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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라는 짐승

eunyongyi 2023. 3. 4. 23:23

고병권 지음. 천년의상상 펴냄. 2018년 12월 27일 초판 1쇄.

노동력 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자는 노예처럼 자기 자신을 판 것이 아닙니다. 가치를 보존하고 창출하는 능력으로서 ‘노동력’을 판 것이지요(26쪽).

(콩고) 렐레족 사람들은 옷감을 만드는 데 쓰는 라피아와 염료 나무 캠우드를 화폐로 사용했는데, 결혼지참금이나 상벌금, 종교적 헌금 등의 용도로 썼습니다. 그러나 라피아나 캠우드를 상업적 용도로는 쓸 수 없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는 데 쓰는 화폐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똑같은 돈으로 벌금도 내고 물건도 사기 때문에 전통 공동체에서 둘을 철저히 구분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무차별적으로 관여하는 ‘우리 시대의 화폐’가 어쩌면 더 이상한 것일 수 있지요(45쪽, 46쪽).

상품이 날아오는 것은 공동체의 존망을 가르는 대포알이 날아오는 것과 같습니다(56쪽).

생존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데 운명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친구 아마포 직조공이 개인적 성실성만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죠. 자본주의는 “상호 간의 독립성”과 “생산물을 통한 전면적 상호의존성”이 붙어 있는 사회입니다. 각자도생하라, 그러나 운명은 함께 맞는다! 이런 겁니다(121쪽).

“모든 판매는 구매이고 모든 구매는 판매이기 때문에, 상품 유통은 판매와 구매 사이의 필연적 균형을 낳는다는 이론처럼 황당무계한 이론도 없다(127쪽).”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생기는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한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위기입니다(131쪽).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지폐까지 나아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어려운 것은 첫걸음일 뿐”이죠(144쪽).

“국립이라는 칭호를 붙인 대은행들은 그 출생 첫날부터 사적 투기업자들의 회사에 불과했다.······잉글랜드은행은 자기 화폐를, 8퍼센트 이자율로 정부에 대부하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와 동시에 이 은행은 화폐주조권을 의회로부터 획득함으로써 자기 자본을 은행권의 형태로 국민에게 다시 대부할 수 있게 됐다.······얼마 안 가서는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신용화폐를 주화(유통수단)로서 기능하게 했으며, 이 돈으로 국가에 대부하고 국가를 대신해 공채이자를 지불했다.······은행은 자기가 빌려 준 최후의 한 푼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대한 영원한 채권자로 남았다(149쪽).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패권이 수립되는 과정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패권이 수립되는 과정과 함께 일어난 겁니다. 가부장제 역사가 자본주의 역사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둘이 교차하는 곳에서 남성 패권의 자본주의적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