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이기자 — 해고 르포르타주

(10) 판정

eunyongyi 2016. 6. 21. 22:27

2015년 구월 8일. 여름이 덜 물러난 화요일 오후 3시. 중앙노동위원회. 마이너 신문 사장을 위해 달음질하는 몇몇 얼굴이 다시 보였다.

나는. 중앙노동위 재심을 마무리하는 때를 그 마이너 신문을 떠날 날로 진즉 마음먹은 상태였고. 내 오랜 동지인 마이너 신문 노동조합 12대 지부장도 그리 알았다. 2014년 팔월 부당 해고 때로부터 나를 대리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노동법률지원센터 이호준 노무사 역시 알았고.

마이너 신문 사장과 사장을 위해 달음질하는 몇몇 때문에 내 몸 괴롭고 마음 망가진 거. 더 버티기 어렵다고 느꼈다.

중앙노동위 공익 위원 셋은 마이너 신문 사장이 나를 경기인천센터로 복직 발령한 뒤 ‘정직 1개월’에 처분한 게 정당했다고 봤다. 2014년 팔월 24일 거의 같은 까닭을 들어 해고한 건 부당했으되 1개월쯤 출근하지 못하게 한 게(정직) 마땅했다는 뜻. 청소 한 번 하지 않아 사무실 바닥에 쥐며느리가 기어 다녔고, 전기마저 끊겨 캄캄한 곳에 홀로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던 데다 일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왕따로 방치됐음에도 “업무상 필요성이 있다”고 봤으니 내가 대체 어찌 곱씹어야 할까. 공익 위원 셋은 “출퇴근 시간이 늘어나긴 했으나 동료 근로자들도 출퇴근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수당을 더 지급하고 있어 생활상 불이익이 통상 감수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고도 봤다. ‘그 정도는 약과로 알라’는 뜻이었겠지. 음. 공익 위원 셋에겐 마이너 신문에서 2012년 11월부터 경기인천센터로 발령됐던 8명 가운데 셋만 남고 5명이 회사를 떠난 사실을 들여다볼 짬이 없었을까. 여덟에 다섯(62.5%)이 경기인천센터에서 끝내 버티지 못한 까닭을 더 잘 알아봤어야 하지 않을까. 공익 위원 셋은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알아보지 않았다. 그리 살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으니 결국 나 같은 이마저 마이너 신문을 떠나 퇴직률이 여덟에 여섯, 75%로 높아지지 않았나. 당신의 닫힌 눈과 귀 때문에. 이런 걸 두고 공익이라 일컫는가.

마이너 신문 경기인천센터는 지금 없다. 사라졌다. 중앙노동위 판정이 있던 2015년 구월 8일로부터 한 달 반쯤 지나 마이너 신문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공익 위원 셋이 “업무상 필요한 것 같다”고 봤고 “생활상 불이익이 통상 감수할 만하다”던 곳. 내가 시월 1일 스스로 사표를 던진 터라 마이너 신문으로서는 노동위원회 눈치를 볼 까닭이 사라졌던 거. 사무실 임대 계약조차 제대로 맺지 않은 상태였기에 머물던 사람과 짐 조금만 빠져나오면 됐다더라.

‘업무상 필요성’이 정말 있었다면 그리 간단히 문을 닫아걸 순 없었겠지. 청소도 했을 테고. 전기가 끊기는 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을 터. 마이너 신문은 그러나 손쉽게 경기인천센터를 없앴다. 내가 사직한 뒤 경기인천센터에 남아 있던 센터장 E를 대전으로 보내 버렸다. 센터장 홀로 둘 수 없어 새로 뽑았던 광고영업직원 한 명은 본사로 불러들였고.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에서 “경기인천센터가 수도권 경쟁력 강화 교두보”라느니 “업무상 필요했다”느니 했던 게 말짱 거짓말이었다는 걸 마이너 신문 스스로 내보인 셈.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 공익 위원 여섯은 이런 현실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하긴 노동자가 낸 구제 신청 이유서와 사용자의 답변서만으로 ‘벌어진 일을 가늠’하니 진짜 세상일을 어찌 알고. 공익 위원은 그저 탁자에 머물 뿐이다.

“겪어 보지 않아서 그래요. 그 사람(공익 위원)들이 해고된 적이 있겠습니까. 부당 전직이라도 당해 봤겠어요. 그러니 모르죠. 노동자가 얼마나 아픈지 알 턱 있나요. 모릅니다.”

맞다. 공익 위원 대부분은 부당히 해고되어 보지 않았을 터. 벌레 나오고 전기 끊기는 마이너 신문 경기인천센터 같은 곳으로 복직이랍시고 유배돼 본 적도 없겠지. 대학교수에 판사요 변호사니 설마 그랬을까. 내 발 밑에 벌레 없고, 내 코에 쓰레기 냄새 나지 않으며, 내 눈앞이 캄캄(정전)해지지 않으니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 턱이 없을 테고.

실제로 나와 얼굴 마주한 중앙노동위 공익 위원 셋은 대학교수와 판사였다. 하경효. 1952년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딸이 고려대 제2기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녀 음서(蔭敍) 입길에 올랐던 이. 홍성우. 1953년생.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김민기. 1971년생. 서울고등법원 판사. 음. 사용자에 짓밟히는 노동자 몸과 마음, 그 애끊는 고통. 몰랐으리라.

알았다면 “원 소속 부서(출판팀)가 폐지돼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부서로 발령한 것은 업무상 필요성이 있다”고 봤을 리 없으리. ‘유사한 업무’에 담긴 마이너 신문의 노동자 놀림과 해코지를 몰랐을 리도 없으리.

일이 생긴 그 자리. 마이너 신문 경기인천센터에 한 번이라도 가 봤다면 “출퇴근 시간이 늘어나긴 했으나 동료 근로자들도 출퇴근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수당을 더 지급하고 있어 생활상 불이익이 통상 감수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인사발령은 정당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리. 마이너 신문이 언제든 문을 닫아걸어도 좋을 만큼 경기인천센터가 하찮은 곳이었음을 진즉 알아봤으리.

마이너 신문이 왜 그리 내게 모질었는지를 제대로 짚었다면 그 모든 게 곧 부당노동행위였음을 느꼈으리. ‘노동부’ 앞에 ‘고용’을 내밀어 ‘고용노동부’라 부르듯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의사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노동관계법에 기대어 되레 노동자를 얽어매고 있음을 잘 알았으리.

나는. 한국 노동위원회를 겪었다. 공익에 걸맞다고 보기 어려웠다. 공익 위원은 탁자에 앉아 세상 바라보는 이에 지나지 않은 성싶었다. 노동자를 위해 노동자 곁에 섰다고 보기 어려웠다.

내 오랜 동지. 마이너 신문 노동조합 12대 지부장은 노동자 곁에 새롭게 섰다. 내 대리인이던 이호준 노무사도 여전히 노동자의 벗이다. “고맙습니다. 노동자 곁에 있어 주셔서.”

나를 부당 해고한 마이너 신문 사장과 사장을 위해 달음질하는 몇몇을 도왔던 노무사 K. 기업의 노동자 해고 해결사 노릇으로 그 바닥에서 제법 이름을 알린 듯한데. “가뜩이나 피땀 흘린 노동자에게 피눈물 더 쏟게 하지 맙시다. 당신 삶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소.” 노무사인데 마이너 신문사에서 잔심부름하는 D. “당신의 법적 자격과 이런저런 행위 덕에 눈물짓는 노동자 사라지고 웃는 이 많아지기를 바라오. 당신이 지금 당장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진 않소만 내 참으로 바라리다. 노동자 곁에 설 날 오기를. 당신이 아직 젊기에 하는 말이요. 늙고 나서야 뉘우치지 말라는 거지.”


▴2012년 십일월 이후 마이너 신문 경기인천센터로 간 일곱. 2014년 십이월 24일 유배됐던 나를 포함하면 여덟이다. 여덟 가운데 여섯이 마이너 신문을 등졌고, 2012년 십일월에 앞서 경기인천센터로 갔던 이 서넛도 모두 떠났다. 나를 비롯한 노동조합원도 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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