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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eunyongyi 2020. 11. 7. 16:28

매기 앤드루스·재니스 로마스 지음. 홍승원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20년 3월 2일 초판 1쇄.

 

1867년에는 최초로 공장에서 만들어진 분유가 등장해 유럽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다(29쪽).

 

모유 수유는 종교적인 의무이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와 19세기 미국의 노예제 사회에서는 흑인 여성 노예를 유모로 쓰는 관습이 보편화됐다. 유모의 역할을 맡는 여성은 대체로 자기 아이를 잃거나,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유기할 수밖에 없었다(30쪽).

 

팝 듀오 유리스믹스가 1985년에 발표한 페미니스트 찬가의 후렴구는 다음과 같다.

“Sisters are doing it for themselves,

 Standing on their own two feet,

 And ringing on their own bells.

 Sisters are doing it for themselves(42쪽).”

 

아내, 딸, 자매, 하인으로서의 여성은 전통적으로 가사에 관련된 과제의 대부분을 떠맡아 왔다(68쪽).

 

많은 여성들에게 신용카드는 자유, 권한, 자립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21세기에 많은 엽서와 포스터에 이런 인용구가 새겨진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한 남자가 요정에게 그 어떤 여성도 그를 거부할 수 없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요정은 그를 신용카드로 만들었다(127쪽).”

 

여성의 머리쓰개에 대한 강박관념은 21세기 정치문화의 혼란한 풍토에서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달리아 모가헤드 워싱턴DC 사회정책연구소장은 이렇게 주장한다. “히잡을 쓴 여성은 그저 몸과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목소리와 지성까지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히잡이 여성을 억압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여성 힘의 원천이 여성의 정신이 아닌 여성의 신체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189쪽).” 

 

21세기인 지금도 세계 4분의 1 가량의 국가가 여전히 여성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중략······일부 다른 나라들에서는 레즈비언들이 동성애를 ‘교정’하겠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교정 강간(rape conversion)’을 당하거나 이성애자와의 결혼을 강요당한다(226쪽).

 

마차 여행은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른 경험을 제공했다. 젊은 남성에게는 종종 모험과 용감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 막대한 부와 황무지에서 개척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을 상징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마지못해 따라나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편이 가기로 결정하면 젊은 아내는 함께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의 일기와 편지에는 종종 의지했던 친구들과 가족들, 다시는 돌아오기 힘들 고향을 뒤로 한 채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한 비탄과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247쪽).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 근무로 약 1만7000명의 여성들이 장애를 입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산업노동자들이었다. 전쟁의 모순으로 여성들은 위험하고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역할을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동등한 임금이나 보상을 받지는 않았다(325쪽).

 

1878년에 런던대학교는 영국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학위를 수여한 학교가 됐다. 옥스퍼드대학교는 비록 여학생을 받기는 했으나 정식 학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학과를 성공적으로 이수해도 학위를 수여하지 않다가 1920년이 되어서야 런던대학교의 선례를 따랐다. 실제로 1897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여성에게 학위를 수여하고 정식 학생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을 때 폭동에 준하는 소요가 발생할 정도였다.······중략······여성들은 1948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케임브리지에서 학위를 받았다(329쪽).

 

청소와 간병, 요리 등 이른바 ‘핑크 직업(pink job)’은 보수가 형편없다(334쪽).

 

고대 이집트의 여성들은 법정에 갈 수 있었고, 재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맺고, 남성과 같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평등주의적인 왕국이었음을 암시한다(399쪽).

 

영국 광부 18만7000명이 참여한 길고 험난한 산업분쟁 후, 1984년 3월 석탄 이사회 의장은 경제성 없는 광산 스무 군데를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2만 명이 정리해고됐고 채굴 산업과 공동체는 함께 쇠망하기 시작했다(443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