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현 등 지음. 도요새 펴냄. 2011년.
남으로 난 창을 열면 적상산 서쪽 벽이 보였다. 가을날 노을 지면 그 산이 왜 ‘적상(赤裳)’인지……, 늘 잊히지 않았다.
친구 셋과 함께 전라북도 무주군 ‘붉은 치마(적상)’에 올랐다. 제대한 지 한 달쯤 지난 1991년 구월이었다. 적상산성의 서창(西倉)이 있었다던 쪽에서 오른 뒤 북창(北倉)마을로 내려가 야영할 요량으로 정상을 넘어서는데……, 휑뎅그렁했다.
사방이 절벽이되 정상 부근은 흙으로 덮여 숲이 울창하고 물이 많기로 유명한 ‘적상’은 온데간데없이 굴착기 소리만 쿵쾅댔다. 무주양수발전소! 밤에 남아도는 전기로 아래쪽 물을 위로 퍼 올려 발전을 한다는 양수발전소의 위쪽 호수를 만들고 있던 것. 그때 그렇게 ‘적상’을 비롯한 덕유산국립공원의 녹지자연도(Degree of Green Naturality) 9등급 이상 산림과 습지생태계 십만 평이 양수발전소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녹지자연도 9등급이 8등급으로 조작돼 절대 보존할 지역이 훼손(235쪽)되기도 했다.
어디 무주뿐인가. 청평, 삼랑진, 산청, 양양, 청송의 자연이 양수발전소 때문에……, 시름했다.
한국 자연에 양수발전소를 부른 것은 ‘남는 전력’이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들어 심야에 전기를 싸게 쓸 수 있게 한 소비촉진책과 함께 양수발전까지 할 만큼 전력이 남아돌았다. 전력이 넘쳐난 것은 원자력발전소 때문. 1970년대에 착공한 고리 1·2·3·4호기와 월성 1호기가 잇따라 상업운전을 시작하자 “수요가 없어 전력이 남아돌고, 결국 원전을 가동하지 못해 막대한 매몰비용이 발생(252쪽)”했다. 투자한 돈을 회수할 겨를도 없이 전력이 그냥 샜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전력은 인위적으로 수요를 끌어올렸다. 전기료 인하가 잇따랐고, 1985년에 등장한 ‘심야전력제도’까지 더해지자 전력 수요가 크게 늘었다. 폭증한 수요는 1990년대 들어 ‘전력 부족 현상’을 불렀다. “전력 부족은 다시 원전 건설의 명분(253쪽)”이 됐다. 악순환! 한번 가동한 원전은 전기 생산량을 줄이거나 잠깐 멈출 수 없었다. 건설 기간도 10년을 넘기는 경우가 많아 계절과 시간에 따른 전력 수요에 무뎠다. 모르쇠로 발전을 해 알아서 쓰라는 격이었다. 때문에 정부는 예천양수발전소를 새로 짓기로 하는 등 좋지 않은 선택을 되풀이했다.
이제 달리 생각할 때다. 밤에 남는 전력을 이용하자는 양수발전소의 평균 가동률이 ‘4%’인 것만 해도 실패한 정책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잉여 전력을 소비하려고 추진한 심야전력제도와 충돌하면서 경제성이 더욱 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계획에 따라 한국전력이 발전소를 매각할 때의 걸림돌이 될 만큼 내부적으로도 문제(310쪽)”가 있다. 그런데 왜, 양수발전 건설계획이 계속 수립되는 것인가.
이쯤에서 묻자. 당신은 ‘전기세’를 내는가. 아니면, 전기요금? 진상현 경북대 교수(행정학)는 “일반 시민은 전기 사용에 있어 소비자가 아닌 피동적인 납세자로 전락한 상태(300쪽)”라고 썼다.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요금’이라고 부르며 한국 원자력 정책을 살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이 책에 담겼다.
투박하되 무겁다. 책에 담긴 여러 사실이 무거워서다. 더구나 2011년 삼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재앙을 부른 바에야!
덧붙여 하나. 한국 시민이 2011년 3·11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에 연료봉까지 녹아내린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본 터라 ‘안전한 원전 이용체계 확립’은 몹시 절박한 과제였다. 2011년 유월 후쿠시마현에 사는 여성 7명의 모유에서 ‘방사성 세슘’이 검출돼 내부피폭 우려까지 고개를 든 터라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당장 원전 규제와 진흥 기구가 모두 정부 부처에 속한 구조적 한계를 개선해야 하는 게 명료했다. 간 나오토 당시 일본 총리도 “원자력 진흥 기관과 점검(규제) 기관이 동일한 정부에 속해 독립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며 “원전 관리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규제·감독 기구인 원자력안전보안원이 산업 진흥 정책기관인 경제산업성에 속한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었다. 2011년 유월 십오일 일본 국민 74%가 원전 폐지에 찬성했다는 아사히신문의 설문(1980명) 결과도 전해져 원전 폐지를 향한 발걸음이 한층 빨라질 것으로 보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스위스·독일·이탈리아 국민이 원전을 거부했다. 점점 더 빠르게 세계 시민의 마음이 원전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원전을 놓지 않았다. 2011년 유월 전라남도 영광원전 앞바다에 그린피스(GreenPeace)의 ‘레인보우 워리어’호가 뜬 이유였다. 원전 안전성 논쟁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것. 뚜렷한 원전 규제·진흥 분리를 서두를 때였고, 따로 “우리 원전은 안전하다”고 목청을 돋우어 강변할 필요가 없었다. 명료하고 독립적인 안전규제체계부터 마련해야 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안전 열쇠는 ‘모든 원전을 당장 폐쇄하는 것’이다.
둘. 2011년 팔월 소금값이 1년 전보다 42.9%나 올랐다. 10킬로그램(㎏)들이 천일염 한 봉지 도매가격이 1만2000원으로 30년 만에 가장 크게 뛰었다. 소금값이 뛰니 간장·고추장·된장값도 들썩였다. 그해 겨울 김장이 ‘금(金)치’가 되면 어쩌나 걱정됐다. 2008년 말 세계 금융 위기로 경제 한파가 길어져 넉넉지 못한 서민 가계가 더욱 쪼들렸다.
소금값은 2011년 ‘3·11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가파르게 치솟았다. “방사능에 오염된 바닷물로 만든 소금이 나올 수 있다”는 뜬소문이 사재기를 부추긴 탓이다. 그해 여름 비가 잦아 천일염 생산량까지 많이 줄었다. 엎치고 덮친 격이라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염려됐다.
한국 염전이 그렇게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일본은 ‘15% 절전 짠물(노력)’을 짜냈다. 원전 54기 가운데 41기를 세워둔 채 굵은 땀 흘렸다. 가동률 24%였다. 발전용량 2663억9300만㎾h로 세계 제3 원자력 발전국가인 데다 원전 의존율이 30%에 이르는 나라가 원자로 열에 여덟(76%)을 세웠다. 그야말로 ‘원전 없이’ 여름을 난 셈이다.
전력 부족 현상은 없었다. 가정과 기업이 15%씩 절전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해 여름 전력 사용량이 가장 많았다는 팔월 십팔일 오후 두 시에도 전력예비율이 9.6%였다. 10% 안팎이었던 한국의 전력예비율에 버금갔다. 원전 54기를 모두 세워도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까지 얻었다.
일본 시민에게 찬사와 박수를! 정부가 ‘15% 절전’을 요청했는데 전력량을 25%, 많게는 30%까지 줄인 기업이 속출했다.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해 더위를 견디어 냈다. 견딜 이유는 분명했다. 후쿠시마에 사는 여성 모유에서 ‘방사성 세슘’이 검출되는 등 원전 사고 여파가 심각했다. 간 나오토 옛 일본 총리가 “도쿄에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정경이 머릿속에 어른거렸고 정말 식은땀이 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일본의 미래가 사라질 위기였던 것이다. 그는 “사고 전에는 원전을 활용해야 하고 일본 기술이라면 괜찮다”고 보았지만 사고를 겪은 뒤 생각을 바꿨다. 원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느껴 실행했다. 간 나오토, 아니, 일본 시민의 극적인 ‘탈원전’ 선택과 ‘원전 없는 여름’은 세계의 본보기가 됐다.
한국도 일본의 2011년 여름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땅이 크게 흔들리지 않아 해일이 밀어닥치는 일이 드물다고 안주하고 말게 아니다. ‘더 깨끗하고 더 안전한 발전·이용 체계’를 함께 생각해보자.
발전용량 1400메가와트(㎿)짜리 원전을 만드는 데 대략 2조 원에 십 년쯤 걸린다. 98㎿짜리 ‘대관령 풍력발전소’ 14개에 맞먹는 규모다. 발전량이 많고, 원전 터가 외진 탓에 송전 설비를 구축·관리하는 비용도 많이 든다. 가까운 곳에 친환경 발전소를 여러 개 짓는 게 좋겠다. 울진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큰돈 들여 강릉과 서울로 보내는 것보다 대관령 풍력발전소나 서해 조력발전소를 몇 개 더 짓는 게 낫다.
▴땅 흔들렸네. 지금도 흔들리고. 핵 발전 그만둘 때 됐다. 2016년 10월 1일 자 <한겨레> 14면과 <기후변화의 유혹, 원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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