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책좋아요 ILikeBooks

전업주부입니다만

eunyongyi 2020. 9. 27. 10:34

라문숙 지음. 엔트리 펴냄. 2018년 3월 23일 초판 1쇄.

 

집안일은 끝이 없다. 종류도 많고 시간도 품도 많이 든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건너뛰기가 안 되는 일들이다.······중략······매일 정리해도 매일 어질러지고 매일 빨아도 세탁물은 넘쳐난다.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지만 손을 놓으면 당장 표가 나는 기이한 일이다(15쪽).

 

남편과 아이에게 한 상 차려 주고 바라보는 게 좋아서 정작 자신은 허기도 잊는다(30, 31쪽).

 

왜 설거짓감이 내게는 일감으로 보이고 그들에게는 지저분한 부엌으로 보이는가 하는 질문(52쪽).

 

오늘은 밥 생각 따위 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하고 나온 날에도 ‘밥’은 따라온다.······중략······집에서 멀리 가면 갈수록 내가 밥하는 여자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진다(69쪽).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남편은 며칠 인터넷을 뒤지더니 기어이 편강을 만들어냈다(90쪽).······중략······서툰 손길이지만 장인 못지않은 정성으로 만든 편강은 한동안 남편의 간식거리가 될 것이다. 밀폐 용기에서 편강을 덜어내는 남편을 볼 때마다 밥하고 국 끓이는 법도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올 거란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는 건 비밀이다(91쪽).

 

어제와 오늘, 설거지는 남편이 했다. 나는 그동안 무시했던 왼손에 미안해하는 중이고, 남편은 벌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설거지에 드는 시간과 노고에 놀라는 중이다(118쪽).

 

집이 직장이고 하는 일은 살림인 사람으로 살자고 이제 와서 마음먹어도 턱도 없이 부족한 것 투성이라 매일 다짐하고 매일 포기하는 중이다(124쪽).

 

“⭘⭘가 밖에서 종일 일을 하고 들어왔는데 네가 빨래나 하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편안히 쉴 수가 없을 거야(127쪽).”

 

내게도 퇴근 시간과 주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에서 손을 놓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절실해졌다(129쪽).

 

종일 부엌에 있어도 무얼 하는지 묻지 않는다. 모습을 드러내고도 마음을 숨길 수 있어 쓸데없는 오해나 의문을 불러일으킬 염려도 없다(143쪽).

 

구내식당이 있어도 도시락을 싸 달라는 남편을 닮아서 아이도 고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 달라고 했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도시락을 싸서 자율 학습 시작 전에 매일 전해 주던 시절도 있었다. 한동안은 시댁에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락을 싸서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뜸해져서 한 달에 한두 번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겁나고 부담스러운 시댁용 도시락 싸기다(151쪽).

 

식사 준비를 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일 같았다. 먹는 거 말고 그렇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그 많은 것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172쪽).

 

신기한 건 밥과 국에 반찬 두 접시가 전부인데 왜 설거짓감이 많으냐는 것이다(208쪽).

 

결혼 25년 만에 처음 해 보는 친구와의 외박이었다(265쪽).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안일에서 벗어날 틈이 없다. 설거지가 즐겁고 재미나는 때도 있어서 접시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예쁘다고 중얼거려도 매일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두어 시간의 집중과 수고 끝에 만들어 낸 한 냄비의 음식이 사라지고 나면 열 개의 그릇과 도구와 음식 찌꺼기가 남는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이제 끝났구나 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졸고 있다.······중략······나는 지붕 밑 다락방에서 잠들었던 소공녀나 재투성이 신데렐라 같다. 언젠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은 시린 발과 아픈 어깨를 참을 수밖에 없는 주부로 산다(281쪽).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움츠러들고 잘 살고 있느냐는 인사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그건 상당 부분 집안일을 집 밖에서 내가 했을지도 모를 일들과 같은 무게로 여기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282쪽).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지만 그게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슬프다. 원하는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