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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운동사

eunyongyi 2021. 8. 9. 00:02

이완기 지음. 자유언론실천재단 펴냄. 2020년 11월 24일 초판 1쇄.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파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도 아니하고···”라고 밝혔다(27쪽).

 

 매일신문은 본래 배재학당 학생회가 주도하는 협성회의 주간회보였다. 이를 1898년 일간으로 바꾸면서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변경했다(28쪽).······중략······매일신문은 1898년 5월 이승만이 협성회 회장을 맡으면서 내부 분열이 극심해지자 휴간, 사옥이전, 소송 등을 반복하면서 혼란을 겪었고, 이듬해인 1899년 시설 부족과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말았다(30쪽).

 

 애초에 조일동화주의를 표방했던 대정실업친목회가 창간한 조선일보는 출발부터 친일신문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어 조선인 독자들의 호응을 얻기는 어려웠다(67, 68쪽).

 

 동아가 폐간당한 뒤 김성수는 1943년 11월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글을 써 조선의 청년학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103쪽).

 

지방에는 ‘1도 1 신문’이라는 일제의 언론정책 때문에 해방 후 각도에서는 주민들이 일본인 신문사를 접수하여 신문을 창간했다(119쪽).

 

한국과 관련된 사항은 “한국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에 의한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협의한다”는 내용이었다. 회담 과정에서 미소 간에 신탁통치에 대한 이견이 있었지만 결국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로 조정되었다.······중략······제일 먼저 동아일보가 협정 결과의 공식 발표 하루 전인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머리에 “蘇聯信託統治 主張”, “소련의 口實三八線 分割占領”, “米國卽時 獨立 主張”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미 군정도 삼상회의 결과를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중략······동아일보는 그 핵심 내용이 소상히 알려진 이후에도 이를 무시한 채 ‘신탁통치’에 초점을 맞춰 ‘반탁운동’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그 보도들은 본말이 전도된 왜곡 보도였고 사실 관계를 뒤집어엎은 허위보도였다. 우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의 주요 핵심 사항은 ‘임시 민주정부 수립’이었지 ‘신탁통치’가 아니었다.······중략······더 놀라운 것은 실제 삼상회의 논의 과정에서 소련은 ‘즉시 독립’을, 미국은 ‘5년 이상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가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타협안에 삼국의 외무상이 합의했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었다(132, 133쪽).

 

동아일보는 또한 이듬해인 1946년 1월 16일자 1면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기를 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올렸다. 이 기사는 동아일보가 미국 방송 보도를 확인도 없이 인용 보도한 오보였다(133쪽).

 

한민당 대변자인 동아일보는 가장 앞장서서 단독선거를 지지했다(149쪽).······중략······5·10선거를 이틀 앞두고 동아일보 사옥이 방화로 불에 타는 등 피해도 컸다(150쪽).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면 우익 계열의 신문도 예외가 없었다. 1948년 10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삼규를 경찰령 위반혐의로 구속한 것은 그 좋은 예였다(163쪽).

 

이승만은 1949년 6월 9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169쪽).

 

 언론탄압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언론인들도 많았다. 체포되거나 군사재판에 회부된 언론인만 960명에 달했다.······중략······1962년 3월, 박정희는 김지태의 아내 송해영을 밀수입에 따른 관세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일본 체류 중에 아내의 수감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한 김지태도 구속했다. 김지태는 옥중에서 소유 재산의 기부 압력을 받았고 수감 두 달 만에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과 부산 서면 일대의 토지 10만 평 등 소유 재산의 기부 승낙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기부 재산은 박정희의 개인 소유인 5·16장학회로 넘겨졌다(191, 192쪽).

 

1964년 11월 조선일보 리영희 기자의 구속을 시작으로 기자의 연행, 구속 등이 연속으로 발생했고 괴한들에 의한 폭력도 잇달았다(197쪽).

 

1984년 4월 전라북도 전주교구의 박병준 신부를 비롯한 고산 천주교회와 완주의 가톨릭농민회는 ‘TV 시청료는 민정당과 정부만 내라’는 성명서에서 “암담한 농촌 현실의 귀와 눈이 되어야 할 방송이 일천만 농민의 삶을 부정한 채 소수 몇 사람의 방송으로 전락한 데 분노를 느끼며, 이제 우리 농민은 침묵을 깨부수고 우리의 권리를 우리 손으로 지킬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279쪽).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 6월 임수경 학생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석 등은 누가 보아도 7·7선언이 제시한 대북 정책노선의 분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중략······노태우 정권은 1년 전 북방외교를 선언했던 분위기에서 태도를 돌변해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학생을 구속했다.······중략······전국교직원노동조합 또한 공안정국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5월 창립된 전교조는 보수언론의 융단폭격을 맞았다(311쪽).

 

1990년 9월 우루과이라운드로 피폐해진 농촌문제를 다룬 MBC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가 9월 4일로 방송 시간까지 예고되었는데 갑작스런 최 사장의 지시로 방송이 보류되는 일이 발생했다. 노조의 항의가 뒤따랐고 노사 간 마찰이 빚어지는 과정에서 김평호 노조 사무국장이 해고됐다(341쪽).

 

녹음테이프에는,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우리가 남이가”라면서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가 어쩌고 하면 부산 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칵 빠져 죽자.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각 기관장들은 맞장구치는 장면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353, 354쪽).

 

 민주화 이후 언론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것은 언론자본의 자유요 언론사 사주의 자유이지 언론인의 자유는 아니었다(358쪽).

 

언론의 보수화는 점차 깊어 갔고 노동조합이 고고지성으로 외쳤던 언론의 독립, 언론의 민주화는 조합원들의 가슴속에서도 점점 멀어져 갔다(375쪽).

 

새언론포럼은 회원 상호 간의 친목도모뿐 아니라 언론 현장과 그 현장을 둘러싼 법과 제도의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여전히 수구족벌언론과 재벌언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언론 현실을 타개하는 일이었다. 수구의 틀 속에 갇혀버린 기득권 보수언론의 낡은 시각과 몇몇 언론권력의 의제 독점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남으로써 보다 민주적인 담론 창출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382쪽).

 

불콰한 얼굴로 나타난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항의하는 국민신당 당원들에게 “니네들, 내일모레면 끝이야. 국민회의, 국민신당 너희는 싹 죽어. 까불지 마”라고 외쳤다(397쪽).

 

 1999년 10월 2일 검찰은 보광그룹 대주주인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조세포탈과 배임 혐의로 구속 수감했다(419쪽).

 

1994년 5월 방송사노조협의회(방노협)의 결성은 목동 방송회관 입주권 확보가 직접적 계기였지만 그 배경에는 ‘방송독립과 방송 민주화’라는 변혁적 차원의 투쟁 목표가 깔려 있었다. 방노협은 민주언론실천모임, 방송관련 정책토론회, 동맹파업 등의 연대활동을 펼치다가 1995년 1월 방노위(한국방송노조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432쪽).

 

 마침내 2000년 11월 24일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전국언론노조가 창립되었다(434쪽).

 

과거 언노련 시절에는 민실위 활동, 언론민주화, 저널리즘의 원칙, 보도의 공정성 등에 대한 논의에 함께 참여했던 조중동 소속 언론인들이 산별노조 전환 이후로는 완전히 단절되어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다(435쪽).

 

2009년 1월 PD수첩 수사를 책임진 서울중앙지검 임수빈 부장검사는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며 사표를 제출했다.······중략······검찰은 2009년 3월 이춘근 피디, 4월 김보슬, 조능희 피디와 김은희 작가 등을 차례로 체포했다. 두 차례에 걸친 검찰의 압수수색은 노조원들에 의해 저지당해 불발로 돌아갔다. 검찰은 작가 김은희의 전자우편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는 등 인권침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488쪽).······중략······2019년 1월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검찰의 수사 착구 자체가 부당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489쪽).

 

 파업이 일주일가량 진행된 2009년 4월, (YTN) 노조는 사측과 합의문을 작성하고 파업을 풀었다.······중략······6월 ‘공정방송을 위한 노사협약’이 체결되었는데, 협약문은 노사 공동으로 공정방송위원회를 구성하고, 불공정보도 책임자에 대해 문책 또는 보직 변경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며, 공방위 소집을 2회 이상 거부할 경우 보도국장 신임투표를 실시한다는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526쪽).