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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eunyongyi 2020. 11. 13. 21:26

벨 훅스 지음. 이순영 옮김. 책담 펴냄. 2017년 10월 10일 초판 1쇄.

 

언제든 한 사람의 남성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가부장적 경계를 용감하게 넘을 때 여성과 남성, 그리고 아이들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나는 살면서 알게 됐다(39쪽).

 

교회에서 부모님은 신은 남자가 이 세상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창조했으며, 남자가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고 남자에게 복종하고 강한 남자에게 언제나 종속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여자의 의무라고 배웠다. 두 분은 신이 남자라고 배웠다. 이 가르침은 두 분이 경험하는 모든 단체 ━ 교회, 학교, 법원, 클럽, 운동 경기장 ━ 에서 더 분명히 확인됐다(53쪽).

 

존 브래드쇼 “가부장제는 남성중심주의와 힘을 그 특징으로 한다(60쪽).”

 

페미니스트들이 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남성우월주의’와 ‘성차별주의’라는 용어 대신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62쪽).

 

나는 강의를 하면서 미국의 정치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제국주의 백인우월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그럴 때면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67쪽).

 

가부장제는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가부장제는 미국에서 남성들을 괴롭히는 심리적 질병의 근원이다(69쪽).

 

페미니스트가 남성을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러 이론을 펼친 탓에 남자아이들이 고려될 수 있는 여지, 여자아이들이 그랬듯 남자아이들 역시 가부장적 착취와 억압에서 구조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종종 차단됐다(83쪽).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자아이들이 분노를 떠뜨리는 것을 대체로 정상적인 행동으로 여기며 청소년기의 비행을 오래전부터 이런 말로 정당화해 왔다. “남자애가 다 그렇지.” 가부장제는 남자아이들이 분노를 느끼게 하고 그런 다음 당분간은 그 분노를 억누르게도 하면서 나중에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이용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다. 국가를 단위로 생각할 때 이 분노는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 증오, 여성과 남성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날 수 있다. 남자아이들이 갈등을 해결할 다른 방법들을 찾아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세계를 다니면서 전쟁을 벌이려 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때 이 분노가 필요하다(101쪽).

 

가난한 노동자 계급 남자아이들과 성인 남성들은 종종 가부장적 남성성의 가장 나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폭력적으로 행동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남자다움’을 확실히 보여 주는 가장 쉽고 값싼 방법이기 때문이다(133쪽).

 

주커브와 프랜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려움이라는 고통, 스스로가 무가치하다는 생각,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렬할수록, 성행위를 더 집요하게 원하게 된다.”

그러니 섹스는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자기 위안의 수단이 된다. 섹스는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배출하는 수단이다. 섹스 중독자는 대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다. 가부장적 남성들은 자신의 고통을 드러낼 출구가 없으므로 그 고통을 배출할 방법을 찾는 것뿐이다. 섹스 중독자는 무능해지는 걸 두려워하고 거부당하는 걸 두려워한다고 주커브와 프랜시스는 강조한다(149쪽).

 

개개의 남성들이 성차별주의 인식에 용감하게 도전하고 가사 일을 하면서 관계의 기술 역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 역할에 동참하면서였다(173쪽).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한, 그들 사이에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과 지배가 공존할 수 있다는 말은 가부장제가 우리 모두에게 하는 아주 강력한 거짓말들 중 하나다(211쪽).

 

가부장 문화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다(233쪽).

 

<파트너십의 힘>에서 리안 아이슬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부 여성들은 자신의 억압된 분노를 그들이 허약하거나 연약하다고 느끼는 남자들 ━ 예를 들어, 아들 ━ 에게 돌린다(236쪽).”

 

점차 성숙해지면서, 그리고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가한 학대를 인정할 만큼 페미니스트 의식이 성장하면서 나는 남성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었다. 남성을 그저 여성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존재가 아닌 동지,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함께 가는 동료로 볼 수 있었다(245쪽).

 

양부모 가정에서 정확한 판단력으로 상황을 관찰하고 어머니의 사디즘이 나타나지 않도록 개입하는 역할을 하는 성인 남성이 있다면, 아이에게는 아주 다행한 일일 것이다. 이런 개입은 어머니 혼자 꾸려 나가는 가정에는 존재하지 않는다(248, 249쪽).

 

모건 스콧 펙은 구획이 고통이라는 느낌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에 가서 자신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피조물과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월요일 아침이면 유독성 폐기물을 강에 버리라는 회사의 방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따르는 사람을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다. 그는 종교를 하나의 구획 안에 넣고 일을 다른 구획 안에 넣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266쪽).

 

완전해질 수 있는 아버지만이 권위가 떨어지지 않고도 아들에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온전함을 지닐 수 있다(275쪽).

 

대니얼 베리건은 관계, 헌신적인 파트너십이 저항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289쪽).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에게 상호성이 바탕이 되는 관계의 모습,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 파트너십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의 친밀한 삶을 변화시켰다. 이 매혹적인 약속이 실현되려면 여성과 남성,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의식이 더는 가부장적 사고에 지배당하지 않아야 한다(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