년 조선일보로 이직하며 조선과 동아의 관계는 매우 불편해졌다. 이광수는 조선일보에서도 편집국장을 맡으며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1933년 삼천리 10월호)’라는 별명을 얻었다(231쪽).

 

 은행가 출신 장기영은 조선일보의 제의로 납북된 방응모 대신 1952년 4월부터 5년 임기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발행부수·지대수입·광고수입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방씨 일가와 갈등을 빚어 1954년 중도 퇴임했으며, 이후 한국일보를 창간했다(234쪽).

 

 1989년 5월 15일 조선일보노동조합은 1975년 해직된 32명 기자들의 원상회복 및 피해배상을 회사에 촉구했으나,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특별성명을 내고 “외부와 연결된 사내 정치투쟁”이라며 전면 거부했다.

 1989년 주간조선이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일행의 유럽순방 당시 추태가 있었다고 왜곡 보도해 평민당이 조선일보 관계자 5명을 고소하자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한국기자협회는 “조선은 더 이상 언론자유를 운위하지 말라”고 비판했다(240, 241쪽).

 

 1993년 조선일보 사장이 된 방상훈의 본명은 방갑중, 해석하면 ‘갑중의 갑’이었는데 만 30세가 지난 1978년 9월 방상훈으로 개명했다. 방갑중은 군 면제를 받았다(241쪽).

 

 월간조선은 1995년 9월 “한국통신 노조위원장이 여비서를 두고 그랜저를 타고 다니며 노조 간부 부인의 통장이 16개”라고 보도했으나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242쪽).

 

 2001년 8월 17일 방상훈이 횡령 및 세금 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그해 11월 초 보석 허가를 받아 석방됐다. 조선일보 주식 6만5000주를 명의신탁 형태로 아들에게 물려줘 증여세 23억5000만 원을 포탈하고, 복리후생비를 지출한 것처럼 전표를 허위로 꾸며 법인세 1억7000만 원을 포탈한 혐의 등이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25억 원이 확정됐다(245쪽).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의 혼외자식은 4남 2녀다(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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